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미인3.5햇빛이 하얗던 여름방학, 땀에 젖은 머리카락이 이마에 붙고 방울토마토 화분은 시들었다. 구름은 느리게 흐르고 몇 밤을 자면 된다는 일들은 영원처럼 아득했지. 불 꺼진 방에서 잠든 척을 하면 무거운 어른들의 이야기가 지쳐 내려앉는걸 알았으면서도 그때의 나는 왜 그렇게 용감했던 걸까.いいね348コメント7
chan4.0전체관람가 등급이 품을 수 있는 잔인함의 극치. . . (스포일러) 윤가은 감독의 카메라는 극중 계절처럼 화창하고 화사하기 이를 데 없고 카메라 안의 인물들은 언제나 순수하고 곱다. 헌데 아이러니하게도, 화창한 세계 속 순수한 인물들이 모인 영화 속엔 탁한 사회가 상존한다. 그리고 그 맑은 화면과 고운 인물들은 되려 사회의 탁함을 반증하는 역할을 부여받는다. 물론 그 자체로 아름답긴 하지만. 감독의 전작인 <우리들>에서, 우리는 어린 아이들의 치기어린 자존심 다툼을 어른의 눈으로 깔보며 시종 귀여운 마음으로만 지켜보다가 후에 어린아이들의 사회의 원리가 곧 자신이 현재 귀속된 사회의 작동원리와 별반 다를 것이 없음을 인지하게 됐으며 영화의 제목이 왜 <아이들>이 아닌 <우리들>이었는지를 절감했다. 그렇게, 감독은 전작을 통해 아이들의 순수한 눈으로 현 사회에 대한 씁쓸한 코멘트를 제시했다. 아이들을 통해 어른들에게 무언가를 시사하려는 듯한 영화의 목적은 이번에도 동일한 듯 보이나 <우리집>의 경우엔 감독의 전작과는 비슷한 듯 조금은 다른 경우처럼 내겐 보인다. 전작에서의 의도가 관객으로 하여금 자신의 과거를 바라보며 그 과거가 비단 과거일 뿐만은 아님을 깨닫게 하는 데 있었다 하면 본 작품에 이르러서 감독은 아이들의 얼굴을 빌린 과거를 통해 관객 저마다의 과거를 다시금 소환해내어 관객 스스로로 하여금 가슴 아픈 본인의 기억의 편린을 회상하도록 하고 있다. 깨끗한 마음 하나만으로는 지켜낼 수 없었던 무언가에 대한 과거, 즉 다시 말해 어쩔 수 없이 어른의 첫 번째 길을 밟아나가야만 했던 성장 아닌 성장의 과거 말이다. 그리고 그렇게 소환된 과거는 지독히도 잔인하다. . 열불이 나도록 다투는 부모의 모습과 부모의 언쟁에 끼어들어 상황을 더욱 혼잡스럽게 하는 오빠의 모습이 아닌 이를 지켜보는 하나의 얼굴만을 보여주는 영화의 첫 숏엔 난잡한 환경 자체가 아니라 그 혼란스러운 환경에 하나가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지켜보리란 영화의 의도가 선명하고 이어지는 하나의 대사엔 영화의 기대에 부응하는 하나의 반응이 또렷하다. 무언가 잘못되어가고 있다는 조짐에 벌벌 떨던 하나는 곧이어 밥을 차려도 되겠냐라고 가족에게 묻는다. 아이는 어떻게든 이 무서운 상황을 그럴듯한 이유로 무마해보려 하지만 돌아오는 어른의 응대는 싸늘할 뿐이다. 하나는 두 가지에 유독 집착한다. 식사와 여행. 관객에 따라서는 이 두 가지에 병적으로 집착하는 하나가 의문스러울뿐더러 식사와 여행이라는, 가족 영화장르 내에서 숱하게 반복되어온 클리셰적인 요소에 다시금 편승하는 영화 자체가 진부할 법도 하다. 영화에 마음을 뺏긴 입장에서 이를 변론해보자면 핵심은 그 클리셰의 상투성에 있다고 말하고 싶다. 하나는 가족이 오붓하게 모여 식사를 하는 것과 함께 여행을 떠나는 그 상투적인 감각에 기대 무너지는 가족을 구하려고 애쓴다. 아이가 생각하는 가족이란 함께 모여 밥을 먹고 여행을 떠나는, 응당 그러해야만 한 것이니까. 아이의 입장에서 가족을 존속시키기 위한 방안이 그 외에 뭐가 더 있겠냐고 물으면 나는 딱히 할 말이 없다. 허나 섭섭하게도 하나의 가족은 하나의 그 소박한 부탁에 응하지 않는다. . 그렇게 본인의 가족이 서서히 와해되어갈 무렵에 하나는 새로운 가족인 유미네 가족을 맞닥뜨린다. 마땅히 있어야 할 보호자가 부재한 유미의 가정에서, 하나는 몸소 그 역할을 자처하며 이들을 돌본다. 그리고 마침내 하나는 유미네 가족에서 자신이 그토록 원하던 식사를 하게 된다. 