“그 자체로 우리 시대의 삶에 대한 진실한 표현”
조경란 「그들」 대상 수상
블라인드를 꿰뚫는 눈부신 단편들!
대상작 「그들」은 삶이 중단될 위기에 내몰린 두 사람의 이야기를 그린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우울증을 앓아 방안에 홀로 둘 수 없는 어머니와 단둘이 살아가는 종소, “지금껏 지켜온 생활이 모두 무너져버릴 거란 불안”에서 언제든 벗어날 수 있게 매일 같은 에코백에 단출한 짐을 챙기는 영주. 종소는 자신을 교수 임용 과정에서 배제시킨 최교수에게 복수하기 위해 그의 아내 영주가 운영하는 카페에 찾아간다. 그러나 카페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는 동안 비로소 평온을 찾은 종소는 어느샌가 복수의 순간이 미뤄지기를 바라게 된다.
단지 주어진 일을 겨우 해내고 있었을 뿐인데, 이유도 모르는 채 그 불안하고 버거운 삶조차 속절없이 무너져간다. 하지만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재활용쓰레기를 정리하고 튿어진 주머니를 꼬매며 가까운 사람의 마음을 돌보는 매일의 일을 포기하지 않고 해낼 때 그들에겐 “새로운 리듬이 도래할지도 모를 틈새들”(권희철 리뷰)이 생겨난다. 그런 진실을 「그들」은 적당히 그럴싸한 응원이나 당위로 갈무리하지도 않는다. “한 편의 소설이 다루기에는 너무 많은 요소를 끌어들이”면서도 그것들을 지극히 “촘촘”(심사평)하게 배치해, 손쉽게 요약되기 어려운 복잡다단한 삶의 궤적을 놀라운 솜씨로 구현해내는 데 이르는 것이다. 그 정도의 매조지가 아니고서는 독자는 결코 탄복하지 않는다는 걸 조경란 작가의 바지런한 손은 본능적으로 알고 있는 것이다.
“이 투명한 문장들의 연쇄 속에서, (…) 그토록 뜨겁게 부글거리는 주름 많은 커다란 물결을 만들어냈다는 것이 놀라웠다. 그러나 그것은 무슨 현란한 문학적 장식물 같은 것이 아니고 삶에 대한 정직하고도 탁월한 관찰에서 비롯된 표현일 것이다. 소설가는 이야기꾼이기 이전에 삶에 대해 정직하고 정확한 문장들의 세공사이며 그 세공된 문장들을 배열하고 재배열하는 작곡가여야 하는 것은 아닌지, 그렇게 만들어진 섬세한 텍스트의 질감을 통해서가 아니고서는 표현하거나 느낄 수 없는 진실한 이야기가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하게 된다. 적어도 「그들」을 읽는 동안에는 그렇게 된다. 그것이 이 작품을 올해의 김승옥문학상 대상 수상작이 되게 했다.” _심사 경위 및 심사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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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김승옥문학상 수상작품집』은 시의적인 주제를 시적인 문체로 유려하게 풀어내는 이야기들로 반짝인다. 「양치기들의 협동조합」(신용목)은 스페인 내전 때 희생된 주민들의 무덤에 군자금이 묻혀 있다는 소문을 주목한다. 무덤을 파헤치는 동안 밝혀지는 보편적인 역사의 격랑을 함축적인 언어로 전하는 소설은 한 심사위원으로 하여금 ‘소설이 쓰고 싶어졌다’고 말하게 하기도 했다.
세월호 참사 10주기를 맞은 올해 발표된 「내일의 송이에게」(조해진)는 꼭 그만큼의 시간이 지난 안산의 풍경을 차분히 살펴본다. 떠난 이들을 아프게 기억하면서도 그후의 삶을 나름의 방식으로 살아가는 이들의 구체적인 모습은 우리로 하여금 지난 10년과는 다른 내일을 기약하게 한다.
이민자 문학이 세계문학의 주요 화두가 되어가는 지금, 반수연의 「조각들」이 도착했다. 엄마를 잃은 어린 딸을 위해 아버지는 직업도 나라도 버렸지만, 자라는 동안 조금씩 멀어져만 가던 딸은 마침내 독립을 선언한다. 그러나 그들이 밴쿠버에서 샌프란시스코를 향해 떠난 마지막 ‘로드 트립’은 서로가 서로에게 꼭 맞는 조각이 되어가는 시간을 선사한다.
기만적이고 가혹한 세계를 폭로하는 소설가 안보윤의 「그날의 정모」는 정신질환을 겪는 어린아이에게 가해지는 잔인한 시선과 폭력들을 고발한다. “마침내 지옥을 향해 함께 손잡고 가는 남매의 행복한 악몽의 기록”(권여선 리뷰)으로서 가해와 피해, 정상과 비정상이라는 공고한 이분법을 찢어발기는 소설은 그 폭발적인 에너지로 시종일관 눈을 고정시킨다.
