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환4.0불확실한 것들로 둘러싸인 와중에 매 순간 결단을 내려야 하는 우리가 일생에 유일하게 확신하는 것이 필연적인 끝인 것은 쓸쓸한 저주와도 같다. 불확실한 인생에서 대답해야 할 오직 하나뿐인 질문은 어떻게 끝을 내야 하는 것이 아닌 무엇을 끝내야 하는가. 이제는 나를 붙잡는 모든 것들로부터 떨쳐내야 할 때. . . 모든 것에는 끝이 있다는 기묘한 안도감과 도무지 끝내는 방법을 모르는 개인의 불안함은 좋지 못한 생각들을 저에게 심어주곤 합니다. 필연적인 끝이 존재한다는 걸 인지한다는 것은 때때로는 소소한 축복이 되어주지만, 불확실한 것들로 둘러싸인 와중에 매 순간 결단을 내려야 하는 우리가 일생에 유일하게 확신하는 것이 필연적인 끝인 것은 쓸쓸한 저주와도 같을까요. 끝이 있기에 시간 속에서 앞으로 나아가는 것을 두려워하지만 머무른다고 해서 끝을 마주하지 않는 것은 아니기에. 불확실로 가득 찬 암흑 속에서, 머무르지도 못하는 이곳에서 좀처럼 확신을 갖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시간이 갈수록 덧없는 후회만 쌓여갑니다. 이제는 그만 끝내려 결심해도 차마 끝낼 수 없는 나는 시작하는 것에도 어려움을 겪는건 물론 마찬가지겠죠. 끝이 있다는 사실이 나를 무력하게 만드는 것인지, 시작도 하기 전에 끝을 두려워한다면 지금으로써 저는 더 이상 할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때늦은 후회와 의미 없는 상상들이 힘없이 흩날리는 지금의 제 자신은 어느 때보다 분명하지 못한 미래들을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끝을 제외하곤 쉽사리 떠올려지지 않는 미래들을 애써 외면하고 남은 건 뒤엉킨 과거뿐인 것도. 어쩌면 내가 이 세상에서 강렬히 교감을 하고 있는 것은 그 누구도 아닌 후회만 가득한 나 자신일지도 모른다는 것을 영화를 보고 나서야 깨달았습니다. 어떤 일들을 주체적으로 선택해야만 했던 것에 지쳐버린 나머지 이제는 나 자신마저 확신을 잃어갔고 어느덧 나는 나에게 지배당하고 있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결국 생전에 후회만이 가득했고 남은 나날들을 덧없는 상상으로 지배했던 한 사람의 쓸쓸한 이야기입니다. 스쳐 지나갔던 수많은 후회들과 이를 메꾸기 위해 선택한 의미 없는 가정들은 벌거벗은 현실의 나를 더욱 초라하게 만들 뿐이죠. 불확실한 인생의 질문은 오직 하나였습니다. 이제는 그만 끝내야 할 때에 대답해야 했던 하나의 질문을 어떻게 끝을 내야 하는지를 스스로에게 물은 자에게 어느 날 눈이 내려왔습니다. (영화는 질문에 대한 답을 내려야 할 때라는 대사와 함께 눈이 내리며 시작되었다.) 추위에 벌벌 떨며 이렇게 끝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고 생각했었던 것이 무엇 하나 확신을 잡지 못했던 그에겐 이보다 뚜렷한 확신은 없었나 봅니다. 후회와 상상들로 현실을 바로잡지 못한 채 살아간 사람은 누더기에게 산 채로 갉아먹힌 돼지와 별다를 바 없어 보입니다. 결국 이제는 끝내야 할 때에 어떻게 끝을 내야 하는지라는 물음은 잘못된 듯 합니다. 불확실한 인생에서 대답해야 할 오직 하나뿐인 질문은 과연 무엇을 끝내야 하는 것으로 바꿔야만 했습니다. 시작도 해보기도 전에 끝을 두려워하는 버릇을 지닌 나에게 후회를 저버리진 못하더라도 하다못해 이 부질없는 상상들을 이제는 그만 끝내야 할 때가 왔을까. 