アントニア
Antonia
1995 · コメディ/ドラマ · オランダ, ベルギー, イギリス, フランス
102分 · R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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ある朝。今日が人生最後の日と感じたアントニア(ヴィレケ・ファン・アメローイ)は生涯を振り返る…。第二次大戦直後。40代にさしかかり、彼女は娘ダニエル(エルス・ドッターマンス)を連れて、老母が待つ故郷の村に帰ってきた。母は彼女の顔を見て挨拶するなり、すぐに亡くなった。村では「放蕩娘のご帰還だ」と茶化す男もいるが、おおらかな彼女は気にしない。そんな彼女の周囲に村のはみだし者たちが集まってき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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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pening Credits (ANTONIA'S LINE;DUTCH CINEMA)

Trouble In The Village/Angelus/After Work

Single Church Easter Bell (F Sharp)

Premonition/Life Goes On/Evening Stroll

Howling At The Moon/Felling The Tree

The Farmer & His Sons

이의현
4.5
남성은 생애주기 내내 여성의 몸에 기생한다. 포궁, 젖, 무상육아노동, 무상가사노동, 임노동(임금, 퇴직금), 엄마, 누나(동생), 아내, 딸에 이르기까지. 이 모든 과정은 제도적으로, 사회적으로 철저히 지급 보장된다. 즉, 아무런 대가 없이 무상으로 제공된다. 가부장제는 그래서 자본주의, 식민주의와 절대 분리되지 않는 것이다. 자본과 기업이 노동자가 생산한 잉여가치를 약탈하는 것처럼, 일본 제국이 식민지 한국의 자원과 노동을 착취했던 것처럼, 남성은 여성을 착취해왔고 여전히 원자 단위로 착취 중이다. 무려 수천년동안. “남자가 돈벌어다 주잖아”가 변명이고 개소리인 이유다. ‘남성이 버는 돈’에는 여성의 무상노동 지분이 99.9%이다. 여성의 무상노동 없이 자생하는 남자는 역사상 단 한 명도 없다. 어쩌다 여성의 노동이 이렇게 당연히 ‘무상’이 되었는가. 간단하다. 자본, 제국, 남성이 같은 편에서 공모하기 때문이다. “이게 당연한 거야. 함부로 개기지마. 이 빨갱이야.”
도양가비
4.5
1. 여성은 남편도, 아들도 필요 없다 2. 살아있다는 것과 죽는다는 것은 분리되지 않는다 3. 죽음이라는 것은 기적이다 4. 모성애는 당연한 것이 아니다
Zizi
5.0
여성이 당당히 자기 삶의 주인이 될 수 있음을 '주장'하지 않고 그저 '보여'주었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이 가능하리라는 것을 의심치않게 되었다.
한민성
5.0
가계나 일생 전반을 보여주며 삶과 인생 어쩌고 에 대한 연출자의 생각을 드러내는 영화는 많았다. 그러나 이 영화가 특별한 이유는 너무나 익숙한 서사인 남성-부계 중심의 서사를 탈피했을 뿐만 아니라, 예술와 의례, 철학과 종교, 전쟁과 혁명에 대한 탁월한 은유가 담겨있는데도 어디 하나 더부룩함 없이 빼어나게 담백하다는 데 있다. 영화 <안토니아스 라인>은 전형적 남성-영화의 전형적 서사구조를 반전한다. 주인공(들)이 여성들이고, 남성 가부장을 통하지 않고도 여성으로서의 (젠더와 대립되는 의미의) ‘여성으로서의 자존’을 드러내며 그저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 줬을 뿐인데도 이 영화는 ‘페미니즘 영화’가 된다. 주인공(들)이 남성들이고 남성으로서의 자존을 드러내는 영화가 무수히 많았고, 그 영화들이 ‘가부장주의 영화’ 혹은 ‘남성영화’ 라는 타이틀을 굳이 달지 않고도 마치 모든 인간을 대변하는 듯 한 흥행과 명성을 얻었음을 생각해보면 이는 이 영화에 붙은 ‘페미니즘 영화’라는 호명은 오히려 그간의 영화, 예술계가 얼마나 남성 중심적이었는지를 나타내는 것이다. 