ウエスト・サイド・ストーリー
West Side Story
2021 · 犯罪/ドラマ/ミュージカル/ラブロマンス · アメリカ
156分 · PG12

ニューヨーク、マンハッタンのウエスト・サイド。そこには、夢や成功、そして自由を求める多くの移民たちが暮らしている。しかし、差別や偏見による社会への不満を抱えた若者たちは、仲間たちとグループを結成し、激しく対立していた。そんなある日、チーム“ジェッツ”の元リーダーであるトニー(アンセル・エルゴート)は、敵対する“シャークス”のリーダーの妹マリア(レイチェル・ゼグラー)と出会い、瞬く間に惹かれ合う。やがて、ふたりの禁断の恋は、多くの人々の運命を変えてゆくのだっ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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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진 평론가
3.0
감독들에겐 자신의 손으로 다시 만들어보고 싶은 영화가 하나씩 있나 보다.
고랭
1.5
가슴 뛰지 않는 뮤지컬 웃음만 나오는 대사들 납득이 가지 않는 기가 찬 전개 지나치게 편의적인 캐릭터 사용 서로 죽고 못 살지만 리프x베르나르도 보다도 설레지 않는 주인공들의 케미
Jay Oh
3.0
연출, 안무, 미술 등, 다방면으로 탁월하다...만 기대와 달리 감정이 와닿질 않는다. A story in wrong times, this time? 오히려 원작이 여러 부분에서 더 모던하다 느껴지는 이유가 뭘까요. 이야기를 크게 바꾸지 않고 만들기에는 너무 낡아버린 이야기일까도 싶었는데, 원작 클립을 다시 보고 오니 그건 아닌 것 같습니다. 토니와 마리아가 처음 만나는 장면을 예시로 들자면, 원작에서는 배경을 모두 날려버리고 몽환적인 분위기를 연출하면서 첫 눈에 반했다는 느낌이 와닿도록 했습니다. 이 장면 덕분에 후반부의 논리적이지 못한 선택들도 납득이 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이에 비해 리메이크에서는 같은 내용을 좀 더 현실적으로 담아서인지 그 감정의 정도가 시각적으로 느껴지지 않습니다. 차마 말로만은 표현하지 못하는 큰 감정을 노래와 춤으로 표현하는 게 뮤지컬인데, 정작 그 감정이 그 정도로 크고 진솔하다는 설득이 부족했다는 생각입니다. 차라리 야심차게 현대판을 만들었다면 더 볼만 했겠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안셀 엘고트가 주인공으로서 보여줬어야 할 매력도 부족했던 것 같고, 영화의 리듬도 어딘가 모르게 삐걱대니 영화가 제시하는 감정들이 공감이 안 됐나 봅니다. 계속 사랑이라고 말하지만 말고, 저도 좀 느끼게 해줘요...! 개인적으로는 <인 더 하이츠>나 <틱틱붐>이 더 좋았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도전을 이어나가는 스필버그의 정신은 정말 멋있네요.
무비신
3.5
큰 메시지를 온전히 담기에는 그릇의 크기가 작았다.
정환
4.0