오늘의 선택이 어떤 내일을 가져올지는 모르지만, 쓸쓸하게 회환만이 가득 차 늙어가고 싶지 않다면 저는 필연적인 끝을 의식할 때마다 두려움에서 희망으로 바꿔야만 했습니다. 그러기 위해선, 절대로 옛일에 여전히 붙잡혀 있는 나에게 지배당하지도, 시간 속에서 앞으로 나아가는 것에 대해 두려워하지도 말아야겠죠. 이제는 지나간 어제로부터, 나를 붙잡는 모든 것들로부터 과감하게 떨쳐낼 때가 저에게 온 듯합니다. “그 가정은 옳다. 두려움은 커져간다. 이제 대답할 시간이다. 질문은 단 하나.” 영화를 보면서 내내 불확실함이 주는 불안함과 필연적인 끝이라는 두려움, 지나간 날들에 대한 후회들로 의미 없이 시간을 채우는 본인에 대한 자각과 반성이랄까. 지나치게 친절하지 못해 영화는 조금 아쉬웠어도 서늘한 공감만큼은 오래도록 남을 것 같았습니다. 아마도 쓸쓸했던 이 제목을 강렬한 어조로도 바뀌어 스스로에게 되새겨야만 했을까. 후회를 메꾸는 가정은 터무니없는 상상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만큼 아쉽기에 계속해서 제자리를 맴돌 뿐이죠. 터무니 없는 것이 아니라 아쉽다는 것은 곧 다시 도전해 볼 이유도 쟁취할 확률도 높은 거겠죠. 권태와 반복에 지쳐 그만둔다는 의미보다는 이제는 지난 날들의 후회는 그만 끝내고 다시 일어나야지를 떠올리는 것이 다음날을 임하는 더 바람직한 자세이지 않을까.いいね308コメント3
P12.0"이제 그만 이해고 나발이고 안하려고 해.." 배우 찔끔 몇명 안나오고 소극장 연극같은 잔잔바리바리 마담 보바리같은 어깨 축 쳐져서 기분 lowlow lowlow~downdowndown해지는 영화는 안그래도 짜치는데 이해고 나발이고 다 보고나서 해례본을 인터넷에 검색해보는 수치심까지 들게 하는 아주 못되먹은 영화 이쯤되면 이 양반은 우울전도사가 아닌가 합리적갓심이 든다.いいね147コメント3
석미인3.0얼어붙은 양들을 한켠에 치워놓은 장면이 잔상으로 남는다. '사람들은 자신이 시간을 통과한다고 생각하지만 인간은 정지해 있고 시간이 우리를 통과하는 것이다'라는 대사도. 우리는 시간이 되어 그들의 과거를 보고 그들의 미래를 보고 그들이 떠난 후를 보았다. 영화에서 인용한 톨스토이의 구절은 아직도 어떤 의미인지 정확히 알 수 없다. 행복한 가정은 엇비슷하지만 불행한 가정은 제각각이다. 가정이 아니라 표정이 원문에 가깝다는 해석을 읽은 기억이 난다. 행복한 표정은 비슷하지만 불행의 얼굴은 다양하다. 태어날 때의 얼굴은 다 같은 표정이지만 죽음의 얼굴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표정을 가지고 있다. 얼어 죽어 한켠에 놓인 양들. 눕힌 방향만 다른, 마지막 표정과 한 가지 질문만 가진, 그도 있고 그녀도 있는, 여러 구의 시체가 된, 오랫동안 같은 처지에 있을 자신들. 영원히 역에 서 있을 것 같은 나날이었다고 서문을 쓴 시인이 있었다. 이제는 죽은, 먼 집으로 혼자 돌아간 그 시인의 '빙하기의 역'이라는 시는 이렇다. 오랜 시간이 지났다 그리고 우리는 만났다 얼어붙은 채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역에서 내 속의 할머니가 물었다. 어디에 있었어? 내 속의 아주머니가 물었다. 무심하게 살지 그랬니? 내 속의 계집애가 물었다. 파꽃처럼 아린 나비를 보러 시베리아로 간 적도 있었니? 내 속의 고아가 물었다. 어디 슬펐어? 그는 답했다. 