이 영화는 분명 여성영화의 범주에 들어가지만, 그간의 대부분의 영화들이 ‘남성-가부장 영화’였음을 반증하는 ‘탈-가부장 영화’의 가장 모범적 사례라고 정의하는 것이 이 영화에 어울리는 가장 적합한 호명이라고 생각한다. 남성영화들, 가부장영화들이 아무런 의심 없이 그저 ‘영화’ 혹은 ‘작품’이라고 불리는 시대에서야 이 영화는 ‘페미니즘 영화’겠지만 글쎄. 이 영화가 ‘아직은 페미니즘 영화’라서 이들이 평등한 것이기도 하지만, 이런 평등한 세계관은 모든 영화가, 그리고 사회가 당연히 전제해야 하는 것이다. 내가 볼 때 이건 그냥 ‘영화’다. 그래야만 한다. 그렇다면 그간 남성-영화에서 ‘여성’이란 어떤 존재였는지를 이야기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수많은 ‘남성-서사’ 영화에서 여성은 (남성의) 뮤즈가 되고 (남성의) 구원이 된다. 이런 영화야 세상에 널리고 널렸지만, 한국영화의 대재앙이라고 할 수 있는 김기덕(그리고 국내외의 수많은 김기덕들)의 영화를 생각해보자, 강간당하는 여성을 클로즈업하면서 (남성을 위한) 모성을 이야기하고 또 역시 강간당하는 여체를 줌인하면서 (오직 남성의) 고통과 (오직 남성을 위한) 구원을 말한다. 또 반대로 (남성의) 번뇌가 되기도 한다. 이렇게 스크린 속에서 한바탕 난장이 끝나고 나면, (남성)평단의 호평 속에 다시 한 번 난장판이 벌어진다. 평론가들과 심사위원들은 인간의 구원이니 모성이니 하는 단어들을 잔뜩 쏟아내지만, 사실 이건 그들이 여성을 동등한 사람으로 보고 있지 않고 오로지 영화적 수단으로만 보아왔다는 자기고백이다. 이런 야만에 좋은 평을 주고 귀한 상을 주는 그 들 또한 여성혐오의 공범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내가 본 <안토니아스 라인>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김기덕류의 자칭 ‘아티스트’들의 고환에 꼬챙이를 박아 넣는 듯 한 쾌감을 주었다. 스스로를 완전한 이성애자 남성으로 정의하는 내게, 젠더구분의 소멸, 즉 ‘여성성’이나 ‘남성성’이라는 단어에서 작은 따옴표 ‘’ 가 제거되는 상황은 이른바 남성성의 경우든 이른바 여성성의 경우든 익숙하지 않다. 특히 영화에서 간혹 보이는 자연과 여성성에 대한 은유적 결합 같은 에코 페미니즘적 은유는 이해는 할 수 있어도 받아들이긴 어려운 것이다. 따옴표에서 벗어난, 젠더로 설명 할 수 없는 이른바 자연적 여성성이라는게 존재한다면, 도대체 ‘자연적 남성성’은 어떻게 정의해야 하는가. (실제 남성의 생물학적 본질과는 무관한 개념인) ‘남성성’의 이름을 가진 가부장적 폭력이 여전히 사회의 중심에서 권력을 휘두르고 있는데, 젠더 개념을 통해 겨우 가둬놓은 ‘남성성’을 다시 따옴표 밖에 풀어두는 건 글쎄, 너무 위험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런가 안토니아의 일가가 보여주는 대안적 삶의 모습을 ‘여성적’ 혹은 ‘모성적’ 가능성으로 해석하고 싶지는 않다. 여성이 되었든 남성이 되었든 장애가 있든 성적지향이 어떻건 간에 사람이라면 마땅히 그렇게 당당히 평등하고 행복하게 자존(自存)하며, 자존들이 만들어낸 다양성과 가능성 위에서 공존 하는 것이다. 바로 안토니아 가족들처럼. 이 영화에서 가장 흥미로운 인물은 크룩핑거였다. “이 세상은 고뇌하는 영혼과 악마로 가득찬 세상” 이라고 말하는 크룩핑거는 전쟁이 만들어낸 참상을 직접 목격한 지식인이다. 그는 절망에 매몰되어 더 이상 어떤 새로운 가능성도 만들어 내지 못한다. 이와 대비되는 인물은 안토니아의 손녀, 테레사이다. 테레사는 새로운 세계에 대한 상상력을 잃어버린 구체제적 지식에 저항하는 새로운 지식을 의미한다. 교수를 쏘아붙이고 강의실을 박차고 나가는 테레사는 어쩌면 구체제에 맞선 68혁명과 그 이후의 새롭게 선언된 (강의실 바깥의)일상세계에서의 담론적 가능성들을 의미하는게 아니었을까. 마초 농부 댄의 일가는 구체제와 가부장적 폭력을 상징한다. 댄과 그의 가족은 크룩핑거와 마찬가지로 구체제를 표상하지만, 크룩핑거의 관념적이고 자폐적인 세계와 다르게, 댄의 세계는 일상세계 그 자체이다. 