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구리4.0영화의 시작은 이렇다. ‘내언니전지현’이라는 닉네임을 사용하는 박윤진 감독은 넥슨의 클래식 RPG 게임 [일랜시아]를 10여년 동안 하고 있다. 1999년 서비스를 시작한 [일랜시아]는 이제 운영진마저 떠나버린 망겜이 되었다. 박윤진 감독은 자신처럼 오랜 시간 [일랜시아]를 플레이하는 길드원과 유저들에게, 운영진도 없고 각종 매크로와 버그가 판치는, 영화 한 편의 파일보다 용량이 작은 이 게임을 왜 하는지 묻기 시작한다. 이는 감독이 자신 스스로에게 던지는 질문이기도 하다. 인디다큐페스티발을 시작으로 여러 영화제들에서 공개된 <내언니전지현과 나>는 이러한 영화의 출발점을 확실하게 담고 있었다. 우리는 왜 아직도 [일랜시아]를 붙잡고 있는가? 현실이 너무 힘들어서? 가상공간에서 모종의 유토피아를 발견했기 때문에? 게임 안에서는 무엇이든 할 수 있고 될 수 있어서? 박윤진 감독이 인터뷰한 유저들의 대답은 이를 반쯤 반박하고 반쯤 긍정한다. [일랜시아]가 만들어낸 공간은 현실의 도피처임과 동시에 또 다른 현실이고, 아름다운 유토피아의 단면을 만난 것만 같지만 되려 그런 것은 없음을 어느 순간 드러내고, 누구나 무엇이든 할 수 있지만 그러기 위해선 유저들이 만들어낸 비공식적 루트를 철저하게 따라가야 하는, 그런 모순의 공간이다. 러닝타임 71분의 영화제 버전보다 15분가량의 분량이 추가된 개봉 버전은 약간 다른 길을 간다. 전자가 위의 질문을 충실하게 따라간다면, [일랜시아]를 ‘망겜’이라 못박는 게임 유튜버들의 영상으로 시작한 개봉 버전은 영화의 홍보 카피처럼 “16년차 고인물, 망겜을 구하기 위해 카메라를 들다”라는 내러티브에 조금 더 무게가 실려 있다. 그렇다고 영화 자체가 망가졌고 실망스럽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영화의 강조점이 조금 바뀌었다. 영화제 버전의 경우 [일랜시아]라는 게임 속에서 사람들이 새롭게 만들어낸 규칙, 즉 매크로를 통해 [일랜시아]의 규칙을 어기는 것을 새로운 규칙으로 삼는 상황에 집중한다. 영화제 버전 후반부에 등장하는 ‘팅버그’ 사건은 게임의 규칙을 과하게 어긴 누군가의 등장 때문에 벌어진 것이며, 넥슨의 개입으로 일단락된 사건은 [일랜시아]에 남은 이들의 규칙이 모두가 공평하게 적당히 [일랜시아]의 규칙을 어긴다는 것임을 확실히 알려준다. 그리고 이러한 규칙을 공유하는 이들, 더 이상 매크로 없이는 플레이할 수 없는 게임을 붙잡고 그 시간을 함께 견뎌내는 이들은 그 안에서 독특한 자생적 커뮤니티를 구성하고 있다. 이들은 힘을 합쳐 규칙을 세우고 무엇인가를 해내기 위해 모인, 전통적인 의미의 공동체가 아니다. 이들의 유대감은 매크로가 돌아가는 시간에 대한 감각을 공유하고, 정작 매크로를 돌리지 않는 시간에는 어딘가 무의미한 시간(가령 채팅으로 노래를 부른다던가, 게임 내 절벽에서 자살한다던가)을 함께 보냄으로써 발생한다. 이는 온라인 게임, 특히 MMORPG라는 장르가 제공할 것이라 기대되는 유토피아적 공동체와는 전혀 다른 것이다. 즉, 이들은 소위 ‘현실’이라는 곳과 [일랜시아]라는 가상공간 사이를 오가며 일종의 ‘죽은 시간’을 공유하고, 그럼으로써 발생된 유대감을 유지하기 위해 [일랜시아]에 접속한다. 내언니전지현의 길드원들이 엠티를 떠나 촬영한 사진과 게임 내에서 모여 찍은 사진이 오버랩되는 장면은, 이들이 어느 한 쪽의 세계에 종속된 존재가 아니라 두 세계 사이에서 진동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개봉 버전에는 이러한 공동체에 대한 언급보단 ‘디지털 노스텔지어’라 부를 수 있는 것에 더욱 집중한다. 