후의 장면에서, 오직 가족에게만 허락된 것이란 푯말까지 붙어져 있는 옥상 위의 토마토를 하나가 먹도록 유진이 허락했다는 것은 사실상 이들은 유사 가족이 된 것이라 봐도 무방하다는 셈이다. 그리고 이어지는 그들의 옥상 위 물장난에서, 그들이 아닌 토마토 화분을 포커싱하는 영화의 촬영은 그들이 비로소 하나로 엮인 토마토 나무처럼 한 가족이 된 것이라고 명확히 선언한다. (*밥을 먼저 먹었는지 옥상 위의 장면이 먼저였는지 선후관계가 확실히 기억이 잘 안 나네요ㅜ) . 하지만 야속하게도 하나가 들어간 새로운 가정 역시 붕괴되기 직전의 상황에 몰려있다. 이 두 가정의 붕괴위기 속에서, 하나는 양쪽 모두를 지켜내기 위해 이리저리 발길을 분주하게 오가지만 그 분주한 발길은 한낱 객기에 지나지 않을 뿐이고, 더 큰 문제는 두 가정 중 하나에게 우선시 되는 본인의 원래 가정으로인해 자연스레 유미네 가정과 멀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거두절미하고 말하자면 하나가 할 수 있는 건 가정의 붕괴를 지연시키는 것 정도를 제외하면 아무것도 없다. 하나의 순수한 마음은 부모의 돌아선 마음을 바로잡을 수 없고 유미네의 강제적인 이사 또한 저지할 수가 없다. 오로지 하나에게 허락된 것은 예정된 수순인 두 가정과의 이별뿐인 것이다. . 이런 일련의 비극 속에서 영화에 감탄할만한 지점은 영화가 하나 이외의 인물을 다루는 방식과 당도할 수밖에 없는 비극을 다루는 태도의 측면이다. 하나의 부모가 야밤에 서로 심하게 다투는 대목에서, 방문을 열고 몸만 슬쩍 내밀고 있는 하나와 달리 그의 오빠는 울분을 토해내며 부모에게 강하게 일갈한다. 그전까지 아무런 생각 없이 사는 줄로만 보였던 사춘기 소년 오빠의 억눌려있던 마음을 보는 순간 우리는 하나의 세계가 있으면 당연히 하나의 오빠에 해당되는 세계도 있다는 당연한 사실을 자각하게 된다. 이를테면 유미가 본인의 가슴 시린 가정사를 차분히 토로하는 장면도 마찬가지의 예시다. <우리 집>의 세계는 철저히 하나의 세계이지만 영화의 비극은 오로지 하나의 것만이 아니며 극중 인물들 모두가 저마다의 세계에서 저마다의 고통을 쓸쓸히 앓고 있는 중이라고 영화는 말한다. . 사실 여러 인물의 감정을 다루는 방식이 단연 돋보인다는 건 인물의 심리를 세밀히 포착해내는 윤가은 감독의 연출력, 더 자세하게 말하자면 감독의 연기 디렉팅의 성과로 봐도 무방하다. 윤가은 감독의 세계에서의 심리묘사가 훌륭하게 느껴지는 지점은 그 세밀하고도 여린 어린아이들의 감정들이 죄다 어른들의 세계에서의 감정들로 번안이 가능하다는 점이다. 가령 유미가 하나의 집에 방문한 이후에 하나의 집을 은근히 부러워하는 대목에서, 하나는 본인 집의 단점들과 유미네 집의 장점들을 동시에 열거하며 그 무안한 감정에서 탈피하려 애쓴다. 우연찮게 본인이 상대방보다 어딘가 우등해져 있는 지점을 상대방이 꼬집어 지적하며 자신의 신세를 한탄할 때 느껴지는 그 이유모를 무안한 감정들. 괜시리 느껴지는 미안함. 그 감정들에서 벗어나오기 위해 자신을 깎아내리고 상대를 칭찬하는 행위. 비단 아이들의 세계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마도 아닐 테다. 극중 제일 어린 나이로 등장하는 유진 캐릭터를 활용하는 솜씨 역시 윤가은 감독의 뛰어난 연출력을 방증하는 사례다. 유진은 특유의 귀여운 유머로 극에 활기를 불어넣는 캐릭터이긴 하지만 단순히 그런 일회적인 방식으로 소비되는 캐릭터가 아니다. 전작 <우리들>에서 주인공의 동생 역인 윤이가 그랬던 것처럼. 극의 후반부에, 하나가 유미 유진과 바다로 가는 대목에서 하나와 유미는 마치 <우리들>의 자존심 싸움을 연상시키는 다툼을 벌인다. 그럴 때마다 이들을 저지하는 건 다름 아닌 유진이다. 하나와 유진의 언쟁이 서서히 고조되는 대목에서, 영화는 하나에게 샌드위치를 다소곳이 건네는 유진의 똘망하고도 무구한 얼굴을 보여준다. 그토록 순수로 가득한 유진의 얼굴을 보는 순간, 하나는 열분을 삭히며 무의미한 언쟁을 일시 중단한다. 