이런 댄의 세계에서 안토니아의 대안적 세계로 넘어오는 피억압자 디디와 미친 입술은 이런 일상세계의 아래로부터의 변화 가능성을 의미한다. 마침내 댄의 세계는 붕괴한다. 동생이 형을 죽이고 동생은 기르던 소에게 죽는다. 댄의 세계를 붕괴시키는 건 댄의 세계가 가지고 있는 스스로의 모순, 폭력성 그 자체이다. 영화의 주요 메시지 중 하나인 삶과 죽음에 대한 긍정적 은유는 이해는 할 수 있으나 동의 하긴 어렵다. 삼포세대의 인생관은 안토니아나 레타보다는 크룩핑거에 더 가까운 것이리라. 삼포세대의 인생관에서 자유롭다고 할 수 없는 내겐 산다는 것, 혹은 태어나고 낳게 한다는 것이 아름답게 그려지는 것을 마냥 긍정할 순 없다. 임신이나 죽음을 긍정하는 거야 뭐 개인의 취향이라고 생각하지만, 출산을 긍정하는 건 전혀 다른 일이다. 이 폭력적 세상에 ‘낳아짐을 당한’ 아기는 대체 무슨 죄가 있어서 인생 내내 고통 받아야 하는가. 이런 내 미감대로라면, 오로지 이 관점에서만 죽음은 축복일 수 있으며 크룩핑거가 해냈듯 자살이야 말로 ‘생의 의지’라는 자연-DNA의 야만에 맞서는 인간 이성의 증명이자 승리이다. 그러나 크룩핑거 만큼의 용기도 없고 수준 높은 이성도 없는 평범한 우리에겐, 거저 주어진 이 삶을 살아간다는 것, 더 나아가 온전히 스스로 당당히 존재하는 것, 자존(自存)한다는 것은. 더 나은 세상과 더 나은 삶의 양식에 대한 변화의 가능성을 찾아가는 행위이어야 한다. 이는 자존을 완성하는 것이기도 하다. 영화 <안토니아스 라인>은 이 가능성을 부정하지 않는 것, 그 가능성을 믿고 삶에 당당히 맞서는 것이 그 시작이라 말한다. 그리하여, 살아간다는 것, 번성한다는 것은 예술이 되고 그 예술은 의례가 되며 구습을 대체한다. 또한 진리를 증명하는 일이기도 하며, 생 속에서 구원을 찾는 일이다. 자존은 저항이 되고 또한 공존이 되며, 타인을 변화시키고 마침내 세상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것, 혁명에 이르게 된다. 어차피 살아갈 거라면, 마땅히 그들처럼 살아야 하는 것이 아닐까.
석미인
3.5
천국이 있잖아요? 아니 생이 우리들이 추는 유일한 춤이란다. 우린 긴 춤을 추고 있어~ 브로콜리 너마저 1집 보편적인 노래, 첫 번째 트랙, 첫 소절. 모든 가사는 잊어도 이것만은 기억해달라던 덕원씨의 말. 멈추고 싶지 않은 긴 춤을 추고 싶은데 누군가는 마음이 급해 자꾸 발을 밟는다. 그리고 걱정한다 너의 고운 두 발에 멍이 들까 봐. 사람에겐 성별에 관계없이 남성성과 여성성이 공존한다고 생각한다. 여성성과 남성성 이 개념을 어떻게 정의하는 것과 상관없이. 두 다리가 우리를 지탱하고 있는 것처럼. 독무이든, 군무이든 춤은 계속된다. 사려 깊은 스텝을 위해 우리는 두 발을 어떻게 움직여야 할까
머야 고스
5.0
내가 아는 가장 이상적인 혈연가족의 모습. 안토니아가 구축한 관계망은 혈연 이상으로 뻗어나가며 각자가 자기 자신으로 존재해도 괜찮은, 그러면서도 구성원들 서로가 서로를 돌보는 공동체를 만든다. 몇 년 전에 친구가 남자든 냉동정자든 구해서 애를 좀 낳아보라고 했다. 자기는 좋은 엄마가 될 자신은 없지만 좋은 이모는 될 수 있을 것 같다는 게 이유였다. 기가 막혀서. 코웃음을 쳤지만 사실 내 초등학생 때의 꿈은 아이와 강아지와 함께 계단 대신 미끄럼틀이 있는 오 층 짜리 집에서 사는 것이었다. 혼자서는 미끄럼틀은커녕 나 하나 유지할 정도의 체력과 재력과 마음의 여유조차 확보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걸 깨달은 뒤로 꿈을 접었다. 친구의 말이 발단이 되어, 육아공동체를 상상하기 시작했다. 네다섯명이 모여서 같이 애를 기르면 어떨까? 육아가 한 사람의 몫이 아니라면, 노동은 줄어들테고 아이는 여러 종류의 사랑을 경험할 것이다. 역사적으로 수많은 소규모 공동체가 재정과 치정 문제, 여러가지 미묘한 갈등으로 인해 금방 와해되었으며 결코 가벼운 마음으로 또 하나의 생명을 불온한 세상에 내놓아서는 안 된다는 걸 알지만. 뭐 소위 엄마와 아빠와 아이로 구성된 ‘정상가족’이라고 해도 엉망인 경우가 많지 않은가. 또 상상은 해 볼 수 있는 거니까. 우리는 신이 나서 계획을 늘어놓았고 많이 웃었다. 여전히, 간간히, 이 영화를 생각하며 가족을 꾸리는 상상을 한다. 누군가에게 넘치도록 사랑을 줘서 건방지고 철딱서니없고 제멋대로인 행복한 사람으로 키우고 싶다는 소망이 있다. 살면서 어떤 위험에 맞닥뜨려도 근본적으로는 안전하다고 느끼게 해 주고 싶다. 내가 못 그래서 대리만족하고 싶은 건지도 모른다.. 아주 위험한 생각이므로 아마 앞으로도 아이를 가지는 대신 심즈나 하게찌
