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보고 듣고 깨달은 것들>은 어떤 철학자보다도 급진적이고 근원적인 질문들을 끊임없이 제기해온 세계적인 석학 아감벤이 철학적 성찰에 전념하며 빠르게 흘러간 자신의 삶과 탐구 과정 전체를 되돌아보고 저울질하면서 써내려간 일종의 철학적 유언이자 시적이고 정신적인 차원의 깨달음을 선사하는 아포리즘 모음집이다. 아감벤은 자신이 깨달은 것뿐만 아니라 깨닫지 못한 것에 대해서도 이야기한다. 그의 모든 책은, 그가 어렸을 때 썼다가 잃어버린 소중한 글귀에 대한 복구 불가능한 기억을 되살리기 위해 쓰였고, 그의 철학은 자신이 알고 있었으면서도 깨닫지 못했기 때문에 쓸 수 없었던 것을 되찾아 보완하려는 시도 속에서 이루어졌다. 어쩌면 그런 이유에서 그가 깨달은 것은 ‘모든 것’이라기보다는 가장 중요한 것의 전부에 가깝다. 아감벤의 깨달음은 서재와 책 위에서만 이루어지지 않았다. 로마, 파리, 빈, 바이마르, 베네치아, 부헨발트, 아잔타, 카포다키아, 칼라 펠치, 폰차, 지노스트라에서 그가 보고 듣고 깨달은 것들의 이야기는 그의 철학에 좀 더 가까이 다가설 수 있는 기회를 선사한다. 이 수많은 곳에서 그는 무언가를 배운다. “사랑했지만 떠나야만 했던 곳들에서 배운 것이 있다. 그곳에 마음을 숨겨두면 우리는 분명히 강해지겠지만 그곳을 항상 기억해야 하기 때문에 다시 약해진다.” 그가 철학적 고고학을 고집하며 과거로 돌아가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동시대인이 되기 위해서다. 아감벤에게 ‘동시대인’은 자신이 속한 시대가 야기하는 암울함의 폭풍을 그대로 맞받아칠 줄 아는 자를 의미한다. 바로 여기서 철학자 아감벤의 도전을 읽을 수 있다. 아감벤이 이 책에서 브루노 레오네, 카프카, 아베로에스, 에리우게나, 플라톤, 에피쿠로스, 루크레티우스, 바흐오펜, 보나르, 바슐라르, 바흐만 같은 인물들을 인용하는 이유는 이들에게서도 무언가를 배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감벤은 이렇게도 말한다. ‘우리가 진리를 생각할 때 수많은 의견의 다양성이 사라지며, 이때 사고의 주체는 더 이상 ‘나’가 아니다.’
-이탈리아 출판사 에이나우디 소개글-
이 책은 아감벤이 지금까지 펴낸 어떤 저서와도 닮지 않았다. 마치 마지막 말을 남기려는 듯, 혹은 유언장을 서둘러 준비하다가 결국에는 유언을 남길 사람이 없다는 걸 깨닫고 써내려간 듯한 느낌을 준다. 그의 삶은 번개처럼 흘러갔다. 그의 광선과도 같은 삶은 그래서 보여줄 것이 많지 않았다. 그렇다면 그 짧은 시간에 그의 선생들, 친구들, 만남들, 그가 머물었던 곳이 그에게 남겨준 것은 무엇인가? 그 찰나와도 같은 생의 순간에 그가 꿰뚫어보았던 것은 무엇인가? 그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노아가 방주 바깥으로 날려 보낸 비둘기와도 같다. 지상에 어떤 생명체가 살아 있는지, 하다못해 입으로 물어올 수 있는 올리브 나뭇가지 하나라도 남아 있는지 살피는 것이 우리의 임무였는데 우리는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다. 그런데도 우리는 방주로 돌아가기를 원치 않았다.”
서평
<내가 보고 느끼고 깨달은 것들>은 마치 작가가 자신의 작품을 다시 읽듯 아감벤이 자신의 삶을 읽으면서 쓴 책이다. 어떤 책이 마음에 와 닿을 때, 마음을 어루만질 때 벌어지는 일은 무엇인가? 빛이 책을 만지고, 빛을 매개로 눈이 책을 만진다. 바로 이 책을 매개로, 하지만 더 이상 물리적이지 않고 형이상학적인 무언가를 매개로 저자와 독자의 접촉이 이루어진다. 아감벤이 찾으려 했던 것도 이러한 공백, 예를 들어 “분규와 조소, 전시와 심연, 어둠과 광채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접촉의 틈새이자 공백”이었다. 이 책이 마음을 건드리는 이유는 그의 삶과 그가 자신의 삶 자체를 읽는 일, 그가 쓴 것과 쓴 적이 없는 것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극단적인 접촉에 대해 말하기 때문이다. 저자는 자신의 저서를 결코 해독하지 못한다. 그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글을 계속 쓰는 것뿐이다. 작가에게 그의 작품이 하는 말은 ‘나를 만지지 마라’다. 그래서 자신의 삶을 읽는 작가는 더 이상 쓰지 못한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영원히 쓰이지 않은 상태로 남아 있는 무언가를 읽는 것뿐이다. 결국 아감벤이 자신의 삶을 다시 읽으며 쓴 글에서도 우리가 읽을 수 있는 것은 오로지 글과 삶 자체의 극단적인 접촉이 이루어지는 한계 지점 혹은 신비뿐이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두 움직임이 만나는 곳에는 ― 모든 표상이 사라지는 순간 ― 환희와 광채가 있을 뿐이다.” 글로 무언가를 건드린다는 것은 언제나 한계와 접촉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접촉은 물리적인 것과 형이상학적인 것, 만지는 것과 만져지는 것 간의 한계 지점에서 일어난다. 그래서 독자의 마음을 만지는 책은 언어의 한계를 묘사한다. 책을 손에 쥐고 읽는 우리를 다시 거머쥐는 이 책에서, 언어는 삶 자체 외에 아무 것도 의미하지 않는다. 말과 말 사이에서 우리가 만지는 것은 다름 아닌 삶이다. 삶은 저자와 독자가 보고, 듣고, 깨달은 것과 한 번도 보고, 듣고 깨달은 적인 없는 것 사이에 남는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철학이 내게 가르쳐준 것은 무엇인가? 인간으로 존재하는 것은 우리가 아직 인간이 아니었던 순간들을 떠올리는 것과 같다. 인간의 과제는 유아기, 동물적인 것, 신성한 것을―아직은 인간적이지 않았던 순간과 더 이상 인간적이지 않은 순간들을 기억하는 데 있다.” (카르타 스포르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