노래하던 것들이 떠났어 그것들, 철새였거든 그 노래가 철새였거든 그러자 심장이 아팠어 한밤중에 쓰러졌고 하하하, 붉은 십자가를 가진 차 한 대가 왔어 // 빙하기의 역에서 무언가, 언젠가 있었던 자리의 얼음 위에서 우리는 오래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아이처럼 아이의 시간 속에서만 살고 싶은 것처럼 어린 낙과처럼 그리고 눈보라 속에서 믿을 수 없는 악수를 나누었다 헤어졌다 헤어지기 전 내 속의 신생아가 물었다, 언제 다시 만나? 네 속의 노인이 답했다, 꽃다발을 든 네 입술이 어떤 사랑에 정직해질 때면 내 속의 태아는 답했다, 잘 가 찰리 카우프만의 영화는 죽음과 회한에 있어 늘 비관과 허무로 골똘하다. '모든 건 죽어야 한다. 그건 진실이다. 늘 희망이 있다고 생각하려는 이들도 있다. 죽음을 초월해 살 수 있다고 그건 상황이 나아질 거라 믿는 인간만의 환상이다. 자신의 죽음이 필연적임을 아는 동물은 인간뿐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다른 동물들은 현재에 산다. 인간은 그럴 수 없기에 희망을 발명한 거다' 죽음에서 필사적으로 도망치려는 나와는 다르다. 허나 죽음이 주는 무력함 앞에서 다음 걸음을 내딛는 사람들은 뭔가. 희망이란 순진한 사람들이 아니라 용기 있는 사람들이 발명해낸 것인지도 모르리라. 죽은 시인의 서문은 이렇게 끝난다. 영원히 역에 서 있을 것 같은 나날이었다. 그러나 언제나 기차는 왔고 나는 역을 떠난다. 다음 역을 향하여.라고 비가 온다. 창문을 닫는다. 빗소리에 온몸을 두들겨 맞더라도 우리는 자두어야 한다. 그리고 또 일어나야 한다. 내 창 밖에는 궂은 날에도 언제나 밭을 가꾸는 노인이 있기 때문이다. 그녀가 찰리 카우프만보다 내 생에 가까이 있다.いいね138コメント7
하원
3.5
ネタバレがあります!!
이동진 평론가
5.0
파리하게 회귀하는 강박과 슬픔 끝에 눅눅한 구두점을 향하여.
정환
4.0
불확실한 것들로 둘러싸인 와중에 매 순간 결단을 내려야 하는 우리가 일생에 유일하게 확신하는 것이 필연적인 끝인 것은 쓸쓸한 저주와도 같다. 불확실한 인생에서 대답해야 할 오직 하나뿐인 질문은 어떻게 끝을 내야 하는 것이 아닌 무엇을 끝내야 하는가. 이제는 나를 붙잡는 모든 것들로부터 떨쳐내야 할 때. . . 모든 것에는 끝이 있다는 기묘한 안도감과 도무지 끝내는 방법을 모르는 개인의 불안함은 좋지 못한 생각들을 저에게 심어주곤 합니다. 필연적인 끝이 존재한다는 걸 인지한다는 것은 때때로는 소소한 축복이 되어주지만, 불확실한 것들로 둘러싸인 와중에 매 순간 결단을 내려야 하는 우리가 일생에 유일하게 확신하는 것이 필연적인 끝인 것은 쓸쓸한 저주와도 같을까요. 끝이 있기에 시간 속에서 앞으로 나아가는 것을 두려워하지만 머무른다고 해서 끝을 마주하지 않는 것은 아니기에. 불확실로 가득 찬 암흑 속에서, 머무르지도 못하는 이곳에서 좀처럼 확신을 갖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시간이 갈수록 덧없는 후회만 쌓여갑니다. 이제는 그만 끝내려 결심해도 차마 끝낼 수 없는 나는 시작하는 것에도 어려움을 겪는건 물론 마찬가지겠죠. 끝이 있다는 사실이 나를 무력하게 만드는 것인지, 시작도 하기 전에 끝을 두려워한다면 지금으로써 저는 더 이상 할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때늦은 후회와 의미 없는 상상들이 힘없이 흩날리는 지금의 제 자신은 어느 때보다 분명하지 못한 미래들을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끝을 제외하곤 쉽사리 떠올려지지 않는 미래들을 애써 외면하고 남은 건 뒤엉킨 과거뿐인 것도. 