새로 추가된 것은 영화제에서의 상영과정 및 넥슨에서 주최한 유저간담회, 그리고 [일랜시아]의 개발자 ‘아레수’와의 만남이다. 한국 게임산업의 초기부터 활동하던 개발자인 그는 [바람의 나라]를 플레이하며 만난 이들과 짧은 유대감을 나눈 일화를 공개한다. 그러고보니 <내언니전지현과 나>를 관람한 이들의 감상평은 대부분 추억과 연결되어 있다. 소위 ‘밀레니얼 세대’라 불리는 90년대 생들에게 [일랜시아]나 [바람의 나라]를 비롯한 여러 온라인 게임은 추억의 공간이다. 길드원들이 엠티를 위해 찾은 팬션의 직원이 “[일랜시아]가 아직도 있어요?”라고 말하며 반갑고 신기하다는 듯이 게임 내 몇몇 요소를 길드원들과 공유하는 모습이 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메이플스토리]와 같은 게임이 여전히 인기를 유지하고 있지만, 게임의 과거 모습을 그리워하는 이들이 존재하는 것도 사실이다. 그런 지점에서 [일랜시아]는 게임을 플레이했었던 이들에게 존재를 잊고 있었던 싸이월드 미니홈피를 오랜만에 방문한 것만 같은 느낌을 제공한다. 이런 노스텔지어는 최근 몇 년간 공개된 여러 영화들에서도 드러난다. 자신의 이야기를 기술하기 위해 홈비디오 등을 꺼내오는 방식이 대표적이다. <버블 패밀리>, <94’ 비디오앨범>, <ㅅㄹ, ㅅㄹ, ㅅㅇ>, 혹은 어떤 기록물을 발견함으로써 자신의 과거를 톺아보는 <8mm>와 같은 작품들. 다만 이러한 영화들은 비디오 테이프와 같은 특정한 기록의 형태를 지니고 있다. 반면 <내언니전지현과 나>와 같은 사례가 보여주는 것은 [일랜시아]라는 특정한 기표가 가져오는 노스텔지어의 연상작용이다. 이 영화와 관련된 인터뷰 영상이나 예고편 등을 유튜브에서 찾아보면, 대부분의 댓글은 각자의 추억을 늘어 놓고 있다. <내언니전지현과 나>의 개봉 버전은 이 부분에 보다 집중한다. 동세대 관객들에겐 자신의 추억을 꺼내어 보길 요청하고, 위 세대 관객들에겐 우리에게 이러한 추억이 존재하며 그것을 간직하고 싶다고 말한다. 때문에 새로 추가된 영화의 후반부는 우리의 노스텔지어를 앗아가지 말아 달라는 부탁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물론 이를 부정적으로 보자 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게임 내에서 커뮤니티를 구성하는 것, 그리고 그것을 모종의 유토피아로 여길 수 있는 여지를 많이 주고 있다는 점에서 아쉽게 느껴진다. 영화제 버전에서 내언니전지현의 동료 유저 ‘하루히로’가 아이템 사기를 당하고 게임을 떠나기 전 작별인사를 하는 장면이나, 공무원시험 준비를 위해 로그아웃하는 레렐의 모습을 떠올려보자. 이곳이 유토피아일 수 없음을 두 장면은 단적으로 드러낸다. 이 두 장면은 개봉 버전에서도 그대로 등장하지만, [일랜시아]라는 망겜에 사람들이 왜 남아있는지에 집중하기보단, 그러한 망겜이 지닌 추억과 그것을 보존하기 위한 여정으로 영화가 기능하기에 두 사람의 사라짐은 그저 게임을 떠난 누군가의 등장 정도로만 일축된다. 개봉 버전이 지닌 나름의 장점, 가령 [일랜시아]를 비롯한 온라인 MMORPG 게임에 무지한 사람이 보기에도 부담이 없고 친절해졌으며 확실한 내러티브를 지녔다는 점이 있지만, 영화 이후의 수많은 고민을 던져준다는 매력이 다소 사라졌다는 점에서 아쉽다. 그럼에도 <내언니전지현과 나>는 올해 공개된 여러 한국영화 중에서 중요한 위치에 놓일 것이다. 이는 단순히 국내 최초로 게이머가 연출 및 제작한 다큐멘터리가 극장에 개봉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레디 플레이어 원>과 같은 세계는 다른 방식으로 도래했고, <내언니전지현과 나>는 그것을 흥미롭게 짚어보는 영화 중 하나다. [일랜시아]는 도피처가 아니라 새로운 방식의 사회실험이 진행되는 공간이며, 인터넷이 민주주의적 유토피아가 될 것이라 예언했던 이들이 말이 틀렸음을 다시 한번 증명하는 것이며, 그럼에도 새로운 형태의 공동체가 등장하는 곳이며, 현실과 가상공간을 평생 오가며 살아야 할 첫 세대의 경험담이다. 그것만으로 <내언니전지현과 나>는 새로운 화두를 던진다.いいね53コメント2