잠시 중단됐던 다툼이 재차 시작되었다 다시금 중단되는 대목도 유진이 하나와 유미에게 “어 바다다.”라고 외치는 순간이다. 감독의 전작을 본 관객이라면 잊을 수 없는 한 대사가 있다. 친구에게 당한 건 무조건 갚아 줘야만 한다는 누나의 말에 천진무구한 얼굴로 “그러면 언제 놀아?” 라고 받아치는 동생 윤이의 대사. 저마다 타당한 이유가 있는 건 알겠지만 그렇다고 서로 얼굴을 맞대며 싸워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냐고 감독은 두 작품 모두에서 어린아이의 무구한 얼굴을 빌려 말한다. <우리들>의 연장선상에 있는 감정선이자 동시에 이 역시 어른들의 세계에 충분히 통용될 법한 것들이다. . <우리 집>에서 그 무엇보다도 보는 이의 가슴을 울컥하게 만드는 건 불온한 세상에 던져진 맑은 아이들을 바라보는 사려 깊은 마음이다. 돌려서 말하면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비극을 대하는 영화의 태도다. <우리 집>은 영화라는 힘을 빌려 손쉬운 희망을 선물하지 않는다. 되려 어쩔 수 없는 현실의 한계를 무덤덤하게 강조할 뿐이다. 아마도 하나는 두 번 다시 부모님과 오빠와 합석하여 밥을 먹지 못할 것이고, 또한 가족 여행이라는 말은 머지않아 하나에게 그저 몇몇 친구들이 하는 복에 겨운 소리 정도로 자리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언급조차 하기 싫어질 정도로 가장 가슴 아픈 대목이지만 굳이 말해본다면 하나는 앞으로 유미와 유진이를 보지 못할 확률이 크다. 영영토록. 앞으로도 언니가 되어 달라며 가족됨을 부탁하는 유미의 말을 곧 작별인사와 다르지 않게 받아들인 이는 비단 나뿐만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영화는 현실의 한계를 곧이곧대로 정직히 수용하되 아이들의 고생을 헛수고로 치부하지는 않는다. 다들 눈치 챌 수 있도록 영화가 직접적으로 명시하는 부분인데, 하나가 유미 유진과 그들의 부모님을 뵈러 가는 긴 시퀀스는 사실상의 가족여행이라 봐도 과언이 아니다. 가는 길은 험난하고 심지어 원래의 목적지엔 도착조차 하지 못했지만, 어찌됐든 하나는 그토록 가고 싶던 바다에 갔다. 이어서 등장하는 야영 도구만을 남기고 급하게 자리를 떠나는 신혼부부는, 짐작컨대 그 하룻밤만이라도 아이들이 맘껏 즐기기를 소망하는 감독 본인의 마음이 투영된, 우연이라는 이름을 빌린 소소한 기적과 다르지 아니할 것이다. 물론, 이어지는 장면들은 앞서 언급한대로의 장면들, 즉 현실의 무게를 잔인할 만큼 부각하는 장면들이다. 하지만 영화의 엔딩은 그토록 하나가 원했던 소원을 성취하도록 돕는다. 비로소, 하나의 가족은 모두 모여 식사자리를 가진다. 물론 그 식탁엔 일반적인 가정이면 으레 있어야 할 온기는 없다. 그리고 짐작컨대 아마 그 식탁은 가족의 마지막 식사자리가 될 것이다. 하지만 하나의 이런 우여곡절이 없었다면 하나네 가족은 마지막 식사조차 하지 못한 채로 와해되었을지도 모른다. 결국 하나는 여행을 떠났고 가족과 식사를 나누었다. 이렇게 좋게만 단정 짓기엔 영 미심쩍은 부분들이 많고, 무엇보다도 하나는 이 말로 위로받을 수 없을 만큼 많이 다쳤지만, 우선은 이렇게 좋게 생각하고 넘겨야 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그 이면을 자세히 따지자면 너무나 가슴 아픈 과정이 될 테니. 우리에게 우선적으로 필요한 것이자 우리가 할 수 있는 최대는 아마도 가슴 시린 성장의 길을 밟아나간 하나에 대한 묵묵한 응원, 그리고 또다시 홀로 남겨진 유미 유진에 대한 진실어린 염려가 아닐까. . https://m.blog.naver.com/PostView.nhn?blogId=hc24851&logNo=221629128337&navType=tlいいね342コメント5
