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ilm fantasia2.0함께 벗어나고 싶었는데 자꾸만 나락으로... 구질구질 매달리는 것도 다 좋아해서 그러는 거니까. 눈앞에 아른거리는 걸 좀 따라가보는게 큰 잘못은 아니잖아いいね2コメント0
견씨네2.5맨 처음에 나는 이 영화의 믹싱이 잘못되었거나, 혹은 붐마이크를 사용하지 않은 줄 알았다. 왜냐하면 배경음에 인물들의 목소리가 자꾸만 묻혔기 때문이다. 그러다 시점숏인 줄 알았던 카메라가 갑자기 후행해 오버 숄더 숏으로 전환되는 샷들의 반복을 보면서 어쩌면 이 모든 것들이 인물이 공간 속에서 자리를 잡을 수 없는 것을 보여주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이 영화를 보면서 의구심이 들었던 것은 두 개였다. 하나는 인물의 주체적 해방을 표상하는 춤 숏들이 상반된 분위기의 잔잔한 씬에 편입되어 있다는 점이었고, 다른 하나는 맨 마지막 시원만의 공간인 긴 터널에서의 춤이 해방이 아닌 고립처럼 보이고, 그것을 긍정함으로써 시원이 앞으로 빠져나올 수 없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드는 것이었다. 이 영화는 주인공 시원이 못다한 것을 영화의 바깥에서 현실화해주고 있다. 그러니 시원은 영화라는 텍스트 안에서 실패한 인물이고, 감독은 영화 바깥이라는 초텍스트에서 성공한 인물이다. 하지만 과연 그것이 진짜 성공이라 할 수 있을까? 감독이 한 말을 빌리자면 이 영화는 숨구멍이 많고 해체되어 있다. 왜냐하면 영화에 구멍을 내지 않고 해체하지 않으면 그토록 원하는 감독의 이상을 표상으로 제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텍스트(영화)에서 해결하지 못한 것을 초텍스트(현실)적으로 해결했다는 이런 결과는 보통 텍스트 외부에서 이루지 못한 것을 텍스트의 내부를 이상화하는 관습적인 방식과 정반대의 방식이다. 영화의 생소함은 이런 관습의 전복에서 온다. 나는 이 선택이 결과론적으로 무엇인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영화의 카메라는 롱테이크를 고수하는 부분에서 어떤 고고학적인 느낌이 있다. 끝까지 보는 것을 지속하려는, 인물의 깊이를 포착해내려는 끈질김이 있다. 인물은 끝내 혼자만의 길을 택하고 외부와 타협하지 않는다. 인물은 자신의 세계를 고수하다 실패하는 것을 반복하다 결국은 자신만의 세계로 돌아간다. 이것이 창작자로서의 아이덴티티를 고수했다는 긍정적 결말일수도 있겠지만 그것을 '홀가분하고 아름답게 보이게 하려는' 초텍스트적인 감독의 욕망이 너무 노골적이다. 그래서 텍스트 속 시원이라는 캐릭터는 결국 외부의 전지전능한 감독이란 구원의 손길을 받지 않으면 그저 고립될 수밖에 없는 인물처럼 느껴지게 한다. 그 욕망에는 박수를 쳐줄 수 있지만 역설적이게도 그 욕망의 이면에는 퇴행감이 있다. 슬로우 시네마의 현장감은 그 의도(인물의 개성을 구원하는 것)와 달리 불가능의 감각을 피부에 와닿게 한다. 그래서 이 영화는 지치기가 쉬운 영화다. 이 영화는 한순간 힘을 내게 하는 도피처도, 차가운 현실 속에서 한줌의 희망을 꿈꾸는 폐허도 아니다. 그보다는 자유로워질 것이란 기대의 벌판에서, '고립'이라는 불편한 진실이 욕망이 커질수록 무력감과 함께 드러나고 있다. 결핍은 그것을 가리려는 욕망이 커질수록 명백히 드러나는 법이다.いいね1コメント0
김수진
2.0
영화는 허상이어도 영화 제작은 현실이니까. 3시간을 가득가득 채운 넋두리. 감독님이 조금이나마 춤을 출 수 있게 되셨다면 그걸로 됐습니다..