연엠3.0"개재미없네." 라고, 올 여름에 론칭한 바람의나라:연(바연)을 플레이하는 나를 본 친구가 자기도 다운을 받고 몇 분쯤 하더니 말했다. "이걸 왜 해?"라는 말을 몇 번이나 반복하며 이 개노잼겜에 대체 왜 나를 포함해 많은 사람들이 열광하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짓던 친구는 튜토리얼도 끝내지 않고 게임을 지웠다. 12지신의유적에서 열심히 사냥을 하고 있던 나는 혀를 쯧쯧 차며 "개노잼 메이플이나 하는 니가 뭘 알겠냐"라고 빈정댔는데, 친구는 pc메이플은 물론이고 모바일 메이플까지 다운받아 온갖 직업을 섭렵하고 현질까지 한 진성 메이플빠였다. 나의 의문은, 바람이나 메이플이나 도트 그래픽으로 구현된 조그만 캐릭터를 가지고 줄창 사냥하고 레벨업을 하고 새 스킬을 익히고 전직을 한다는 점에서 하등 다를 바 없는데 왜 이놈은 메이플에는 그렇게 열정적이면서 유독 바람에만 평가가 이렇게 박할까 하는 것이었고, 그 의문은 5초만에 해결된 바 바람의나라가 한창 흥하던 2000년대 초반에 친구는 한국에 없어서 바람을 하지 않았고 메이플스토리가 한창 흥하던 2000년대 중후반엔 한국에 있어서 메이플을 열심히 했기 때문이었다. 기껏해야 도트 그래픽으로 구현된 조그만 캐릭터를 가지고 줄창 사냥하고 레벨업을 하고 새 스킬을 익히고 전직을 하는 게 전부인 게임을 하는 이유가 재밌어서가 아니라는 뻔한 사실은 나와 친구의 사례에서도 이렇게 쉽게 증명된다. 호동서버에서 어렵게 구한 백현모를 들고 흑해골굴과 도깨비굴을 전전하던 내 옛날의 '도적이된오공'(당시 드래곤볼에 빠져서 지은 닉넴으로 실제 직업도 도적이었다. 내가 만든 두 번째 캐릭터로, 첫 캐릭터는 내 진짜 이름에 '주술사'를 붙인, 요컨대 '김철수주술사'였다)은 친구들 사이에선 최고 실력캐였고 pc방에선 선망의 대상으로서 내 뒤에 초딩 선후배 3~5명은 기본으로 서서 사냥 장면을 보고 감탄했으며 국내성3성 왕궁에 함께 사는 가족(아빠는 도사, 엄마는 주술사, 형은 전사였다)이 있었고 주술사 애인도 있었으며(!) 새벽 2~3시경 한고개두고개세고개네고개나 부여대미궁을 쏘다니던 어른들(대학생이었던 걸로 기억한다)과 어울리기 위해 새벽에 엄마 몰래 일어나 컴퓨터를 하다 삼일도 안되고 걸려서 컴퓨터 1주일 금지를 당하고도 정신을 못차리고는 바로 다음날 새벽부턴 엄마가 컴퓨터 불빛을 못보도록 이불을 뒤집어 쓴 채 미궁을 탐험했고 며칠 뒤 새벽엔 토끼왕굴에서 사냥하다 갑자기 이불이 홱 걷어내어지길래 소스라치게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가 분노가 어린 엄마 얼굴을 마주하게 되기도 했었고(이때의 충격은 대단해서 그때 내가 토끼왕굴에 있었다는 것마저 기억하고 있다)(후일 확인해보니 엄마는 그때 화가 났다기보단 정말 어이가 없었다고 했다) 머지않아 전화비가 너무 많이 나오는 걸 괴이하게 여긴 엄마는 내가 몰래 정액제 결제를 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초딩주제에 백현모를 들고 흑해골굴에 갈 수 있었던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난 뒤지게 혼나고 울면서 엄마에게 캐릭명과 비밀번호(영어 타자로 '짱나라')를 고해 바치며 캐릭터를 떠나보내야 했고 바람의 시절은 그렇게 끝났다. 