양기연5.0내가 이 영화에 준 점수는 나와 이 영화 사이의 거리를 잰 점수일 것이다. . (스포일러) . 초등학생 때 내 꿈은 소설가였다. 그리고 내 첫 소설의 소재는 무조건 '우리집'이어야 했다. 그 즈음 누군가가 글로도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식의 말를 했던 걸 들었고, 나는 내 글로 우리집을 고치고 싶었다. 그 글을 끝내 완성시킬 수는 없었지만 결말만은 미리 정해놓고 있었다. 무조건 우리집 네 식구가 한 식탁에 앉아 함께 밥을 먹는 장면으로 끝나야만 했다. . 윤가은의 전작 <우리들>에 비해 이번 작품은 작품 자체로만 놓고 보았을 때 퍽 성긴 면들이 있다. 대표적인 예로 보리해변을 찾아 나선 여정이나 그 끝에 또 다른 '우리집'에 이르는 부분은, 전작의 섬세한 디테일이나 자연스러운 전개를 떠올려 볼 때 주제를 강조하려는 욕심에 시퀀스 자체가 툭 불거져 있는 느낌이 든다. . 그러나 어떤 단점이 있든 난 이 작품에 냉정할 수가 없다. 왜 그토록 하나가 가족 여행과 가족이 함께 앉은 밥상에 집착했는지, 우리집 모형을 쌓아올리는 그 작은 행위가 왜 그렇게 큰 의미인지 너무 잘 알고 있으니까. 내가 무언가 열심히 노력하면 우리집을 바꿀 수 있으리라는 그 순수한 믿음의 순간도, 어린 꼬마의 발버둥으론 아무 것도 변하지 않고 당장 내 앞가림조차 버거움을 깨닫는 그 차가운 현실 인식의 순간도 익히 겪어 봤으니까. . 어린 시절의 그 기억들은 차츰 무뎌지고, 나이가 먹어가면서 가족들과 다 같이 성인의 입장에서 술잔을 수 번 나누며 그때의 기억들도 어느 정도는 웃으며 말할 수 있게 되었지만, 적어도 그 시절의 나에겐 설핏 잠이 깨었을 때 귓전을 때리던 그 아주 작은 소리들조차 우레와 같았고, 그 시절 겪은 그 모든 곡절들이 모두 내 작은 세상을 뒤흔들고 부수는 경험들이었다. 나는 아무래도 내 가정을 꾸릴 만한 용기는 평생 가질 수 없을 것 같아. 나는 내 자식들의 세상을 안온하게 지켜줄 만한 사람은 영 아닌 것 같아. 그리고 그 세상을 번번이 내 손으로 무너뜨리는 걸 감내하는 건 할 짓이 아닌 것 같아. 설사 그 애가 커서 그 모든 상황들을 당연하게 받아들일 때가 온다 하더라도 이미 아이의 세상은 몇 번이고 부서진 뒤일 텐데. 수 번이고 내게 되뇌이게 되는 말들이다. . 이 영화에 주는 만점은 영화 자체의 질을 따져 주는 점수가 아니라 그저 이 영화가 내게 얼마나 가까이 다가왔는지 그 거리를 잰 점수일 것이다. 유미가 하나에게 "언니는 계속 우리언니 해 줄 거지?"라고 물을 때, 그들의 세상에 하나가 얼마만큼 가까이 다가왔는지 그 거리를 재어 '우리언니'라 표현한 것처럼. 우리집도 참 이사를 자주 다녔는데, 하필이면 하나, 유미, 유진이 같이 분식을 먹던 어뎅맛뎅도, 그들이 수 번 지나던 세검정초등학교 앞 육교도 다 우리집이 거쳤던 동네 근처 풍경들이다. 심지어 내 여동생 이름도 하나. 이 영화 속 하나는 내 동생 하나가 졸업한 그 초등학교를 다닐지도 모른다. 텐트 안에 나란히 누웠던 그들처럼 이 영화랑 나도 수 년의 생 동안 나란히 누워 있었던 것만 같다. . 정말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데 억지로 미소를 지어 보이며 가족들에게 같이 밥을 먹자고 말하는 하나의 얼굴로 영화가 끝나고, 그들이 밥을 먹는 소리가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는 동안 울려 퍼진다. 어린 시절 내가 우리집을 고치기 위해 쓰고 싶었던 그 이야기의 결말과 꼭 닮은 그 엔딩이 정말 견디기 힘들만큼 슬펐다. 차라리 밤에 영화를 봤어야 했다. 아직 밖은 너무 밝고 시뻘겋게 충혈된 채로 부은 눈은 너무 창피하다.いいね204コメント14
문성식3.0장편영화 두 편으로 독보적인 팬층을 만드는 능력. 인디영화계의 보물같은 존재가 나올 때 마다 한국에 좋은 영화가 상영 중이라고 가까운 사람에게 얘기해 줄 수 있는 행복.いいね203コメント0
최성찬
4.5
윤가은 감독님 두번째 여름방학 감독님 우리 일기장 또 훔쳐봤네ㅋㅋㅋ
이동진 평론가
3.5
슬픈 이야기인데도 결국 근심을 거두고 응원을 보태게 된다.
