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자, 사람의 숨결이 스며 있는 사물
의자는 우리 주변에서 가장 흔히 볼 수 있는 생활 밀착형 오브제다. 집, 카페, 관공서 대기실이나 공연장 하다못해 아파트 옆 산책로나 호숫가 등 인간의 발길이 닿는 어디에나 의자가 있다. 그렇다면 대체 이 의자들은 언제, 어디서, 어떻게 탄생했을까?
인간에게 가장 가까운 가구이다 보니 의자만큼 라이프 스타일의 변화를 직접적으로 반영하는 가구는 드물다. 의자는 삶의 형태나 풍경, 형식과 관습의 변화에 따라 사소한 장식이나 디테일뿐 아니라 구조와 종류 자체가 완전히 바뀐다. 그래서 의자의 계보도와 가계도는 『반지의 제왕』만큼이나 복잡하고 다양한 이야기들로 채워져 있다.
이 책에서는 중세 시대부터 19세기 산업혁명 이전까지의 ‘의자’가 당대인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우리가 유럽의 성당과 궁전에서 보는 유서 깊은 의자들이 어떻게 어떤 이유로 태어나 소멸했는지를 추적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현대의 의자와는 전혀 다른 콘셉트와 경제성, 미의식에 따라 제작된 근대 이전의 의자들은 생산과 판매가 산업화되기 이전의 시대, 생산자와 판매자가 분리되지 않고 공정의 대부분을 수공에 의지하던 시대의 ‘작품’들이다.
의자에 대한 선망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하지만 과연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던 이러한 앤티크 의자들이 단지 지나간 과거의 유물에 불과할까? 그렇지 않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우리는 각종 모임과 행사에서 가장 사회적 지위가 높은 사람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다. 남들이 서 있을 때 안락의자에 느긋하게 앉아 주위를 둘러보는 이, 바로 그 사람이다. 그리고 우리는 누구나 그의 자리를 욕망한다. 루이 14세 궁정인들이 ‘타부레’라는 지금은 이름도 생소한 의자를 욕망하고 중세인들이 대성당의 어둠 속에 숨겨져 있던 ‘스탈’을 동경했던 것처럼…….
오늘날 고급 프렌치 레스토랑에 놓여 있는 둥근 등받이의 고전 의자는 18세기판 네크워크라 할 수 있는 살롱의 붐을 타고 이성의 빛으로 세상을 밝히고자 한 시대를 대표하는 의자다. 이 의자에 등을 기대고 다리를 꼬고 앉은 부르주아들이 문화의 전면에 나서던 시대, 이 시대의 풍경은 오늘날에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미국의 햄프턴이나 베벌리힐스의 상류층들이 가장 선호하는 앤티크 의자, 경매장에서 최고가를 기록하며 미국 대통령의 집무실에도 놓여 있는 의자. 이 의자는 어떤가? 가구계의 셰익스피어라고 불리는 치펀데일의 가구는 여전히 가장 클래식한 아이템이다. 하지만 마호가니로 제작되어 고전적인 인상을 풍기는 이 의자 속에는 18세기 산업혁명 이전에 영국에서 싹튼 ‘혁신의 정신’이 숨어 있다.
이 책은 근대 이전의 의자 다섯 점을 통해 각각의 의자가 품고 있는 당대의 풍경과 사람들을 다룬다. 의자의 고유한 이름이나 스타일별 특성 외에도 생활사적인 부분에 초점을 맞추어 의자의 탄생과 사망을, 그 특별한 구조와 가계도를 만들어낸 근원이 무엇인가를 탐구함으로써 좀 더 본질적인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고자 한다.
중세 시대부터 매뉴팩처까지
특별한 다섯 개의 의자 이야기
중세의 민낯을 새긴 의자, 미제리코드
유럽의 대성당을 여행하다보면 매우 특이한 건축물 같은 의자인 스탈을 볼 수 있다. 역사상 최초로 가구를 다루는 전문 직업군인 장인이 탄생했던 중세 시대, 스탈은 토목공이자 가구 제작자였던 이들이 만든 중세의 걸작이었다. 중세 시대 권력자인 주교를 비롯해 고위 성직자들을 위한 의자였던 스탈. 이 스탈에는 널리 알려져 있지 않은 중세의 민낯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의자가 붙어 있다. ‘미제리코드’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이 의자를 통해 대성당의 담벼락 아래 숨어 있는 중세인의 일상으로 들어가보자.
루이 14세의 사라진 은옥좌를 찾아라!
지금은 상상할 수도 없지만 루이 14세 시대 ‘거울의 방’을 장식했던 것은 은가구였다. 17세기 유럽의 그 어떤 궁전보다 화려했던 베르사유 궁에는 1톤이 넘는 은가구와 2미터에 달하는 은화병, 은화분이 즐비했다. 전쟁으로 인해 한날한시에 이 세상에서 사라져버린 루이 14세의 은공예품 컬렉션 그리고 당대인의 증언으로만 남은 루이 14세의 옥좌. 과거의 어느 시점에 분명히 존재했지만 신기루처럼 사라져버린 루이 14세의 옥좌는 과연 어떤 비밀을 품고 있을까. 1686년 9월 1일 태국의 아유타야 왕국에서 10개월에 걸친 여정 끝에 루이 14세를 알현했던 코자 판 대사 일행의 발자취를 따라 루이 14세의 옥좌를 추적한다.
사물의 가치에 관한 무서운 진실, 타부레
콧대 높은 왕족과 귀족, 궁정인들이 앉아만 볼 수 있다면 영혼까지 바칠 수 있다고 증언한 의자, 오늘날 타부레는 앤티크 시장에서조차 외면당하고 연구서에서도 다루지 않는 아주 사소한 의자로 전락했다. 하지만 생시몽과 프리미 비스콘티, 마담 세비녜가 증언했던 그 시절 타부레의 영화(榮華)는 대단하다. 등받이도 없는 일개 스툴에 불과한 의자가 선망과 갈등, 배신과 음모의 원천이던 시대. 타부레는 사물의 가치가 어떻게 매겨지는지에 관한 무서운 진실을 들려준다.
18세기 실존 장인의 생생한 가구 제작 현장
프랑스 국립고문서 보관소의 낡은 문서 몇 장으로 남은 의자 장인 루이 들라누아의 금전출납부. 단 몇 장에 지나지 않는 이 고문서 속에는 의자 제작에 관여했던 수많은 18세기인들의 생활상이 숨어 있다. 파리 최고의 의자거리 본누벨에서 대팻밥과 나무 먼지를 풀풀 날리며 의자 만들기에 몰두한 장인들, 식민지에서 가져온 목재가 끝도 없이 쌓여 있던 파리 센 강의 목재상, 폴란드 바르샤바와 파리를 오가던 국제적인 건축가, 인체 표본 못지않은 정밀한 의자 모형을 만들던 밀랍 모형 전문가 등 18세기 의자 산업의 정수가 펼쳐진다.
가구계의 셰익스피어, 치펀데일의 혁신적인 의자
백악관에서 미국 대통령이 인터뷰를 할 때마다 등장하는 의자는 영미권에서 가장 클래식한 의자로 손꼽히는 토머스 치펀데일의 게인즈버러풍 의자다. 육중한 마호가니로 만들어 척 보기만 해도 고전미가 넘치는 이 의자에는 현대인이 상상할 수 없는 매뉴팩처 시대의 혁신이 숨어 있다. 치펀데일의 무엇이 그토록 당대인들을 매료시켰을까? 영국인들의 자부심, 가구계의 셰익스피어라 불린 토머스 치펀데일의 성공 비결과 비전을 만나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