그러니까 바람의 나라란 도트 그래픽으로 구현된 조그만 캐릭터를 가지고 줄창 사냥하고 레벨업을 하고 새 스킬을 익히며 백현모를 들고 흑해골굴에서 사냥하는 게임이 아니라 친구와 선후배와 가족과 애인과 어른들과 같이 놀던 장소였었고. "임마 내 인생이 바람이야!"라는 시청자 한정 여포 바통령의 외침에 나를 포함한 우중이 즐거워한 건 그런 이유 때문이고. 시간이 흘러 바연을 하는 나는 빛바랜 사진을 보는 기분으로 익숙하고 정겨우며 추억을 솔솔 불러일으키는 국내성과 사냥터의 그래픽 사이사이를 유랑하고 있었고(토끼왕굴에 진입했을 때 느껴졌던 카타르시스란!) 그런 의미에서 그 모든 추억을 짓밟아버린 바연은 정말이지 의미 그대로 좋망겜(좋아하지만 망한 게임)이었다. 친구는 정확히 같은 마음으로 개미굴이나 자쿰을 대했겠지. 누갓겜! 그래서 우리 중 그 누구도 일랜시아를 망겜이라고 불러선 안 되는 것이다. 일랜시아 20주년 자축 파티 때 어느 유저가 말했듯, 답답한 8~90년대생에게 돌아갈 곳이 있다는 건 행복한 일이다. --- 사람들은 '내일 죽는다면 오늘 뭘 할까'라는 질문을 할 만큼 오늘과 내일, 현재와 미래의 끈끈한 관계 속에서 지금을 살아간다. 오늘의 행복이 지속가능한지 아닌지도 알 수 없는 막막함 속에서 행복을 온전히 만끽할 수 있을까. 미래가 몰살된 삶은 가능하지 않거나, 얇은 한 가닥의 실처럼 아슬아슬하다. 행복하든 불행하든 즐겁든 슬프든, 내일은 어떨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가 오늘의 지반을 단단하게 만든다. 뻔한 미래조차 사람에겐 필요하다. 내일은 행복할 거야, 불행할 거야, 즐거울 거야, 슬플 거야, 어쨌든 내일은 어떨 거야,라는 담보가 필요하다. 그게 있어야 오늘의 할 일을 정하고 오늘을 산다. 그게 없으면 다른 무엇이라도 붙잡아야 한다. 그 무엇은 대체로 과거에 있다. "일랜시아 왜 하세요?" 아직도 일랜시아를 하는 사람들은 끊임없이 오프라인의 현실을 소환했다. 쳇바퀴돌듯 소화해야 했던 학창시절의 학원 릴레이, 줄줄이 낙방했던 공모전과 대외활동, 칼같은 입사시험, 잘 먹고 잘 살아야 한다는 압박, 앞으로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다는 막막함과 무력감, 깜깜한 미래. 사람들을 낡은 온라인 세계로 잡아끄는 건 그런 것들이었다. 감독이 밑도 끝도 없이 던지고 다녔던 "일랜시아 왜 하세요?"라는 질문 속엔, "우리 미래에도 행복할 수 있을까요?"라는 잔인한 자조가 숨어있다. 그 자조는 너무 잔인해서, 내언니전지현으로 하여금 지금의 작은 행복을 괄시하는 게임사에 기어코 찾아가게 만들었던 건지도. 내언니전지현과 함께 일랜시아를 즐기던 한 친구는 일랜시아를 하며 즐거웠던 때를 추억하다가, 앞으로 그때처럼 즐거울 수 있을까, 지나가듯 말했다. 모르겠다. 어쩌면 지금 우리에게 응답하는 건 박제된 과거뿐이다. TV 속에서 늘 보던 예능인과 정치인의 늙어가는 얼굴만 마주하는 건, 어차피 함께 어린 동년배들끼리 고작 몇 년이 흘렀을 뿐인데 장난스레 서로 '그땐 그랬지'를 말하는 늙은이 취급을 하는 건, 바람의나라와 메이플스토리와 일랜시아에 아직도 열광하는 건, 다 그래서인지도 모르겠다. --- UCC 감성 나는 편집이 오히려 좋았고 오디오가 날것이라 귀가 좀 아팠고 가방에서 귀마개를 찾으려고 부스럭대니까 앞쪽에 계신 분이 시끄럽다는 눈으로 쳐다보시길래 금세 그만두고 손가락으로 귀를 막고 봤다. --- 좋망겜 바연은 얼마 안가서 지웠다. 바람 구 유저는 돌아갈 곳이 없어 행복하지 않다.いいね47コメント6
이동진 평론가
3.0
한국사회에 대한 알레고리로서나 변화를 일궈낸 우정의 이야기로서 모두 인상적.
거리에서
3.5
모든 사회현상의 통로이자, 나로써 지낼수 있었던 공간.