석미인
3.5
햇빛이 하얗던 여름방학, 땀에 젖은 머리카락이 이마에 붙고 방울토마토 화분은 시들었다. 구름은 느리게 흐르고 몇 밤을 자면 된다는 일들은 영원처럼 아득했지. 불 꺼진 방에서 잠든 척을 하면 무거운 어른들의 이야기가 지쳐 내려앉는걸 알았으면서도 그때의 나는 왜 그렇게 용감했던 걸까.
chan
4.0
전체관람가 등급이 품을 수 있는 잔인함의 극치. . . (스포일러) 윤가은 감독의 카메라는 극중 계절처럼 화창하고 화사하기 이를 데 없고 카메라 안의 인물들은 언제나 순수하고 곱다. 헌데 아이러니하게도, 화창한 세계 속 순수한 인물들이 모인 영화 속엔 탁한 사회가 상존한다. 그리고 그 맑은 화면과 고운 인물들은 되려 사회의 탁함을 반증하는 역할을 부여받는다. 물론 그 자체로 아름답긴 하지만. 감독의 전작인 <우리들>에서, 우리는 어린 아이들의 치기어린 자존심 다툼을 어른의 눈으로 깔보며 시종 귀여운 마음으로만 지켜보다가 후에 어린아이들의 사회의 원리가 곧 자신이 현재 귀속된 사회의 작동원리와 별반 다를 것이 없음을 인지하게 됐으며 영화의 제목이 왜 <아이들>이 아닌 <우리들>이었는지를 절감했다. 그렇게, 감독은 전작을 통해 아이들의 순수한 눈으로 현 사회에 대한 씁쓸한 코멘트를 제시했다. 아이들을 통해 어른들에게 무언가를 시사하려는 듯한 영화의 목적은 이번에도 동일한 듯 보이나 <우리집>의 경우엔 감독의 전작과는 비슷한 듯 조금은 다른 경우처럼 내겐 보인다. 전작에서의 의도가 관객으로 하여금 자신의 과거를 바라보며 그 과거가 비단 과거일 뿐만은 아님을 깨닫게 하는 데 있었다 하면 본 작품에 이르러서 감독은 아이들의 얼굴을 빌린 과거를 통해 관객 저마다의 과거를 다시금 소환해내어 관객 스스로로 하여금 가슴 아픈 본인의 기억의 편린을 회상하도록 하고 있다. 깨끗한 마음 하나만으로는 지켜낼 수 없었던 무언가에 대한 과거, 즉 다시 말해 어쩔 수 없이 어른의 첫 번째 길을 밟아나가야만 했던 성장 아닌 성장의 과거 말이다. 그리고 그렇게 소환된 과거는 지독히도 잔인하다. . 열불이 나도록 다투는 부모의 모습과 부모의 언쟁에 끼어들어 상황을 더욱 혼잡스럽게 하는 오빠의 모습이 아닌 이를 지켜보는 하나의 얼굴만을 보여주는 영화의 첫 숏엔 난잡한 환경 자체가 아니라 그 혼란스러운 환경에 하나가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지켜보리란 영화의 의도가 선명하고 이어지는 하나의 대사엔 영화의 기대에 부응하는 하나의 반응이 또렷하다. 무언가 잘못되어가고 있다는 조짐에 벌벌 떨던 하나는 곧이어 밥을 차려도 되겠냐라고 가족에게 묻는다. 아이는 어떻게든 이 무서운 상황을 그럴듯한 이유로 무마해보려 하지만 돌아오는 어른의 응대는 싸늘할 뿐이다. 하나는 두 가지에 유독 집착한다. 식사와 여행. 관객에 따라서는 이 두 가지에 병적으로 집착하는 하나가 의문스러울뿐더러 식사와 여행이라는, 가족 영화장르 내에서 숱하게 반복되어온 클리셰적인 요소에 다시금 편승하는 영화 자체가 진부할 법도 하다. 영화에 마음을 뺏긴 입장에서 이를 변론해보자면 핵심은 그 클리셰의 상투성에 있다고 말하고 싶다. 하나는 가족이 오붓하게 모여 식사를 하는 것과 함께 여행을 떠나는 그 상투적인 감각에 기대 무너지는 가족을 구하려고 애쓴다. 아이가 생각하는 가족이란 함께 모여 밥을 먹고 여행을 떠나는, 응당 그러해야만 한 것이니까. 아이의 입장에서 가족을 존속시키기 위한 방안이 그 외에 뭐가 더 있겠냐고 물으면 나는 딱히 할 말이 없다. 허나 섭섭하게도 하나의 가족은 하나의 그 소박한 부탁에 응하지 않는다. . 그렇게 본인의 가족이 서서히 와해되어갈 무렵에 하나는 새로운 가족인 유미네 가족을 맞닥뜨린다. 마땅히 있어야 할 보호자가 부재한 유미의 가정에서, 하나는 몸소 그 역할을 자처하며 이들을 돌본다. 그리고 마침내 하나는 유미네 가족에서 자신이 그토록 원하던 식사를 하게 된다. 