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 이후의 세상이 온다
우리가 우리를 바꿀 때가 되었다”
전환의 시대, 나와 사회와 자연이 함께하기 위한
홍기빈의 경제학 에세이
‘우리는 먹고 자는 시간을 제외한 거의 모든 시간을 경제활동에 쏟아붓지만 왜 삶은 좀처럼 나아지지 않을까?’ ‘이렇게 경제생활에 온 힘을 쓰면 쓸수록 왜 허무와 고독과 불안은 더 커져만 갈까?’ ‘뿐만 아니라 생태 위기와 사회적 불평등은 왜 더욱 공고해져만 갈까?’ 저자가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나가는 지난한 과정을 생략하고 결론을 먼저 소개하자면, “경제생활이 우리를 허무와 고독과 불안으로 밀어 넣도록 짜여져 있다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러한 경제생활의 조직 방식 자체를 바꾸는 일”이라는 것이다.
“이 책은 학술 서적이 아니다”라는 전제가 이 책의 첫 문장이다. 그러나 책을 읽어 내려가다 보면 이 말이 큰 함정이었음을 어느 순간 깨닫는다. 책을 읽다가 멈춰 서서 감정에 휩싸이고, 자기 삶을 돌아보고, 나와 우리의 미래를 생각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경제학자의 이름과 학문적 논의를 최소화했다고 하지만 사실은 그도 적지 않다. 다만 이것들이 우리의 고민, 우리 경제생활의 문제로 살짝 감싸여 있을 뿐이다. 결국 저자가 말하는 바는 경제학이 아니라 우리가 몸으로 살아내야 할 ‘경제생활’이자 ‘경제활동’이며, 이 책은 결정되지 않은 책, 우리가 함께 써내려가야 할 책인 셈이다.
이렇게 말랑하고 통쾌한 경제학 책이라니
정치경제학자 홍기빈은 대안적 사회의 정치경제 질서를 설계하고 구축하는 데 연구와 활동을 병행해왔다. 이번 『위기 이후의 경제철학』에서 홍기빈은 우리가 지금 처해 있는 위기, 곧 생태 위기와 사회적 불평등이 빠른 속도로 악화되고 있다고 진단한다. 그리고 삶을 풍요롭게 해야 할 경제생활이 도리어 우리를 허무와 고독과 불안의 늪으로 몰아넣고 있다고 말한다. 이러한 파국을 눈 뜨고 바라보면서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기력한 존재, ‘지구상의 가장 한심한 동물’로 전락한 상황이 이 위기의 가장 큰 원인이자 결과물이라고 말하는 저자는 이제 다른 선택이 없음을 강조한다. 지금의 지구적 산업문명은 결코 ‘지속 가능한’ 틀이 아니며, 그 근간이 되는 경제생활의 틀을 바꾸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 인류의 의식을 지배하고 있는 ‘경제적 인간’이라는 세속 종교를 철폐하고, 오염되고 더럽혀진 인간의 이미지를 회복해 새로운 경제철학과 새로운 경제생활의 틀을 마련해야 한다고 촉구한다.
“이 책은 학술 서적이 아니다”라는 전제가 이 책의 첫 문장이다. 그러나 책을 읽어 내려가다 보면 이 말이 큰 함정이었음을 어느 순간 깨닫게 된다. 이론으로 무장한 딱딱한 ‘경제학’ 책이라면 지식과 정보 습득 차원에서 건조하게 읽으면 될 테지만, 이 책은 읽는 이를 감정에 휩싸이게 하고, 자기 삶을 돌아보게 하고, 나와 우리의 미래를 생각하게 만든다. 경제학자의 이름과 학문적 논의를 최소화했다고 하지만 사실은 적잖은 경제학 용어와 해석으로 가득하다. 다만 이것들이 우리의 고민, 우리 경제생활의 문제로 살짝 감싸여 있을 뿐이다. 저자가 밝혔듯이 이 책은 우리가 “살아오면서 틀림없이 느꼈을 이야기, 좌절하고 답답했지만 답이 없어서 접어두었던 이야기, 무어라 이름을 붙일 수는 없지만 이럴 수 있지 않을까라고 막연히 생각했던 이야기들”이기 때문이다. 결국 저자가 말하는 바는 경제학이 아니라 경제철학, 경제생활, 경제활동이며, 이 책은 결정되지 않은 책, 우리가 함께 써내려가야 할 책인 셈이다.
그래서 저자는 우리 생활과 밀접한 질문들을 던지며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우리는 먹고 자는 시간을 제외한 거의 모든 시간을 경제활동에 쏟아붓지만 왜 삶은 좀처럼 나아지지 않을까?’ ‘이렇게 경제생활에 온 힘을 쓰면 쓸수록 왜 허무와 고독과 불안은 더 커져만 갈까?’ ‘뿐만 아니라 생태 위기와 사회적 불평등은 왜 더욱 공고해져만 갈까?’ 이들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나가는 지난한 과정을 생략하고 저자의 결론을 먼저 소개하자면, “경제생활이 우리를 허무와 고독과 불안으로 밀어 넣도록 짜여져 있다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러한 경제생활의 조직 방식 자체를 바꾸는 일”이라는 것이다.