왓챠보안관^^7
3.5
90년대생은 왜 게임에 머물 수 밖에 없는지 이 영화에 다 담겨있는 것 같다. 이 무력감, 향수 , 연대감
동구리
4.0
영화의 시작은 이렇다. ‘내언니전지현’이라는 닉네임을 사용하는 박윤진 감독은 넥슨의 클래식 RPG 게임 [일랜시아]를 10여년 동안 하고 있다. 1999년 서비스를 시작한 [일랜시아]는 이제 운영진마저 떠나버린 망겜이 되었다. 박윤진 감독은 자신처럼 오랜 시간 [일랜시아]를 플레이하는 길드원과 유저들에게, 운영진도 없고 각종 매크로와 버그가 판치는, 영화 한 편의 파일보다 용량이 작은 이 게임을 왜 하는지 묻기 시작한다. 이는 감독이 자신 스스로에게 던지는 질문이기도 하다. 인디다큐페스티발을 시작으로 여러 영화제들에서 공개된 <내언니전지현과 나>는 이러한 영화의 출발점을 확실하게 담고 있었다. 우리는 왜 아직도 [일랜시아]를 붙잡고 있는가? 현실이 너무 힘들어서? 가상공간에서 모종의 유토피아를 발견했기 때문에? 게임 안에서는 무엇이든 할 수 있고 될 수 있어서? 박윤진 감독이 인터뷰한 유저들의 대답은 이를 반쯤 반박하고 반쯤 긍정한다. [일랜시아]가 만들어낸 공간은 현실의 도피처임과 동시에 또 다른 현실이고, 아름다운 유토피아의 단면을 만난 것만 같지만 되려 그런 것은 없음을 어느 순간 드러내고, 누구나 무엇이든 할 수 있지만 그러기 위해선 유저들이 만들어낸 비공식적 루트를 철저하게 따라가야 하는, 그런 모순의 공간이다. 러닝타임 71분의 영화제 버전보다 15분가량의 분량이 추가된 개봉 버전은 약간 다른 길을 간다. 전자가 위의 질문을 충실하게 따라간다면, [일랜시아]를 ‘망겜’이라 못박는 게임 유튜버들의 영상으로 시작한 개봉 버전은 영화의 홍보 카피처럼 “16년차 고인물, 망겜을 구하기 위해 카메라를 들다”라는 내러티브에 조금 더 무게가 실려 있다. 그렇다고 영화 자체가 망가졌고 실망스럽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영화의 강조점이 조금 바뀌었다. 영화제 버전의 경우 [일랜시아]라는 게임 속에서 사람들이 새롭게 만들어낸 규칙, 즉 매크로를 통해 [일랜시아]의 규칙을 어기는 것을 새로운 규칙으로 삼는 상황에 집중한다. 영화제 버전 후반부에 등장하는 ‘팅버그’ 사건은 게임의 규칙을 과하게 어긴 누군가의 등장 때문에 벌어진 것이며, 넥슨의 개입으로 일단락된 사건은 [일랜시아]에 남은 이들의 규칙이 모두가 공평하게 적당히 [일랜시아]의 규칙을 어긴다는 것임을 확실히 알려준다. 그리고 이러한 규칙을 공유하는 이들, 더 이상 매크로 없이는 플레이할 수 없는 게임을 붙잡고 그 시간을 함께 견뎌내는 이들은 그 안에서 독특한 자생적 커뮤니티를 구성하고 있다. 이들은 힘을 합쳐 규칙을 세우고 무엇인가를 해내기 위해 모인, 전통적인 의미의 공동체가 아니다. 이들의 유대감은 매크로가 돌아가는 시간에 대한 감각을 공유하고, 정작 매크로를 돌리지 않는 시간에는 어딘가 무의미한 시간(가령 채팅으로 노래를 부른다던가, 게임 내 절벽에서 자살한다던가)을 함께 보냄으로써 발생한다. 이는 온라인 게임, 특히 MMORPG라는 장르가 제공할 것이라 기대되는 유토피아적 공동체와는 전혀 다른 것이다. 즉, 이들은 소위 ‘현실’이라는 곳과 [일랜시아]라는 가상공간 사이를 오가며 일종의 ‘죽은 시간’을 공유하고, 그럼으로써 발생된 유대감을 유지하기 위해 [일랜시아]에 접속한다. 내언니전지현의 길드원들이 엠티를 떠나 촬영한 사진과 게임 내에서 모여 찍은 사진이 오버랩되는 장면은, 이들이 어느 한 쪽의 세계에 종속된 존재가 아니라 두 세계 사이에서 진동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개봉 버전에는 이러한 공동체에 대한 언급보단 ‘디지털 노스텔지어’라 부를 수 있는 것에 더욱 집중한다. 새로 추가된 것은 영화제에서의 상영과정 및 넥슨에서 주최한 유저간담회, 그리고 [일랜시아]의 개발자 ‘아레수’와의 만남이다. 