어쩌면 내가 이 세상에서 강렬히 교감을 하고 있는 것은 그 누구도 아닌 후회만 가득한 나 자신일지도 모른다는 것을 영화를 보고 나서야 깨달았습니다. 어떤 일들을 주체적으로 선택해야만 했던 것에 지쳐버린 나머지 이제는 나 자신마저 확신을 잃어갔고 어느덧 나는 나에게 지배당하고 있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결국 생전에 후회만이 가득했고 남은 나날들을 덧없는 상상으로 지배했던 한 사람의 쓸쓸한 이야기입니다. 스쳐 지나갔던 수많은 후회들과 이를 메꾸기 위해 선택한 의미 없는 가정들은 벌거벗은 현실의 나를 더욱 초라하게 만들 뿐이죠. 불확실한 인생의 질문은 오직 하나였습니다. 이제는 그만 끝내야 할 때에 대답해야 했던 하나의 질문을 어떻게 끝을 내야 하는지를 스스로에게 물은 자에게 어느 날 눈이 내려왔습니다. (영화는 질문에 대한 답을 내려야 할 때라는 대사와 함께 눈이 내리며 시작되었다.) 추위에 벌벌 떨며 이렇게 끝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고 생각했었던 것이 무엇 하나 확신을 잡지 못했던 그에겐 이보다 뚜렷한 확신은 없었나 봅니다. 후회와 상상들로 현실을 바로잡지 못한 채 살아간 사람은 누더기에게 산 채로 갉아먹힌 돼지와 별다를 바 없어 보입니다. 결국 이제는 끝내야 할 때에 어떻게 끝을 내야 하는지라는 물음은 잘못된 듯 합니다. 불확실한 인생에서 대답해야 할 오직 하나뿐인 질문은 과연 무엇을 끝내야 하는 것으로 바꿔야만 했습니다. 시작도 해보기도 전에 끝을 두려워하는 버릇을 지닌 나에게 후회를 저버리진 못하더라도 하다못해 이 부질없는 상상들을 이제는 그만 끝내야 할 때가 왔을까. 오늘의 선택이 어떤 내일을 가져올지는 모르지만, 쓸쓸하게 회환만이 가득 차 늙어가고 싶지 않다면 저는 필연적인 끝을 의식할 때마다 두려움에서 희망으로 바꿔야만 했습니다. 그러기 위해선, 절대로 옛일에 여전히 붙잡혀 있는 나에게 지배당하지도, 시간 속에서 앞으로 나아가는 것에 대해 두려워하지도 말아야겠죠. 이제는 지나간 어제로부터, 나를 붙잡는 모든 것들로부터 과감하게 떨쳐낼 때가 저에게 온 듯합니다. “그 가정은 옳다. 두려움은 커져간다. 이제 대답할 시간이다. 질문은 단 하나.” 영화를 보면서 내내 불확실함이 주는 불안함과 필연적인 끝이라는 두려움, 지나간 날들에 대한 후회들로 의미 없이 시간을 채우는 본인에 대한 자각과 반성이랄까. 지나치게 친절하지 못해 영화는 조금 아쉬웠어도 서늘한 공감만큼은 오래도록 남을 것 같았습니다. 아마도 쓸쓸했던 이 제목을 강렬한 어조로도 바뀌어 스스로에게 되새겨야만 했을까. 후회를 메꾸는 가정은 터무니없는 상상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만큼 아쉽기에 계속해서 제자리를 맴돌 뿐이죠. 터무니 없는 것이 아니라 아쉽다는 것은 곧 다시 도전해 볼 이유도 쟁취할 확률도 높은 거겠죠. 권태와 반복에 지쳐 그만둔다는 의미보다는 이제는 지난 날들의 후회는 그만 끝내고 다시 일어나야지를 떠올리는 것이 다음날을 임하는 더 바람직한 자세이지 않을까.
P1
2.0
"이제 그만 이해고 나발이고 안하려고 해.." 배우 찔끔 몇명 안나오고 소극장 연극같은 잔잔바리바리 마담 보바리같은 어깨 축 쳐져서 기분 lowlow lowlow~downdowndown해지는 영화는 안그래도 짜치는데 이해고 나발이고 다 보고나서 해례본을 인터넷에 검색해보는 수치심까지 들게 하는 아주 못되먹은 영화 이쯤되면 이 양반은 우울전도사가 아닌가 합리적갓심이 든다.
