出版社による書籍紹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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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고학, 역사학, 인류학, 경제학, 정치학, 사회학, 정신분석학, 문학, 생물학과 의학까지… 수많은 학문 분야를 넘나들며 현대 소비사회에서 ‘인간답게!’ 살기 위한 길을 찾는다 “기노쿠니야 올해의 人文大賞 수상” 우리는 누군가에게 파티 초대를 받았다. 그렇다고 꼭 가야 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하루 종일 일에 매달려 있었고 마침 저녁 시간도 비어 있었기에 가기로 했다. 격식을 차린 음식이 차려져 있었고 식탁에선 대화가 이어졌다. 음식은 입에 잘 맞았고 다른 모든 조건도 마음에 들었다. 식사가 끝나면 흔히 그랬듯 둘러앉아 음악을 듣고 농담도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재미있고 유쾌했다. 슬슬 집에 돌아갈 시간이다. 부인들은 정말 즐거웠고 멋진 파티였다고 몇 번이나 확인하듯 말한다. 그저 인사치레가 아니라 배웅하러 문 밖에 나온 자리에서까지 정말 기분 좋은 시간이었다고 되풀이한다. 말 그대로 파티는 매우 훌륭했다. 오늘 밤 파티에서 지루했던 상황이라곤 아무것도 없었다. 대화도, 사람들도, 장소도, 어느 것 하나 지루하지 않았다. 그래서 흐뭇해진 기분으로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 들어와 저녁에 끝내지 못한 일을 얼른 살펴보고 내일 아침엔 무슨 일을 처리해야 할지 확인해본다. 그러다가 문득 깨닫는다. “나, 실은 오늘 밤 파티에서 무척 지루했어”라고. -《인간은 언제부터 지루해했을까?》, 고쿠분 고이치로, 198p -《형이상학의 근본 개념들》, 하이데거, 182~183p 인간은 풍요로워지기 위해 애써왔다. 그 결과, 우리는 풍요로워졌다. 그러나 과연 우리는 행복할까? 정말로 여유로운 일상을 보내고 있는가? 이 문제를 두고 많은 철학자들이 고심했는데, 이 책에서 저자는 파스칼, 러셀, 니체, 칸트, 하이데거, 마르크스, 아렌트, 아도르노, 들뢰즈 등의 철학적 논리를 차근차근 파헤치며 이러한 질문에 대답한다. 풍요한 사회에서 왜 지루해할까? 자본주의가 전면적으로 전개되면서, 사람들은 여유로워졌고 한가함을 얻었다. 그러나 한가함을 얻은 사람들은 이를 어떻게 사용하면 좋을지 알지 못한다. 무엇이 즐거운 것인지 모른다. 자신이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다. 자본주의는 이 틈을 파고든다. 문화산업은 이미 만들어진 즐거움, 산업에 유리한 즐거움을 사람들에게 제공한다. 이전 시대에는 노동자의 노동력이 착취되었지만, 이제는 오히려 노동자의 한가함이 착취되고 있다. 한가함의 착취는 자본주의를 이끌어가는 거대한 힘이다. 왜 한가함은 착취되는 것일까? 인간이 지루한 것을 싫어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한가함을 얻었지만, 한가함을 어떻게 사용하면 좋을지 모른다. 그 상태로 한가함 속에서 지루해지고 만다. 그러므로 제공된 즐거움, 준비되고 마련된 쾌락에 몸을 맡기고 안도감을 얻는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좋을까? 왜 인간은 한가함 속에서 지루해하는 것일까? 현대 소비사회가 인간의 소외를 불러오는 것이 인간의 근원적 고통인 ‘지루함’이라고 저자는 주장한다. 그래서 이 책에서 인류학, 고고학, 경제학, 소비사회론, 동물행동학을 비롯하여, ‘지루함의 최고봉’으로 꼽고 있는 하이데거와 수십 명의 철학자들의 사유를 좇아가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답을 찾는다. 왜 우리는 행복하지 않은가? 끊임없이 지루함을 느끼는 것이 인간의 원죄는 아닐까? 인간은 유목생활에서 정착생활로 넘어오면서 시간적, 경제적 여유를 얻었을 뿐만 아니라, 인간의 능력을 총동원하여 사용할 일이 없기 때문에 능력까지 남아돌게 되었다. 그래서 인간은 그 여유분을 이용하여 문명을 세우고, 예술을 발전시켰다. 그러나 정착생활로 식량을 저장할 필요가 있었고, 이로 인해 사유재산이라는 개념이 생겨났다. 사유재산은 사람들 사이의 격차를 만들어냈고 이는 곧 계급의 성립으로 이어졌다. 