후의 장면에서, 오직 가족에게만 허락된 것이란 푯말까지 붙어져 있는 옥상 위의 토마토를 하나가 먹도록 유진이 허락했다는 것은 사실상 이들은 유사 가족이 된 것이라 봐도 무방하다는 셈이다. 그리고 이어지는 그들의 옥상 위 물장난에서, 그들이 아닌 토마토 화분을 포커싱하는 영화의 촬영은 그들이 비로소 하나로 엮인 토마토 나무처럼 한 가족이 된 것이라고 명확히 선언한다. (*밥을 먼저 먹었는지 옥상 위의 장면이 먼저였는지 선후관계가 확실히 기억이 잘 안 나네요ㅜ) . 하지만 야속하게도 하나가 들어간 새로운 가정 역시 붕괴되기 직전의 상황에 몰려있다. 이 두 가정의 붕괴위기 속에서, 하나는 양쪽 모두를 지켜내기 위해 이리저리 발길을 분주하게 오가지만 그 분주한 발길은 한낱 객기에 지나지 않을 뿐이고, 더 큰 문제는 두 가정 중 하나에게 우선시 되는 본인의 원래 가정으로인해 자연스레 유미네 가정과 멀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거두절미하고 말하자면 하나가 할 수 있는 건 가정의 붕괴를 지연시키는 것 정도를 제외하면 아무것도 없다. 하나의 순수한 마음은 부모의 돌아선 마음을 바로잡을 수 없고 유미네의 강제적인 이사 또한 저지할 수가 없다. 오로지 하나에게 허락된 것은 예정된 수순인 두 가정과의 이별뿐인 것이다. . 이런 일련의 비극 속에서 영화에 감탄할만한 지점은 영화가 하나 이외의 인물을 다루는 방식과 당도할 수밖에 없는 비극을 다루는 태도의 측면이다. 하나의 부모가 야밤에 서로 심하게 다투는 대목에서, 방문을 열고 몸만 슬쩍 내밀고 있는 하나와 달리 그의 오빠는 울분을 토해내며 부모에게 강하게 일갈한다. 그전까지 아무런 생각 없이 사는 줄로만 보였던 사춘기 소년 오빠의 억눌려있던 마음을 보는 순간 우리는 하나의 세계가 있으면 당연히 하나의 오빠에 해당되는 세계도 있다는 당연한 사실을 자각하게 된다. 이를테면 유미가 본인의 가슴 시린 가정사를 차분히 토로하는 장면도 마찬가지의 예시다. <우리 집>의 세계는 철저히 하나의 세계이지만 영화의 비극은 오로지 하나의 것만이 아니며 극중 인물들 모두가 저마다의 세계에서 저마다의 고통을 쓸쓸히 앓고 있는 중이라고 영화는 말한다. . 사실 여러 인물의 감정을 다루는 방식이 단연 돋보인다는 건 인물의 심리를 세밀히 포착해내는 윤가은 감독의 연출력, 더 자세하게 말하자면 감독의 연기 디렉팅의 성과로 봐도 무방하다. 윤가은 감독의 세계에서의 심리묘사가 훌륭하게 느껴지는 지점은 그 세밀하고도 여린 어린아이들의 감정들이 죄다 어른들의 세계에서의 감정들로 번안이 가능하다는 점이다. 가령 유미가 하나의 집에 방문한 이후에 하나의 집을 은근히 부러워하는 대목에서, 하나는 본인 집의 단점들과 유미네 집의 장점들을 동시에 열거하며 그 무안한 감정에서 탈피하려 애쓴다. 우연찮게 본인이 상대방보다 어딘가 우등해져 있는 지점을 상대방이 꼬집어 지적하며 자신의 신세를 한탄할 때 느껴지는 그 이유모를 무안한 감정들. 괜시리 느껴지는 미안함. 그 감정들에서 벗어나오기 위해 자신을 깎아내리고 상대를 칭찬하는 행위. 비단 아이들의 세계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마도 아닐 테다. 극중 제일 어린 나이로 등장하는 유진 캐릭터를 활용하는 솜씨 역시 윤가은 감독의 뛰어난 연출력을 방증하는 사례다. 유진은 특유의 귀여운 유머로 극에 활기를 불어넣는 캐릭터이긴 하지만 단순히 그런 일회적인 방식으로 소비되는 캐릭터가 아니다. 전작 <우리들>에서 주인공의 동생 역인 윤이가 그랬던 것처럼. 극의 후반부에, 하나가 유미 유진과 바다로 가는 대목에서 하나와 유미는 마치 <우리들>의 자존심 싸움을 연상시키는 다툼을 벌인다. 그럴 때마다 이들을 저지하는 건 다름 아닌 유진이다. 하나와 유진의 언쟁이 서서히 고조되는 대목에서, 영화는 하나에게 샌드위치를 다소곳이 건네는 유진의 똘망하고도 무구한 얼굴을 보여준다. 그토록 순수로 가득한 유진의 얼굴을 보는 순간, 하나는 열분을 삭히며 무의미한 언쟁을 일시 중단한다. 