열과 성을 다할수록 허무와 고독과 불안만을 안겨주는 지금의 경제생활의 틀을 검토하고 바꾸는 노력, 그리고 생태 위기와 사회적 불평등으로 대표되는 지금의 지구적 산업문명의 위기를 진단하고 고쳐나가는 노력은 같은 것이 될 수밖에 없다. ‘위기 이후’의 세상을 살아가야 할 우리는 이제 다른 경제학과 다른 경제생활의 틀을 생각해야 한다. (17쪽)
위기, 위기 이후, 위기 이후의 경제학
홍기빈은 우리가 처한 수많은 위기 속에서 두 가지에 특히 주목한다. 그것은 생태 위기와 사회적 불평등이다. 이는 지난 30년간의 산업문명에서 새롭게 모습을 드러낸 현상이기에 그렇다. 생태 위기는 산업문명의 지속가능성은 물론, 인간뿐만 아니라 현존하는 생명 영역(biosphere) 전체의 안녕을 위협하고 있다. 이에 대한 많은 경고의 목소리와 해법이 제시되고 있지만 정작 가장 근본적인 질문, 즉 지금 우리 경제생활의 틀을 완전히 바꾸어야 한다는 문제는 대부분 회피하고 있다.
우리는 과연 계속 성장하고, 계속 소비할 수 있을까? 더 많은 소비와 더 많은 경제성장은 우리 마음과 의식 속에 하나의 세속 종교와 같이 절대적인 목표로 자리 잡고 있다. 그러나 저자는 이는 어디까지나 20세기 후반 이후의 불과 100년도 채 되지 않은 현상이며, 20세기 초까지만 해도 경제학의 주된 관심사는 성장이 아닌 ‘균형(equilibrium)’이었음을 강조하고 있다.
2차 산업혁명으로 ‘대량소비・대량생산’이라는 틀이 자리 잡았으며, 대공황과 제2차 세계대전을 통과하면서 경제의 지속적인 성장이 국가 목표로 떠올랐고, 이를 ‘정밀하게 계측’하는 성장 회계가 발전했다. 또 노동과 자본의 고질적인 계급 갈등에 대한 치료책도 경제성장과 소비 팽창으로 주어졌으며, 특히 20세기 끝 무렵에는 잘사는 나라와 못사는 나라 사이의 불평등에 대한 해결책으로도 경제성장이 주어졌다. (20쪽)
홍기빈은 무한의 소비 팽창이 20세기 중반을 거치면서 이제는 으뜸가는 미덕이 되었고, 이를 가능케 하는 무한의 경제성장은 절대적인 ‘공공선(common good)’이 되었다고 비판한다.
그는 지금 우리의 경제생활의 틀이 세 층위의 위기에 둘러싸여 있다고 말한다. 첫째는 자연과 인간의 관계에서 생태 위기를 낳고 있으며, 둘째는 인간과 인간의 관계에서 경제적 불평등을 낳고 있고, 셋째는 개인의 삶과 마음의 차원에서 허무와 고독과 불안을 낳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생활의 틀은 지속 가능하지 않다. 자연과의 관계를 망치고, 이웃과의 관계를 망치고, 나 자신과의 관계를 망치는 이런 삶은 결코 우리가 바라는 모습이 아니다.
저자는 결국 위기에 휩싸인 지구적 산업문명의 상태를 당연한 듯 받아들이게 만들고, 만족스럽지 못한 경제생활에 대해서도 그저 체념할 수밖에 없는 무기력한 존재로 만드는 근원이 세속 종교가 된 경제학에 있음을 지적하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을 허무와 고독과 불안으로 몰아넣는 경제생활의 틀에서 끄집어내 마음과 몸으로 움직이는 활기찬 인간을 다시 소생시키기 위해서 새로운 경제학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경제적 인간’이란 없다
홍기빈은 여기서 아주 날카로운 의문을 제기한다. ‘경제적 인간이라는 것이 정말 현실에 존재하는 인간일까?’라는 의문이다. 그리고 재차 묻는다. “한번 물어나 보자. 그런 사람을 실제로 본 적이 있나? (…) 또 나 자신은 과연 그런 사람인가? 결코 그런 사람을 본 적도 없고, 나 자신도 그런 사람과는 거리가 멀지 않은가?” 그러면서 저자는 화이트헤드(Alfred Whitehead)가 근대과학의 함정으로 지적했던 ‘잘못 놓여진 구체성의 오류’를 소환한다. 수성을 ‘질량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