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수경4.0영화를 보다 보면 화면을 만지고 싶을 때가 있다. 책을 읽다가도 내 안에 각인하고 싶은 문장, 여백까지 외워버리고 싶은 페이지에 손을 갖다 대보곤 한다. 내 살로 꾹 누른다고 큰 차이가 생기는 것도 아닐 텐데. 극장에서 손을 뻗어봤자 닿는 건 앞사람의 뒤통수일 텐데도. 손이 자동으로 올라가고 다섯 손가락이 쭉 펴지게끔 만드는 장면이 나타난다. 그럴 때 내 몸의 다른 부위들은 굳는다. 이 영화 속 어린 엄마가 편지 봉투에 날짜를 쓰는 장면에서 나는 모든 걸 만지고 싶었다. 그 사람이 쥔 펜, 편지 봉투, 책상, 그 사람의 손톱, 정수리, 전부 다. 여자가 글자의 끄트머리를 둥글게 말아가며 꾸미던 ‘글꾸’를 떠올리는 지금, 나는 아무나 껴안고 싶은 마음과 비명을 지르고 싶은 마음을 동시에 억눌러야 한다. 여자는 확신하고 있었다. 아기가 본인의 또래가 되었을 때 그 편지를 반드시 읽으리라고, 편지를 십몇 년 간 보관할 곳에 불이 나거나 해서 유실되진 않으리라고, 사춘기 아이의 분노로 편지가 쓰레기통에 처박힐 일 따위는 없으리라고. 내 머릿속에 떠오른 수많은 가능성은 그 여자의 확고한 눈빛으로 인해 무화되었다. 사실 여자라고 부르기엔 아직 어린애다. 애인데도 본인이 다른 사람의 삶을 위해 내린 선택을 믿는 모습이 대충 파도로 날씨를 가늠하는 베테랑 선장처럼 의연하다. 내가 가져본 적 없는 깊이의 믿음이라서 그녀를 언니라고 부르고 싶어진다. 이 영화 속 카메라는 계획이 틀어지고 수정되는 과정을 따라가다가 마지막 장면에 도달한다. 세상엔 다양한 엔딩이 있다. 오사마 빈라덴을 잡은 제시카 차스테인이 허망해지고, 스포츠 도박에 인생을 건 아담 샌들러가 극락을 맛보고, 종이 공장에서 아이패드로 일하는 이병헌은 안도한다. 표류기를 끝낸 김씨가 버스에서 펜팔을 조우한 이후엔 무슨 일이 일어나야 할까. 한 사람의 삶이, 혹은 그 사람처럼 사는 이들의 일상이, 세상이 크게 바뀌지는 않을 텐데. 우리는 각종 수고로움을 굳이 목격하고 그러길 잘했다고 여기게 된다. 어떤 분투가 전제하는 ‘괜찮은 삶’에 공감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괜찮은 삶에 대한 저마다의 기준이 있어서 어린 엄마들이 우왕좌왕한다. 악기를 하나쯤 다룰 줄 아는 것, 부모가 있는 것, 엄마가 마약을 하지 않는 것, 뭐 그런 것들이 괜찮은 삶과 관련 있을지도 모른다. 이 영화 속에서 말 한마디 못하는 아기들을 위해 건설되는 무언가 괜찮은 것, 어떤 괜찮은 순간을 우리는 함께 기다리게 된다. 상황이 달랐더라면 영화 속 주인공들이 자기 엄마를 이해하기까지, 엄마와 절연하기까지, 언니와 화해하기까지, 마약을 끊기까지 몇 년이 더 걸렸을지도 모른다. 당장 책임져야 할 생명체가 있어서 앳된 엄마들은 모든 게 더 긴급해진다. 간간이 존재하는 행복의 순간들은 영화가 아기들을 위해 바라는 전부가 된다. 