잠시 중단됐던 다툼이 재차 시작되었다 다시금 중단되는 대목도 유진이 하나와 유미에게 “어 바다다.”라고 외치는 순간이다. 감독의 전작을 본 관객이라면 잊을 수 없는 한 대사가 있다. 친구에게 당한 건 무조건 갚아 줘야만 한다는 누나의 말에 천진무구한 얼굴로 “그러면 언제 놀아?” 라고 받아치는 동생 윤이의 대사. 저마다 타당한 이유가 있는 건 알겠지만 그렇다고 서로 얼굴을 맞대며 싸워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냐고 감독은 두 작품 모두에서 어린아이의 무구한 얼굴을 빌려 말한다. <우리들>의 연장선상에 있는 감정선이자 동시에 이 역시 어른들의 세계에 충분히 통용될 법한 것들이다. . <우리 집>에서 그 무엇보다도 보는 이의 가슴을 울컥하게 만드는 건 불온한 세상에 던져진 맑은 아이들을 바라보는 사려 깊은 마음이다. 돌려서 말하면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비극을 대하는 영화의 태도다. <우리 집>은 영화라는 힘을 빌려 손쉬운 희망을 선물하지 않는다. 되려 어쩔 수 없는 현실의 한계를 무덤덤하게 강조할 뿐이다. 아마도 하나는 두 번 다시 부모님과 오빠와 합석하여 밥을 먹지 못할 것이고, 또한 가족 여행이라는 말은 머지않아 하나에게 그저 몇몇 친구들이 하는 복에 겨운 소리 정도로 자리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언급조차 하기 싫어질 정도로 가장 가슴 아픈 대목이지만 굳이 말해본다면 하나는 앞으로 유미와 유진이를 보지 못할 확률이 크다. 영영토록. 앞으로도 언니가 되어 달라며 가족됨을 부탁하는 유미의 말을 곧 작별인사와 다르지 않게 받아들인 이는 비단 나뿐만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영화는 현실의 한계를 곧이곧대로 정직히 수용하되 아이들의 고생을 헛수고로 치부하지는 않는다. 다들 눈치 챌 수 있도록 영화가 직접적으로 명시하는 부분인데, 하나가 유미 유진과 그들의 부모님을 뵈러 가는 긴 시퀀스는 사실상의 가족여행이라 봐도 과언이 아니다. 가는 길은 험난하고 심지어 원래의 목적지엔 도착조차 하지 못했지만, 어찌됐든 하나는 그토록 가고 싶던 바다에 갔다. 이어서 등장하는 야영 도구만을 남기고 급하게 자리를 떠나는 신혼부부는, 짐작컨대 그 하룻밤만이라도 아이들이 맘껏 즐기기를 소망하는 감독 본인의 마음이 투영된, 우연이라는 이름을 빌린 소소한 기적과 다르지 아니할 것이다. 물론, 이어지는 장면들은 앞서 언급한대로의 장면들, 즉 현실의 무게를 잔인할 만큼 부각하는 장면들이다. 하지만 영화의 엔딩은 그토록 하나가 원했던 소원을 성취하도록 돕는다. 비로소, 하나의 가족은 모두 모여 식사자리를 가진다. 물론 그 식탁엔 일반적인 가정이면 으레 있어야 할 온기는 없다. 그리고 짐작컨대 아마 그 식탁은 가족의 마지막 식사자리가 될 것이다. 하지만 하나의 이런 우여곡절이 없었다면 하나네 가족은 마지막 식사조차 하지 못한 채로 와해되었을지도 모른다. 결국 하나는 여행을 떠났고 가족과 식사를 나누었다. 이렇게 좋게만 단정 짓기엔 영 미심쩍은 부분들이 많고, 무엇보다도 하나는 이 말로 위로받을 수 없을 만큼 많이 다쳤지만, 우선은 이렇게 좋게 생각하고 넘겨야 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그 이면을 자세히 따지자면 너무나 가슴 아픈 과정이 될 테니. 우리에게 우선적으로 필요한 것이자 우리가 할 수 있는 최대는 아마도 가슴 시린 성장의 길을 밟아나간 하나에 대한 묵묵한 응원, 그리고 또다시 홀로 남겨진 유미 유진에 대한 진실어린 염려가 아닐까. . https://m.blog.naver.com/PostView.nhn?blogId=hc24851&logNo=221629128337&navType=tl
황재윤
3.5
윤가은 감독의 '우리' 시리즈가 앞으로도 계속 나와주었으면.