석미인
3.0
얼어붙은 양들을 한켠에 치워놓은 장면이 잔상으로 남는다. '사람들은 자신이 시간을 통과한다고 생각하지만 인간은 정지해 있고 시간이 우리를 통과하는 것이다'라는 대사도. 우리는 시간이 되어 그들의 과거를 보고 그들의 미래를 보고 그들이 떠난 후를 보았다. 영화에서 인용한 톨스토이의 구절은 아직도 어떤 의미인지 정확히 알 수 없다. 행복한 가정은 엇비슷하지만 불행한 가정은 제각각이다. 가정이 아니라 표정이 원문에 가깝다는 해석을 읽은 기억이 난다. 행복한 표정은 비슷하지만 불행의 얼굴은 다양하다. 태어날 때의 얼굴은 다 같은 표정이지만 죽음의 얼굴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표정을 가지고 있다. 얼어 죽어 한켠에 놓인 양들. 눕힌 방향만 다른, 마지막 표정과 한 가지 질문만 가진, 그도 있고 그녀도 있는, 여러 구의 시체가 된, 오랫동안 같은 처지에 있을 자신들. 영원히 역에 서 있을 것 같은 나날이었다고 서문을 쓴 시인이 있었다. 이제는 죽은, 먼 집으로 혼자 돌아간 그 시인의 '빙하기의 역'이라는 시는 이렇다. 오랜 시간이 지났다 그리고 우리는 만났다 얼어붙은 채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역에서 내 속의 할머니가 물었다. 어디에 있었어? 내 속의 아주머니가 물었다. 무심하게 살지 그랬니? 내 속의 계집애가 물었다. 파꽃처럼 아린 나비를 보러 시베리아로 간 적도 있었니? 내 속의 고아가 물었다. 어디 슬펐어? 그는 답했다. 노래하던 것들이 떠났어 그것들, 철새였거든 그 노래가 철새였거든 그러자 심장이 아팠어 한밤중에 쓰러졌고 하하하, 붉은 십자가를 가진 차 한 대가 왔어 // 빙하기의 역에서 무언가, 언젠가 있었던 자리의 얼음 위에서 우리는 오래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아이처럼 아이의 시간 속에서만 살고 싶은 것처럼 어린 낙과처럼 그리고 눈보라 속에서 믿을 수 없는 악수를 나누었다 헤어졌다 헤어지기 전 내 속의 신생아가 물었다, 언제 다시 만나? 네 속의 노인이 답했다, 꽃다발을 든 네 입술이 어떤 사랑에 정직해질 때면 내 속의 태아는 답했다, 잘 가 찰리 카우프만의 영화는 죽음과 회한에 있어 늘 비관과 허무로 골똘하다. '모든 건 죽어야 한다. 그건 진실이다. 늘 희망이 있다고 생각하려는 이들도 있다. 죽음을 초월해 살 수 있다고 그건 상황이 나아질 거라 믿는 인간만의 환상이다. 자신의 죽음이 필연적임을 아는 동물은 인간뿐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다른 동물들은 현재에 산다. 인간은 그럴 수 없기에 희망을 발명한 거다' 죽음에서 필사적으로 도망치려는 나와는 다르다. 허나 죽음이 주는 무력함 앞에서 다음 걸음을 내딛는 사람들은 뭔가. 희망이란 순진한 사람들이 아니라 용기 있는 사람들이 발명해낸 것인지도 모르리라. 죽은 시인의 서문은 이렇게 끝난다. 영원히 역에 서 있을 것 같은 나날이었다. 그러나 언제나 기차는 왔고 나는 역을 떠난다. 다음 역을 향하여.라고 비가 온다. 창문을 닫는다. 빗소리에 온몸을 두들겨 맞더라도 우리는 자두어야 한다. 그리고 또 일어나야 한다. 내 창 밖에는 궂은 날에도 언제나 밭을 가꾸는 노인이 있기 때문이다. 그녀가 찰리 카우프만보다 내 생에 가까이 있다.
멋진사람
1.5
예고편 만든 사람 업계 탑인가? 난해함. 미술도 괜찮은데,진짜..하....
박서하
4.5
날 매료시킨 후회의 망념도 이젠 되풀이하지 않을래.
햄튜브
1.0
제이크 찐따연기 탑클래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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