힘들 때 우연히 도움을 주는 친구나 긴 시간 끝에 이루어지는 이해, 아기를 방치하면서까지 남자친구와 싸우러 가는 뻔뻔함까지도. 엄마들의 시간이, 저 생명력이 아기들에게 깃들길. 저 최선이 아기들에게 가닿길. 영화의 작은 소망이 마지막 장면에 온통 배어 있다. 내가 언제부터 쌀국수충이 되었는지 모르겠는데, 요즘은 영화 한 편을 쌀국수 한 그릇과 비교해서 값어치를 따지곤 한다. 쌀국수 한 그릇을 먹었을 때만큼의 만족도가 없을 때 돈이 아깝다. 반면 쌀국수 세 그릇 정도의 위로를 품은 장면을 보면 다른 이상한 영화들까지 다 용서하게 된다. 도저히 아기의 배꼽을 닦아줄 수가 없겠다고 해서 핀잔을 들은 어린 엄마가 침대로 뛰어들며 무너지는 장면에서 나는 부산행 KTX 푯값이 정산되었다고 느꼈다. 그런 장면 앞에선 극장의 필요에 관한 장황한 왈가왈부가 무용해진다. 정확히 저 크기의 스크린으로 저 크기의 사람이 이불을 뒤집어쓰고 우는 그림을 왜 우리가 함께 봐야 하는지 저절로 설명된다. 그런 장면이 갑자기 나올지도 모르기 때문에 어떤 영화의 어떤 장면도 1.2배속으로 재생해서 보는 건 미친 짓이다. 어떠한 반박도 듣고 싶지 않다. 귀를 막고 있다.いいね49コメント0
천수경
4.0
영화를 보다 보면 화면을 만지고 싶을 때가 있다. 책을 읽다가도 내 안에 각인하고 싶은 문장, 여백까지 외워버리고 싶은 페이지에 손을 갖다 대보곤 한다. 내 살로 꾹 누른다고 큰 차이가 생기는 것도 아닐 텐데. 극장에서 손을 뻗어봤자 닿는 건 앞사람의 뒤통수일 텐데도. 손이 자동으로 올라가고 다섯 손가락이 쭉 펴지게끔 만드는 장면이 나타난다. 그럴 때 내 몸의 다른 부위들은 굳는다. 이 영화 속 어린 엄마가 편지 봉투에 날짜를 쓰는 장면에서 나는 모든 걸 만지고 싶었다. 그 사람이 쥔 펜, 편지 봉투, 책상, 그 사람의 손톱, 정수리, 전부 다. 여자가 글자의 끄트머리를 둥글게 말아가며 꾸미던 ‘글꾸’를 떠올리는 지금, 나는 아무나 껴안고 싶은 마음과 비명을 지르고 싶은 마음을 동시에 억눌러야 한다. 여자는 확신하고 있었다. 아기가 본인의 또래가 되었을 때 그 편지를 반드시 읽으리라고, 편지를 십몇 년 간 보관할 곳에 불이 나거나 해서 유실되진 않으리라고, 사춘기 아이의 분노로 편지가 쓰레기통에 처박힐 일 따위는 없으리라고. 내 머릿속에 떠오른 수많은 가능성은 그 여자의 확고한 눈빛으로 인해 무화되었다. 사실 여자라고 부르기엔 아직 어린애다. 애인데도 본인이 다른 사람의 삶을 위해 내린 선택을 믿는 모습이 대충 파도로 날씨를 가늠하는 베테랑 선장처럼 의연하다. 내가 가져본 적 없는 깊이의 믿음이라서 그녀를 언니라고 부르고 싶어진다. 이 영화 속 카메라는 계획이 틀어지고 수정되는 과정을 따라가다가 마지막 장면에 도달한다. 세상엔 다양한 엔딩이 있다. 오사마 빈라덴을 잡은 제시카 차스테인이 허망해지고, 스포츠 도박에 인생을 건 아담 샌들러가 극락을 맛보고, 종이 공장에서 아이패드로 일하는 이병헌은 안도한다. 