한국 게임산업의 초기부터 활동하던 개발자인 그는 [바람의 나라]를 플레이하며 만난 이들과 짧은 유대감을 나눈 일화를 공개한다. 그러고보니 <내언니전지현과 나>를 관람한 이들의 감상평은 대부분 추억과 연결되어 있다. 소위 ‘밀레니얼 세대’라 불리는 90년대 생들에게 [일랜시아]나 [바람의 나라]를 비롯한 여러 온라인 게임은 추억의 공간이다. 길드원들이 엠티를 위해 찾은 팬션의 직원이 “[일랜시아]가 아직도 있어요?”라고 말하며 반갑고 신기하다는 듯이 게임 내 몇몇 요소를 길드원들과 공유하는 모습이 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메이플스토리]와 같은 게임이 여전히 인기를 유지하고 있지만, 게임의 과거 모습을 그리워하는 이들이 존재하는 것도 사실이다. 그런 지점에서 [일랜시아]는 게임을 플레이했었던 이들에게 존재를 잊고 있었던 싸이월드 미니홈피를 오랜만에 방문한 것만 같은 느낌을 제공한다. 이런 노스텔지어는 최근 몇 년간 공개된 여러 영화들에서도 드러난다. 자신의 이야기를 기술하기 위해 홈비디오 등을 꺼내오는 방식이 대표적이다. <버블 패밀리>, <94’ 비디오앨범>, <ㅅㄹ, ㅅㄹ, ㅅㅇ>, 혹은 어떤 기록물을 발견함으로써 자신의 과거를 톺아보는 <8mm>와 같은 작품들. 다만 이러한 영화들은 비디오 테이프와 같은 특정한 기록의 형태를 지니고 있다. 반면 <내언니전지현과 나>와 같은 사례가 보여주는 것은 [일랜시아]라는 특정한 기표가 가져오는 노스텔지어의 연상작용이다. 이 영화와 관련된 인터뷰 영상이나 예고편 등을 유튜브에서 찾아보면, 대부분의 댓글은 각자의 추억을 늘어 놓고 있다. <내언니전지현과 나>의 개봉 버전은 이 부분에 보다 집중한다. 동세대 관객들에겐 자신의 추억을 꺼내어 보길 요청하고, 위 세대 관객들에겐 우리에게 이러한 추억이 존재하며 그것을 간직하고 싶다고 말한다. 때문에 새로 추가된 영화의 후반부는 우리의 노스텔지어를 앗아가지 말아 달라는 부탁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물론 이를 부정적으로 보자 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게임 내에서 커뮤니티를 구성하는 것, 그리고 그것을 모종의 유토피아로 여길 수 있는 여지를 많이 주고 있다는 점에서 아쉽게 느껴진다. 영화제 버전에서 내언니전지현의 동료 유저 ‘하루히로’가 아이템 사기를 당하고 게임을 떠나기 전 작별인사를 하는 장면이나, 공무원시험 준비를 위해 로그아웃하는 레렐의 모습을 떠올려보자. 이곳이 유토피아일 수 없음을 두 장면은 단적으로 드러낸다. 이 두 장면은 개봉 버전에서도 그대로 등장하지만, [일랜시아]라는 망겜에 사람들이 왜 남아있는지에 집중하기보단, 그러한 망겜이 지닌 추억과 그것을 보존하기 위한 여정으로 영화가 기능하기에 두 사람의 사라짐은 그저 게임을 떠난 누군가의 등장 정도로만 일축된다. 개봉 버전이 지닌 나름의 장점, 가령 [일랜시아]를 비롯한 온라인 MMORPG 게임에 무지한 사람이 보기에도 부담이 없고 친절해졌으며 확실한 내러티브를 지녔다는 점이 있지만, 영화 이후의 수많은 고민을 던져준다는 매력이 다소 사라졌다는 점에서 아쉽다. 그럼에도 <내언니전지현과 나>는 올해 공개된 여러 한국영화 중에서 중요한 위치에 놓일 것이다. 이는 단순히 국내 최초로 게이머가 연출 및 제작한 다큐멘터리가 극장에 개봉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레디 플레이어 원>과 같은 세계는 다른 방식으로 도래했고, <내언니전지현과 나>는 그것을 흥미롭게 짚어보는 영화 중 하나다. [일랜시아]는 도피처가 아니라 새로운 방식의 사회실험이 진행되는 공간이며, 인터넷이 민주주의적 유토피아가 될 것이라 예언했던 이들이 말이 틀렸음을 다시 한번 증명하는 것이며, 그럼에도 새로운 형태의 공동체가 등장하는 곳이며, 현실과 가상공간을 평생 오가며 살아야 할 첫 세대의 경험담이다. 그것만으로 <내언니전지현과 나>는 새로운 화두를 던진다.