영화고독발버둥치며본다
4.5
" 완전히 끝나는 건 없단다. 항상 무언가는 남기게 되어 있지. 또 새로운 것이 생겨나기도 하고 그렇게 생명이 시작되지 . 어디서 시작됐는지도 모르고 왜 존재하는지도 모르는 채로... 생명체는 살아가길 원하거든. " . -이 긴 세월동안의 경험으로 결론에 도달 했지만, 그 무엇도 끝나지 않았다. - . . . ps.나는 sns에 사회적 논란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입장을 드러내고 표현하는것에 부정적이지 않다. 다만 논란에 대한 언급을 하기전 적어도 왓챠에서는 영화를 통한 언급임을 반드시 인지하고 있어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 ps.영화, 창작된 작품은 작위의 세계를 뜻한다. 가수 이랑의 노랫말 처럼 결국 영화(창작)를 찍는다는 건, 신의 놀이를 하고 싶은 욕망에서 비롯된 것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그렇게 한 사람의 욕망이 지어낸 작위의 세계에 속아서 몰입하여 바라보는 것일지도 모른다. . ps.그러나 지젝의 말처럼 작위의 세계가 다변한 현실이 은폐하고 있는 진실에 가닿는데 좋은 도구가 될 수 있다. 그렇기에 우리는 영화를 보는데 스트레스해소 차원을 넘어 더 상위의 가치를 발견하려 들고... 가끔 성공하기도 한다.(5점 영화) . ps. 본 영화의 감독은 페미니스트로 유명하고 영화또한 페미니스트의 시선으로 바라본 여성상을 주체적으로 그리고 있다. 그래서 코멘터리또한 페미니스트에 관한 언급이 무척이나 자연스러울수 밖에 없는 영화다. . ps.하지만 나는 본영화가 방점을 찍은건 페미니스트 감독이 바라본 여성의 삶이 아닌, 여성적 인간의 삶을 다룬 페미니스트 감독의 영화라고 말하고 싶다. . ps. 내가 생각하는 여성적 인간이란 오직 여성의 성별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다양한 사회 구성원에 속해있기에 어떤 태도로, 가면을 쓰느냐의 문제이다. 나는 주로 여성적이라 규정지어진 태도로 사회에 구성원이 되어 타인과 교류해왔다는 얘기를 하고 싶다. 지금도 현재진행형이다. . ps. 나를 대변하지 않고 내가 존재하지 않는 페미니스트 영화지만 영화속에서 화자의 심정에 적극적으로 공감하며 바라보게 된다는 점이 매번 의문이었다. 어쩌면 나는 비주류의 삶에서 끝은 어떠한지에 대한 대리 체험 하고 판타지를 꿈꾸기도 하며 때론... 많은 각오를 주입시키는 것에 내 현실을 준비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발버둥 칠 준비를 . ps. 나는 해당영화가 페미니스트영화라는 점만 강조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에 길게 헛소리를 썼다. 페미니스트 감독이 바라본 인생이 성찰을 앞전의 '페미니스트'가 요즘 시대의 주류담론의 이라는 특징 때문에 해당 담론에서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무엇이든 입장을 표명해야만 한다는 강박감 때문에 영화가 진정 다루고자 하는 인생의 성찰을 못보고 지나쳐버리지 않을까 걱정됐다.하지만 영화는 페미냐 아니냐의 논란에서 벗어나 삶의 성찰을 다루고 있는 좋은 영화였다. 더 많은 사람이 봤으면 한다.... 이말을 쓰고 싶어서 길게 쓴다.
퐝도퐝도우
4.0
아직까지도 한국에서 받아들이기 어려운 생각들.. 유럽은 20년전에 영화화 했다니...ㄷㄷ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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