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빛마저 스러진 고요한 첫날밤.
군왕君王의 입가에 잠시 스친 평연한 웃음을 보며
늘 그려 왔던 어진 지아비의 온화함을 알게 되었다.
다만, 그 수려한 용안에 드리운 아름다운 미소가
금세 잔인한 칼로 변할 수 있다는 것,
그 한 가지 사실만 미처 깨닫지 못했을 뿐이다.
술에 취해 세월을 허비하는 광인.
백성 따위 안중에도 없는 잔혹한 폭군.
비릿한 피 내음을 흘리며
사나운 야차夜叉의 형상으로 서 있는 그가
바로 오늘, 내 모든 것을 취해 갈 나의 주인이었다.
“누구도 감히 내게 명령할 수 없습니다. 아시겠습니까, 중전.”
숨 막히는 어둠 속에서 드러난 군주의 실체.
그 우악스러운 광풍 앞에
소리 없이 품고 있던 내 아둔한 믿음이
지옥의 벼랑 끝에 매달려 애처롭게 흔들렸다.
그리고 야수의 손이 작게 움츠린 어깨를 거머쥔 순간
실낱같던 희망은 소리 없이 자취를 감추고
내 안에 숨 쉬고 있던 태고의 연약함이
잔인한 폭군의 침입에 구슬피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