리얼리스트
3.5
언어. 문화. 공동체의 본질을 게임의 언어로 탐구한 새로운 다큐
연엠
3.0
"개재미없네." 라고, 올 여름에 론칭한 바람의나라:연(바연)을 플레이하는 나를 본 친구가 자기도 다운을 받고 몇 분쯤 하더니 말했다. "이걸 왜 해?"라는 말을 몇 번이나 반복하며 이 개노잼겜에 대체 왜 나를 포함해 많은 사람들이 열광하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짓던 친구는 튜토리얼도 끝내지 않고 게임을 지웠다. 12지신의유적에서 열심히 사냥을 하고 있던 나는 혀를 쯧쯧 차며 "개노잼 메이플이나 하는 니가 뭘 알겠냐"라고 빈정댔는데, 친구는 pc메이플은 물론이고 모바일 메이플까지 다운받아 온갖 직업을 섭렵하고 현질까지 한 진성 메이플빠였다. 나의 의문은, 바람이나 메이플이나 도트 그래픽으로 구현된 조그만 캐릭터를 가지고 줄창 사냥하고 레벨업을 하고 새 스킬을 익히고 전직을 한다는 점에서 하등 다를 바 없는데 왜 이놈은 메이플에는 그렇게 열정적이면서 유독 바람에만 평가가 이렇게 박할까 하는 것이었고, 그 의문은 5초만에 해결된 바 바람의나라가 한창 흥하던 2000년대 초반에 친구는 한국에 없어서 바람을 하지 않았고 메이플스토리가 한창 흥하던 2000년대 중후반엔 한국에 있어서 메이플을 열심히 했기 때문이었다. 기껏해야 도트 그래픽으로 구현된 조그만 캐릭터를 가지고 줄창 사냥하고 레벨업을 하고 새 스킬을 익히고 전직을 하는 게 전부인 게임을 하는 이유가 재밌어서가 아니라는 뻔한 사실은 나와 친구의 사례에서도 이렇게 쉽게 증명된다. 호동서버에서 어렵게 구한 백현모를 들고 흑해골굴과 도깨비굴을 전전하던 내 옛날의 '도적이된오공'(당시 드래곤볼에 빠져서 지은 닉넴으로 실제 직업도 도적이었다. 내가 만든 두 번째 캐릭터로, 첫 캐릭터는 내 진짜 이름에 '주술사'를 붙인, 요컨대 '김철수주술사'였다)은 친구들 사이에선 최고 실력캐였고 pc방에선 선망의 대상으로서 내 뒤에 초딩 선후배 3~5명은 기본으로 서서 사냥 장면을 보고 감탄했으며 국내성3성 왕궁에 함께 사는 가족(아빠는 도사, 엄마는 주술사, 형은 전사였다)이 있었고 주술사 애인도 있었으며(!) 새벽 2~3시경 한고개두고개세고개네고개나 부여대미궁을 쏘다니던 어른들(대학생이었던 걸로 기억한다)과 어울리기 위해 새벽에 엄마 몰래 일어나 컴퓨터를 하다 삼일도 안되고 걸려서 컴퓨터 1주일 금지를 당하고도 정신을 못차리고는 바로 다음날 새벽부턴 엄마가 컴퓨터 불빛을 못보도록 이불을 뒤집어 쓴 채 미궁을 탐험했고 며칠 뒤 새벽엔 토끼왕굴에서 사냥하다 갑자기 이불이 홱 걷어내어지길래 소스라치게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가 분노가 어린 엄마 얼굴을 마주하게 되기도 했었고(이때의 충격은 대단해서 그때 내가 토끼왕굴에 있었다는 것마저 기억하고 있다)(후일 확인해보니 엄마는 그때 화가 났다기보단 정말 어이가 없었다고 했다) 머지않아 전화비가 너무 많이 나오는 걸 괴이하게 여긴 엄마는 내가 몰래 정액제 결제를 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초딩주제에 백현모를 들고 흑해골굴에 갈 수 있었던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난 뒤지게 혼나고 울면서 엄마에게 캐릭명과 비밀번호(영어 타자로 '짱나라')를 고해 바치며 캐릭터를 떠나보내야 했고 바람의 시절은 그렇게 끝났다. 그러니까 바람의 나라란 도트 그래픽으로 구현된 조그만 캐릭터를 가지고 줄창 사냥하고 레벨업을 하고 새 스킬을 익히며 백현모를 들고 흑해골굴에서 사냥하는 게임이 아니라 친구와 선후배와 가족과 애인과 어른들과 같이 놀던 장소였었고. "임마 내 인생이 바람이야!"라는 시청자 한정 여포 바통령의 외침에 나를 포함한 우중이 즐거워한 건 그런 이유 때문이고. 