이때 유한계급은 곧 일을 하지 않아도 되게끔 허락받은 사람이었다. 하층계급은 먹고사는 일만으로도 벅찼고 한가하거나 지루해할 틈이 없었다. 그러므로 해야 할 일이 없다는 것이야말로 힘의 상징이었다. 그렇기에 유한계급은 한가로움을 과시하고 싶어 했다. 그래서 이를 대신해서 과시해줄 고용인을 두었다. 그들은 한가함을 과시하고 우아하게 지루함을 견뎌내는 방법을 알았다. 19세기를 지나면서 유한계급이 몰락하고 계급 격차가 줄어들었다. 이때부터는 한눈에 보이는 신분의 상징이 중시되었다. 그래서 우리는 끊임없이 소비하지만 제대로 된 사치는 부리지 못한다. 그리고 유한계급처럼 지루함을 견뎌내는 방법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한가하지만 지루해한다. 노동하고 남는 여유 시간은 휴가라는 이름의 노동이 되었다. 지루함에서 벗어나기 위해 기분을 전환할 만한 일을 찾지만, 그 일에도 지루함은 숨어 있다. 이렇게 지루함은 인간에게 근원적인 문제가 되어버렸다. 저자는 벗어날 수 없는, 근원적이라 할 만한 지루함이 원죄와 마찬가지로 신에게서 주어진 것은 아닌가 하고 탄식한다. 어쩌면 인간은 지루함에서 절대 벗어날 수 없을지도 모른다. 소비는 소외를 불러온다 현대사회의 소외, 과연 자본만이 문제일까? 저자는 영화 〈파이트클럽〉을 예로 들어 지루함과 소외의 문제를 논한다. 일회용으로 가득 찬 생활환경에서 현실 감각을 잃어버린 주인공은 브랜드 가구를 사들이는 것이 유일한 취미다. 그는 불면증에 시달리며, 다른 사람의 비극을 통해서나 위안받는다. 그러다가 우연히 만난 타일러와 파이트클럽을 만들면서 살아가는 감각을 느낀다. 타일러는 소비사회가 사람들을 억압하고 소외된 존재로 만든다고 한탄하고, 반사회적인 행동을 일삼는다. 주인공이 보기에 타일러는 매력적인 인물이지만, 정작 타일러 역시 소비사회에 의해 이용당하는 존재다. 소비사회의 거울 이미지로서 소비사회가 만들어낸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이렇듯, 소비사회의 소외는 이전의 노동자 소외와는 달리 누군가에 의해 학대당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가 스스로를 소외시키는 형태로 작동한다. 그래서 소비자는 스스로를 막다른 곳으로 몰고 가고, 스스로를 좀먹는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러한 소비사회의 만행을 어떻게 멈출 것인가? 마르크스의 말에서 해답을 찾을 수 있다. 그는 소외된 노동에 대해 논하며, “궁핍과 외적 유용성에 의해 결정된 노동을 멈추고 자유의 왕국이 실현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자유의 왕국은 노동 자체의 폐기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일의 단축’에서 온다면서, 마르크스는 한가함에 대해서도 생각했다. 그가 생각하기에, “아침에는 사냥을, 낮에는 낚시를, 저녁에는 소를 몰고, 저녁 식사 후에는 평론을 하면서, 그러면서도 결코 사냥꾼, 어부, 목동, 비평가가 되지 않는” 것이 한가함을 즐기는 기술이다. 마르크스는 누구든 한가로운 생활을 향유하는 ‘왕국’, 즉 ‘한가함의 왕국’이야말로 ‘자유의 왕국’이라 생각했다.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처음에 제시했던 파티 장면으로 돌아가보자. 왠지 일어날 법한 상황이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불가사의한 상황이기도 하다. 아무리 찾아보려 해도 지루한 구석은 없었다. 그런데도 분명 지루해하고 있다. 하이데거는 지루함을 일단 2가지 형식으로 나누고 각각 일상적인 예를 통해 설명한다. 파티의 예는 하이데거가 분류한 제2형식의 지루함이다. 간단히 정리하자면 ‘어떤 것에 의해 지루해지’는 수동적인 지루함이 제1형식의 지루함인데, 기차역에서 4시간 후에 오는 다음 기차를 하릴없이 기다리는 사람이 그 예라 할 것이다. 그리고 제2형식은 파티의 예처럼 ‘어떤 상황에 처하여 그 곁에서 지루해’지는 것이다. 이른바 지루함이 주위를 뒤덮어버리는 듯한 느낌이 드는 것이다. 저자는 ‘지루함의 최고봉’이라 여겼던 하이데거의 철학을 하나하나 비판적으로 분석해나간다. 그리하여 인간에게 주어진 숙명 같은 ‘지루함’의 고통에서 벗어나는 길을 모색한다. 이 책에 ‘윤리학’이라는 이름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