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에 가장 흥미진진한 영어 소설을 쓰는 작가들 중 한 명”이라는 찬사를 받는 도리스 레싱의 『생존자의 회고록』(이선주 옮김, 황금가지 펴냄)이 그녀의 2007년도 노벨 문학상 수상을 계기로 새롭게 출간되었다. 도리스 레싱은 인종차별, 사회주의, 생명과학 등 20세기의 거의 모든 주요 화두를 주제로 글을 써 온 작가이며, 이 책은 주인공의 의식을 따라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기법뿐 아니라 전체 배경 설정에 과학 소설의 영향이 두드러지는 독특한 작품이다. 20세기 SF의 클리셰가 되다시피 한 ‘문명 붕괴를 맞이한 근미래 세계’를 배경으로 깔고, 어느 날 갑자기 출현한 정체 모를 소녀와 그 아이를 키우는 중년 여인인 화자 간의 모녀 관계가 진행되어 나간다.
일반적인 상업 작가들과는 달리, 레싱은 어떻게 해서 인류가 멸망의 문턱에 다다랐으며 사회가 어떻게 붕괴했는지를 꾸며 내고 설득하는 데 힘을 소비하지 않는다. 그 대신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의 모습을 근미래 디스토피아 속에 절묘하게 비쳐 보이도록 만든다. 급격한 변화와 재난의 끝에 깊은 회의 속에 빠져 버린 사람들, 아무것도 믿을 수 없고 누구도 신뢰할 수 없는 세상, 거리를 휩쓰는 소년 폭도들, 끈질기게 목을 조여 오는 빈곤과 맞서 싸우며 작중 화자와 소녀 에밀리는 서로 의지하면서도 완벽하게 이해하지는 못한 채 어쩔 수 없는 배반과 화해, 성장과 양육의 체험을 함께 엮어 간다.
“도리스 레싱은 여성적 경험을 서사시로 풀어내는 시인이다. 회의하는 눈과 시적 영감, 비현실의 힘을 가지고 분열된 문명을 파고든다.”라는 스웨덴 한림원의 노벨상 선정 이유는 이 작품을 가장 잘 설명해 주는 말이다. 여신의 모습을 언뜻 비추는 환상적이고 암시적인 결말은 SF적 미래 세계라는 장치로 위장된 ‘우리의 현실’에 대한 해방의 희망마저 비추어 내며 삭막하고 참담했던 이야기의 배경만큼이나 강한 카타르시스를 선사한다. 수많은 환상의 방들을 거치면서도 온갖 외부의 침해를 그저 ‘수용하는’ 처지에 있었던 작중 화자가 진정한 변화와 치유의 힘을 발휘하리라는 믿음, 결국 인간에 대한 믿음 그 자체가 긴 여운을 남긴다.
『생존자의 회고록』은 우리말 번역으로 원고지 1,200매의 분량 속에 하나의 뚜렷한 이야기를 담고 있으며, 이미지가 강하고 간결하면서도 깊이가 있는 레싱의 문체를 잘 살려 낸 작품인 동시에 그녀의 소설 가운데 ‘가장 잘 읽히는 작품’으로도 알려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