“다양성의 시대로 돌입한 지금, 여전히 언어와 인종의 다름을 불일치로 해석하고 차별과 폭력이 무분별한 거리에서 춤과 노래만이 서로 다른 이들을 통합하는 유일한 수단이라는 세계, 그러니까 사랑만이 답이라고 말하지만, 사랑의 노랫말은 별다른 위력을 발휘하지 못한 채 비극의 끝자락에서 힘없이 맴돈다.” 철망으로 둘러싸인 농구장을 내려다보던 옛 영화의 시대는 차별의 시대였다. 무언가로부터 억압되어 있고, 아무리 벗어나려 발버둥 쳐도 그곳에서 태어난 누군가는, 그곳에서 죽을 수밖에 없고 그 자리에 남아 지킬 수밖에 없는 시공간이었다. 반면, 무너지고 부서진 건물의 꼭대기 위에서 폐허가 된 단지를 바라보는 이 영화가 스필버그에 의해 탄생한 지금은 다양성의 시대다. 억누르던 시스템에 벗어나, 파괴와 재건의 쉼 없는 운동으로 세상을 확장시켜나간다. 농구장에서 시작해 농구장으로 끝나던 옛 시대는 벗어날 수 없는 한정된 공간에서 마주한 차별의 사슬에 구속된 이들끼리 마침내 그들을 수용하기까지를 조명했고, 이 시대의 영화는 더 넓어진 세상에서 서로 다른 것들을 받아들일 준비를 한다. 그러나 이전의 세상을 부수고 새로운 세상을 세울 준비를 할 우리의 터는 부서진 건물의 잔해만 남아있지, 이 폐허는 아직 새로운 건물이 세워지지 않았다. 다양한 언어들이 한 공간에 수용했지만, 여전히 다름이라는 요소는 우리라는 말로 엮을 수 없는 장애물이다. 너는 우리랑 달라. 다양한 언어와 인종은 서로의 불일치로 해석하곤, 한 공간에서 이들끼리 서로의 자리에서 선을 긋곤 분열한다. 우리는 차별의 시대와 다른 시대를 선언했음에도 더 많은 갈등을 맞이했다. 분명 통합과 사랑을 염원했던 옛날의 메시지를 지금에서도 노래하지만, 차별과 폭력은 완전한 대비로 그 모든 춤과 노래들이 가졌던 의미조차 무미건조하게 만들어버린다. 오히려 그때 만들어진 영화보다 지금 만들어진 이 영화가 세상의 분열에 더욱 집중한다. 다양성의 시대로 돌입한 지금, 여전히 언어와 인종의 다름을 불일치로 해석하고 차별과 폭력이 무분별한 거리에서 춤과 노래만이 서로 다른 이들을 통합하는 유일한 수단이라는 세계지만, 사랑은 빌어먹을 현실 앞에 별다른 위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춤과 노래, 그러니까 사랑만이 답이라고 말하지만, 사랑의 노랫말은 비극의 끝자락에서 힘없이 맴돌 뿐이다. 서로 다른 것들끼리 만나고 부딪힌다. 옛 세계를 부수곤, 새로운 세계를 건설하겠노라 선언했다. 지금 우리가 위치한 시공간은 그 폐허 위에 서있다. 옛 노래는 어디로 향하는가. 우리는 어디를 바라보고 있는가. 앞으로의 세계는 사랑만이 가득할 거란 순수하고 간절한 믿음의 노래, 그 옛날의 보편적인 사랑을 지금 쉽게 공감하지 못할 낡은 것이 되었고, 대신에 이어져 온 차별과 폭력만이 낯설지 않은 시대에서 우리는 얼마나 더 먼 미래를 바라보아야 하는가. 우리가 함께 지내며 서로를 이해하고 아껴줄 수 있는 시간이 언제가, 어딘가에서 있기를 염원했던 그 옛날의 노래에게 모든 갈등과 차별을 봉합한 머지않은 내일을 기다리던 것은 옛 영화도 마찬가지였다. 조금은 억지스러운 개연성조차 춤, 노래, 사랑이면 납득이 되는 뮤지컬만의 공식에서 벗어나 둘을 갈라 놓은 철창과 계단에 더욱 집중한 이 영화는 옛 영화와 달라야 했다. 이 시대에 이 영화는, 우리는 달라져야 했다. 사랑과 통합의 춤과 노래가 모든 혐오와 배척 앞에서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래봐야 주위는 온통 폐허 뿐일텐데.
...