「그래도 이 밤은」(강태식)의 주인공은 바람을 피우는 아들의 뒤를 쫓는 노인이다. 그의 기묘한 행적을 따라가던 독자는 사건의 진실과 함께 소설이 삶을 위무하는 방식 또한 깨닫게 된다. 심사장에서 심사위원들의 여러 독해가 모여 “하나의 독해를 만”드는, “몹시 드물고 또 흥미로운 경험”(심사평)을 남기기도 한 이 소설은 누구라도 반드시 한번 더 읽게 되는 소설이 아닐 수 없다.
여행을 떠난 집주인 대신 ‘사모님’으로 행세하는 ‘이모님’의 이야기인 「조각들」(이승은)은 영화 <기생충>을 연상시키는 소재뿐만 아니라 스피디하고 흥미진진한 전개가 독자에게 이어질 비극을 기대하게 한다. 마침내 벌어지는 클라이막스의 순간, 이승은은 그 비극의 돌파구로 “허위와 당위를 동시에 품은 자기 서사를 기어코”(백지은 리뷰) 만들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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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경란 「그들」 이 소설은 그 어리석고 하찮은 인생들이 자기 삶에 쏟아지는 부당한 고통과 무의미한 우연들을 얼마나 간절하게 받아들이고 또 그것에 절박하게 대처하려 하는지를 세밀하게 보여주는 바람에 우리가 그 인생들을 더이상 어리석고 하찮은 것으로는 볼 수 없게, 오히려 탄복하게 만든다. _권희철(문학평론가)
“남자가 영주를, 영주가 남자를 보았다. (……) 다른 사람은 없었다. 그 눈에 당혹감과 불안과 그리고 이성적으로 제어할 수 없는 어떤 두려움과 무모한 감정이 섞여 있다는 걸 아는 사람도. 큰일난 거죠. 네, 큰일난 거예요, 우리. 두 사람은 서로에게 집중했다. 그 눈에서 무슨 표시를 찾듯.”
■ 199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불란서 안경원」이 당선되어 등단. 문학동네작가상,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 현대문학상, 동인문학상, 이상문학상 등 수상.
신용목 「양치기들의 협동조합」 시는 어디까지 참말이고 소설은 어디까지 거짓말일까. 기억은 얼마만큼 거짓말이고 상상은 얼마만큼 참말일까. 이야기는 이야기일 뿐. 시만으로는 상상할 수 없고 소설만으로는 기억할 수 없는 슬퍼서 아름답고 아름답도록 슬픈 이야기. _김경욱(소설가)
“5월 17일. 무 5개와 밀 10홉. 저녁은 밀을 갈아서 무와 함께 먹음.
7월 4일. 알리샤 집 마당에서 옥수수 반 가마니를 따 옴. 알리샤에게 축복을.
9월 7일. 오랜만에 내린 비. 아이들을 위해 23알의 감자를 삶음. 성인들은 금식.
노트를 덮은 레닌은 어떤 시간을 만져보라는 듯 자색 가죽 노트를 나에게 내밀었다.
그곳에서 나온 물건이라네. 자기로 만든 상자 속에 단정하게 놓여 있어서 유일하게 타지 않은 거였어.”
■ 2000년 『작가세계』 신인상에 시 「성내동 옷수선집 유리문 안쪽」 외 4편이 당선되어 등단. 육사시문학상 젊은시인상, 시작문학상, 노작문학상, 현대시작품상, 백석문학상, 시와표현작품상 등 수상.
조해진 「내일의 송이에게」 조해진은 이렇듯 참사 십 년을 기록한다. 살아 있는 사람, 살아남은 사람. 참사 십 년에 조해진은 생존자들에게 이렇게 묻는다. 어떻게 살고 있느냐고, 괜찮으냐고. 이런 간절한 질문들이 이어진다면 우리는 적어도 우리의 삶에 “백기”를 들지 않을 수 있다.
_하성란(소설가)
“여자가 혼잣말을 하든 소리 내어 울든, 정상인의 범주에서 벗어난 사람을 바라보는 온기 없는 시선은 그대로였다. 학교에 가는 대신 걷고 또 걸었던 그때, 그녀도 그런 시선을 받았는지 모른다. 학교에 있어야 어울리는 교복 차림으로 간간이 훌쩍이며 걷곤 했으니까. 더 혹독하게 가난해지고 외로워질 부모의 미래를 생각하면서, 왜 그애가 전화를 해도 받을 수 없는 곳으로 떠났는지 알 수 없어서, 가끔은 어째서 아무도 그녀에게 괜찮으냐고 묻지 않는지 궁금했으니까.”
■ 2004년 『문예중앙』 신인문학상에 중편소설 「여자에게 길을 묻다」가 당선되어 등단. 신동엽문학상, 무영문학상, 이효석문학상, 김용익소설문학상, 백신애문학상, 형평문학상, 대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