film fantasia
2.0
함께 벗어나고 싶었는데 자꾸만 나락으로... 구질구질 매달리는 것도 다 좋아해서 그러는 거니까. 눈앞에 아른거리는 걸 좀 따라가보는게 큰 잘못은 아니잖아
ㅎㅈㅇ
2.5
이 해방의 순간을 얼마나 기다려왔던가.
hye
1.5
러닝타임 3시간 내내 힘들었다
leuqes
2.5
[2023 서울독립영화제] 음악 감독 김한주
견씨네
2.5
맨 처음에 나는 이 영화의 믹싱이 잘못되었거나, 혹은 붐마이크를 사용하지 않은 줄 알았다. 왜냐하면 배경음에 인물들의 목소리가 자꾸만 묻혔기 때문이다. 그러다 시점숏인 줄 알았던 카메라가 갑자기 후행해 오버 숄더 숏으로 전환되는 샷들의 반복을 보면서 어쩌면 이 모든 것들이 인물이 공간 속에서 자리를 잡을 수 없는 것을 보여주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이 영화를 보면서 의구심이 들었던 것은 두 개였다. 하나는 인물의 주체적 해방을 표상하는 춤 숏들이 상반된 분위기의 잔잔한 씬에 편입되어 있다는 점이었고, 다른 하나는 맨 마지막 시원만의 공간인 긴 터널에서의 춤이 해방이 아닌 고립처럼 보이고, 그것을 긍정함으로써 시원이 앞으로 빠져나올 수 없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드는 것이었다. 이 영화는 주인공 시원이 못다한 것을 영화의 바깥에서 현실화해주고 있다. 그러니 시원은 영화라는 텍스트 안에서 실패한 인물이고, 감독은 영화 바깥이라는 초텍스트에서 성공한 인물이다. 하지만 과연 그것이 진짜 성공이라 할 수 있을까? 감독이 한 말을 빌리자면 이 영화는 숨구멍이 많고 해체되어 있다. 왜냐하면 영화에 구멍을 내지 않고 해체하지 않으면 그토록 원하는 감독의 이상을 표상으로 제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텍스트(영화)에서 해결하지 못한 것을 초텍스트(현실)적으로 해결했다는 이런 결과는 보통 텍스트 외부에서 이루지 못한 것을 텍스트의 내부를 이상화하는 관습적인 방식과 정반대의 방식이다. 영화의 생소함은 이런 관습의 전복에서 온다. 나는 이 선택이 결과론적으로 무엇인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영화의 카메라는 롱테이크를 고수하는 부분에서 어떤 고고학적인 느낌이 있다. 끝까지 보는 것을 지속하려는, 인물의 깊이를 포착해내려는 끈질김이 있다. 인물은 끝내 혼자만의 길을 택하고 외부와 타협하지 않는다. 인물은 자신의 세계를 고수하다 실패하는 것을 반복하다 결국은 자신만의 세계로 돌아간다. 이것이 창작자로서의 아이덴티티를 고수했다는 긍정적 결말일수도 있겠지만 그것을 '홀가분하고 아름답게 보이게 하려는' 초텍스트적인 감독의 욕망이 너무 노골적이다. 그래서 텍스트 속 시원이라는 캐릭터는 결국 외부의 전지전능한 감독이란 구원의 손길을 받지 않으면 그저 고립될 수밖에 없는 인물처럼 느껴지게 한다. 그 욕망에는 박수를 쳐줄 수 있지만 역설적이게도 그 욕망의 이면에는 퇴행감이 있다. 슬로우 시네마의 현장감은 그 의도(인물의 개성을 구원하는 것)와 달리 불가능의 감각을 피부에 와닿게 한다. 그래서 이 영화는 지치기가 쉬운 영화다. 이 영화는 한순간 힘을 내게 하는 도피처도, 차가운 현실 속에서 한줌의 희망을 꿈꾸는 폐허도 아니다. 그보다는 자유로워질 것이란 기대의 벌판에서, '고립'이라는 불편한 진실이 욕망이 커질수록 무력감과 함께 드러나고 있다. 결핍은 그것을 가리려는 욕망이 커질수록 명백히 드러나는 법이다.
리버
3.5
사람들이 자꾸만 나를 지나쳐서 앞질러 간다
김건오
4.0
현실적인 영화. 이미지는 고정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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