시간이 흘러 바연을 하는 나는 빛바랜 사진을 보는 기분으로 익숙하고 정겨우며 추억을 솔솔 불러일으키는 국내성과 사냥터의 그래픽 사이사이를 유랑하고 있었고(토끼왕굴에 진입했을 때 느껴졌던 카타르시스란!) 그런 의미에서 그 모든 추억을 짓밟아버린 바연은 정말이지 의미 그대로 좋망겜(좋아하지만 망한 게임)이었다. 친구는 정확히 같은 마음으로 개미굴이나 자쿰을 대했겠지. 누갓겜! 그래서 우리 중 그 누구도 일랜시아를 망겜이라고 불러선 안 되는 것이다. 일랜시아 20주년 자축 파티 때 어느 유저가 말했듯, 답답한 8~90년대생에게 돌아갈 곳이 있다는 건 행복한 일이다. --- 사람들은 '내일 죽는다면 오늘 뭘 할까'라는 질문을 할 만큼 오늘과 내일, 현재와 미래의 끈끈한 관계 속에서 지금을 살아간다. 오늘의 행복이 지속가능한지 아닌지도 알 수 없는 막막함 속에서 행복을 온전히 만끽할 수 있을까. 미래가 몰살된 삶은 가능하지 않거나, 얇은 한 가닥의 실처럼 아슬아슬하다. 행복하든 불행하든 즐겁든 슬프든, 내일은 어떨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가 오늘의 지반을 단단하게 만든다. 뻔한 미래조차 사람에겐 필요하다. 내일은 행복할 거야, 불행할 거야, 즐거울 거야, 슬플 거야, 어쨌든 내일은 어떨 거야,라는 담보가 필요하다. 그게 있어야 오늘의 할 일을 정하고 오늘을 산다. 그게 없으면 다른 무엇이라도 붙잡아야 한다. 그 무엇은 대체로 과거에 있다. "일랜시아 왜 하세요?" 아직도 일랜시아를 하는 사람들은 끊임없이 오프라인의 현실을 소환했다. 쳇바퀴돌듯 소화해야 했던 학창시절의 학원 릴레이, 줄줄이 낙방했던 공모전과 대외활동, 칼같은 입사시험, 잘 먹고 잘 살아야 한다는 압박, 앞으로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다는 막막함과 무력감, 깜깜한 미래. 사람들을 낡은 온라인 세계로 잡아끄는 건 그런 것들이었다. 감독이 밑도 끝도 없이 던지고 다녔던 "일랜시아 왜 하세요?"라는 질문 속엔, "우리 미래에도 행복할 수 있을까요?"라는 잔인한 자조가 숨어있다. 그 자조는 너무 잔인해서, 내언니전지현으로 하여금 지금의 작은 행복을 괄시하는 게임사에 기어코 찾아가게 만들었던 건지도. 내언니전지현과 함께 일랜시아를 즐기던 한 친구는 일랜시아를 하며 즐거웠던 때를 추억하다가, 앞으로 그때처럼 즐거울 수 있을까, 지나가듯 말했다. 모르겠다. 어쩌면 지금 우리에게 응답하는 건 박제된 과거뿐이다. TV 속에서 늘 보던 예능인과 정치인의 늙어가는 얼굴만 마주하는 건, 어차피 함께 어린 동년배들끼리 고작 몇 년이 흘렀을 뿐인데 장난스레 서로 '그땐 그랬지'를 말하는 늙은이 취급을 하는 건, 바람의나라와 메이플스토리와 일랜시아에 아직도 열광하는 건, 다 그래서인지도 모르겠다. --- UCC 감성 나는 편집이 오히려 좋았고 오디오가 날것이라 귀가 좀 아팠고 가방에서 귀마개를 찾으려고 부스럭대니까 앞쪽에 계신 분이 시끄럽다는 눈으로 쳐다보시길래 금세 그만두고 손가락으로 귀를 막고 봤다. --- 좋망겜 바연은 얼마 안가서 지웠다. 바람 구 유저는 돌아갈 곳이 없어 행복하지 않다.
주령
3.5
망겜이라는 소재로 발현되는 젊은이의 무력감 게임 좀 많이 했다 하는 2,30대라면 어딘가 모를 그 아련함에 눈물 한 방울 흘릴 수도 있다.
film fantasia
3.5
영화는, 게임은, 세상을 바꾼다. 앞으로 '게임이잖아' '영화잖아' 발언을 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이 다큐를 보여줄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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