4.5
뮤지컬 원작은 스필버그의 어린 시절 집에서 처음 접한 대중음악이라는 추억이 담겨있다. 영화가 완성되기 전 2020년에 그의 아버지는 돌아가셨고, 스필버그는 아버지에게 영화를 헌정했다. 그러나 여기엔 어떤 희망도, 로맨스에 대한 미화도 없다. 총기를 회수하려는 평화주의적 시도는 짓밟히고,(오늘날의 미국도 그렇지 않나?) 사랑은 끔찍한 저주로 작동한다.(사랑이 저주가 되는 스필버그 영화는 우리가 일찍이 보았던 것이고, 20년이 지나도 그의 세계관은 여전하다.) 폐허를 부감으로 담는 오프닝은 엔딩에 놓아도 무방한데, 이 폐허에는 슬럼가의 대척점인 링컨센터가 세워질 예정이고, 제트파의 일원은 지하에서 땅을 열며 등장한다. 계급격차의 우화처럼 보이는 이 씬은 쉰들러 리스트와 라이언 일병 구하기의 폐허가 계속되는 것이다.(본작은 라이언 일병의 배경이었던 2차 세계대전 당시 아우슈비츠 수용소가 있던 폴란드로부터 나치독일 직전과 이후 미국으로 이주해온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선한 마음으로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들 수 있다'는 믿음이 보였던 쉰들러 리스트와 라이언 일병 구하기의 노선과 별개로, 본작에서 싸움을 막으려는 시도(토니)나 위험을 경고하는 시도들(슈랭크 경위, 애니바디스)은 전부 실패로 돌아간다. 제트파와 샤크파를 양옆에 두고 슈랭크 경위가 경고하는 장면이 오래 보여지는 이유는, 그의 경고가 이후 벌어질 모든 일을 예언하고, 또 설명해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무도 그의 경고를 듣지 않는다. 제트파와 샤크파는 떠나지 않았고, 서로 다른 언어로 이야기하면서 영역다툼을 한다. 마리아는 토니와 어울리지 말라는 주위의 경고가 전혀 들리지 않는다. 모든 소통이 불통인 와중에 오로지 허락된 소통이란 치노가 마리아를 죽였다는 아니타의 거짓말 뿐이고, 가혹하게도 발렌티나가 이 소식을 토니에게 전달해야하는 상황에 처하고 만다. 부모세대가 아메리칸 드림을 시작했을 맨해튼의 부둣가는 부서졌으며, 자식세대는 그 잔해 위에서 총을 뺏고 뺏기며 싸우는 중이다. 운명을 개척하려고 떠나온 이주민의 자식세대는 그곳에서 또다시 떠나야할 가혹한 운명에 처했음에도, 부모세대와 달리 그곳에 남는 운명을 택한다. "나는 뒤(지나온 일)를 돌아보지 않는다"는 리프의 말은 자신이 운명을 주도한다는 말인 것처럼 들려도, 사실상 운명을 받아들인다는 말과 다를바 없다. 리프와 마찬가지로 인물들은 운명에 자신을 맡기는 데에 익숙하다. 그 운명이 삶의 터전이든, 살아온 환경이든, 사랑이든, 무엇이건 말이다.(그들은 환경이 자신들을 그렇게 만들었음을 인지하면서도 사실은 이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이미 떠난 사람들은 운명을 개척했다고도, 달아났다고도 볼수 있다. Somewhere / There's a time for us / Someday a time for us / Time together with time to spare / Time to learn / Time to care / Someday, somewhere / We'll find a new way of living / We'll find there's a way of forgiving 발렌타인은 푸에르토리코에서 바다를 건너와 이곳에서 닥을 잃고 토니를 잃으면서, 오랜 세월 운명에 치여왔을 것이다. 마지막에 발렌타인이 부르는 Somewhere가 슬픈 이유는, 이 노래가 비단 이민자나 난민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몇몇 장면과 뮤지컬 가사로 성적 지향성, 자본주의, 성폭력, 인종문제 등 운명에 영향을 미치는 여러 요소들을 통해 고통받는 모든 존재를 아우르기 때문이다. (아니타가 폭행을 당한 일과 애니바디스의 트랜스젠더 이야기, 샤크파의 스페인어 노래와 아메리칸 드림에 관한 노래 등) 영화 속 폴란드계 미국인은 시기상 2차 세계대전 이전에 넘어온 폴란드계 유대인일 확률이 높고, 나치독일을 우연히 피한 이주민일 것이다. (나치 이후에는 주로 공산주의를 피해 미국으로 건너왔다) 이건 결국 나치독일과 공산주의를 피한 폴란드인들이 미국에서 또다시 삶의 터전을 잃어가는 이야기이다. 아우슈비츠는 폴란드에 세워진 대량학살 시설이었고, 유대인인 스필버그는 폴란드와 같은 역사의 상처를 쉼없이 듣고 자랐을 것이다. 뮤지컬 영화보다는 차라리 스필버그의 전쟁영화 한편을 보는듯한 느낌인데, 쉰들러 리스트와 라이언 일병 구하기에서 보였던 한줄기 희망조차 거절한다. 61년작이 나왔을 때보다도 현재의 세상은 더 분열된 상황에서 오히려 원작에 가깝게 만들어 50년대와 현재의 시대적 차이를 드러내면서, 동시에 영화 속 갈등이 현재에도 유효함을 드러낸다. 이토록 비극적인 영화, 영화 같은 세상.
기뤈
1.5
아니 진짜 실화냐 스필버그 노망났냐고
권혜정
4.0
마리아의 선택을 이해하긴 힘들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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