양기연
5.0
내가 이 영화에 준 점수는 나와 이 영화 사이의 거리를 잰 점수일 것이다. . (스포일러) . 초등학생 때 내 꿈은 소설가였다. 그리고 내 첫 소설의 소재는 무조건 '우리집'이어야 했다. 그 즈음 누군가가 글로도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식의 말를 했던 걸 들었고, 나는 내 글로 우리집을 고치고 싶었다. 그 글을 끝내 완성시킬 수는 없었지만 결말만은 미리 정해놓고 있었다. 무조건 우리집 네 식구가 한 식탁에 앉아 함께 밥을 먹는 장면으로 끝나야만 했다. . 윤가은의 전작 <우리들>에 비해 이번 작품은 작품 자체로만 놓고 보았을 때 퍽 성긴 면들이 있다. 대표적인 예로 보리해변을 찾아 나선 여정이나 그 끝에 또 다른 '우리집'에 이르는 부분은, 전작의 섬세한 디테일이나 자연스러운 전개를 떠올려 볼 때 주제를 강조하려는 욕심에 시퀀스 자체가 툭 불거져 있는 느낌이 든다. . 그러나 어떤 단점이 있든 난 이 작품에 냉정할 수가 없다. 왜 그토록 하나가 가족 여행과 가족이 함께 앉은 밥상에 집착했는지, 우리집 모형을 쌓아올리는 그 작은 행위가 왜 그렇게 큰 의미인지 너무 잘 알고 있으니까. 내가 무언가 열심히 노력하면 우리집을 바꿀 수 있으리라는 그 순수한 믿음의 순간도, 어린 꼬마의 발버둥으론 아무 것도 변하지 않고 당장 내 앞가림조차 버거움을 깨닫는 그 차가운 현실 인식의 순간도 익히 겪어 봤으니까. . 어린 시절의 그 기억들은 차츰 무뎌지고, 나이가 먹어가면서 가족들과 다 같이 성인의 입장에서 술잔을 수 번 나누며 그때의 기억들도 어느 정도는 웃으며 말할 수 있게 되었지만, 적어도 그 시절의 나에겐 설핏 잠이 깨었을 때 귓전을 때리던 그 아주 작은 소리들조차 우레와 같았고, 그 시절 겪은 그 모든 곡절들이 모두 내 작은 세상을 뒤흔들고 부수는 경험들이었다. 나는 아무래도 내 가정을 꾸릴 만한 용기는 평생 가질 수 없을 것 같아. 나는 내 자식들의 세상을 안온하게 지켜줄 만한 사람은 영 아닌 것 같아. 그리고 그 세상을 번번이 내 손으로 무너뜨리는 걸 감내하는 건 할 짓이 아닌 것 같아. 설사 그 애가 커서 그 모든 상황들을 당연하게 받아들일 때가 온다 하더라도 이미 아이의 세상은 몇 번이고 부서진 뒤일 텐데. 수 번이고 내게 되뇌이게 되는 말들이다. . 이 영화에 주는 만점은 영화 자체의 질을 따져 주는 점수가 아니라 그저 이 영화가 내게 얼마나 가까이 다가왔는지 그 거리를 잰 점수일 것이다. 유미가 하나에게 "언니는 계속 우리언니 해 줄 거지?"라고 물을 때, 그들의 세상에 하나가 얼마만큼 가까이 다가왔는지 그 거리를 재어 '우리언니'라 표현한 것처럼. 우리집도 참 이사를 자주 다녔는데, 하필이면 하나, 유미, 유진이 같이 분식을 먹던 어뎅맛뎅도, 그들이 수 번 지나던 세검정초등학교 앞 육교도 다 우리집이 거쳤던 동네 근처 풍경들이다. 심지어 내 여동생 이름도 하나. 이 영화 속 하나는 내 동생 하나가 졸업한 그 초등학교를 다닐지도 모른다. 텐트 안에 나란히 누웠던 그들처럼 이 영화랑 나도 수 년의 생 동안 나란히 누워 있었던 것만 같다. . 정말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데 억지로 미소를 지어 보이며 가족들에게 같이 밥을 먹자고 말하는 하나의 얼굴로 영화가 끝나고, 그들이 밥을 먹는 소리가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는 동안 울려 퍼진다. 어린 시절 내가 우리집을 고치기 위해 쓰고 싶었던 그 이야기의 결말과 꼭 닮은 그 엔딩이 정말 견디기 힘들만큼 슬펐다. 차라리 밤에 영화를 봤어야 했다. 아직 밖은 너무 밝고 시뻘겋게 충혈된 채로 부은 눈은 너무 창피하다.
문성식
3.0
장편영화 두 편으로 독보적인 팬층을 만드는 능력. 인디영화계의 보물같은 존재가 나올 때 마다 한국에 좋은 영화가 상영 중이라고 가까운 사람에게 얘기해 줄 수 있는 행복.
HGW XX/7
4.0
ネタバレがあります!!
さらに多くのコメントを見るには、ログインしてくださ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