표류기를 끝낸 김씨가 버스에서 펜팔을 조우한 이후엔 무슨 일이 일어나야 할까. 한 사람의 삶이, 혹은 그 사람처럼 사는 이들의 일상이, 세상이 크게 바뀌지는 않을 텐데. 우리는 각종 수고로움을 굳이 목격하고 그러길 잘했다고 여기게 된다. 어떤 분투가 전제하는 ‘괜찮은 삶’에 공감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괜찮은 삶에 대한 저마다의 기준이 있어서 어린 엄마들이 우왕좌왕한다. 악기를 하나쯤 다룰 줄 아는 것, 부모가 있는 것, 엄마가 마약을 하지 않는 것, 뭐 그런 것들이 괜찮은 삶과 관련 있을지도 모른다. 이 영화 속에서 말 한마디 못하는 아기들을 위해 건설되는 무언가 괜찮은 것, 어떤 괜찮은 순간을 우리는 함께 기다리게 된다. 상황이 달랐더라면 영화 속 주인공들이 자기 엄마를 이해하기까지, 엄마와 절연하기까지, 언니와 화해하기까지, 마약을 끊기까지 몇 년이 더 걸렸을지도 모른다. 당장 책임져야 할 생명체가 있어서 앳된 엄마들은 모든 게 더 긴급해진다. 간간이 존재하는 행복의 순간들은 영화가 아기들을 위해 바라는 전부가 된다. 힘들 때 우연히 도움을 주는 친구나 긴 시간 끝에 이루어지는 이해, 아기를 방치하면서까지 남자친구와 싸우러 가는 뻔뻔함까지도. 엄마들의 시간이, 저 생명력이 아기들에게 깃들길. 저 최선이 아기들에게 가닿길. 영화의 작은 소망이 마지막 장면에 온통 배어 있다. 내가 언제부터 쌀국수충이 되었는지 모르겠는데, 요즘은 영화 한 편을 쌀국수 한 그릇과 비교해서 값어치를 따지곤 한다. 쌀국수 한 그릇을 먹었을 때만큼의 만족도가 없을 때 돈이 아깝다. 반면 쌀국수 세 그릇 정도의 위로를 품은 장면을 보면 다른 이상한 영화들까지 다 용서하게 된다. 도저히 아기의 배꼽을 닦아줄 수가 없겠다고 해서 핀잔을 들은 어린 엄마가 침대로 뛰어들며 무너지는 장면에서 나는 부산행 KTX 푯값이 정산되었다고 느꼈다. 그런 장면 앞에선 극장의 필요에 관한 장황한 왈가왈부가 무용해진다. 정확히 저 크기의 스크린으로 저 크기의 사람이 이불을 뒤집어쓰고 우는 그림을 왜 우리가 함께 봐야 하는지 저절로 설명된다. 그런 장면이 갑자기 나올지도 모르기 때문에 어떤 영화의 어떤 장면도 1.2배속으로 재생해서 보는 건 미친 짓이다. 어떠한 반박도 듣고 싶지 않다. 귀를 막고 있다.
134340
4.5
다르덴형제의 인물은 강하고 강해서 그 씩씩함이 나를 괴롭게 만든다
감성적인너구리
3.5
아무런 준비도 못 한 채 부모가 되어간단 건 그 얼마나 두렵고도 숭고한 일인가.
댕댕
4.5
엔딩의 피아노보다 더 경쾌하게 살아냈으면 해
corcovado
3.5
원제는 ‘젊은 엄마들’ 모두 각자의 방식으로 애써 살아간다. 더 나은 삶을 향해가기를.
명정
4.0
두려움에 주저해도 결국 나아가는 소녀들과 이들을 관조하며 지지하는 카메라. #2025 BIFF
뻘쁘삑쎤
4.0
다르덴 형제의 카메라는 여전히 매우 밀접한데 배우들은 마치 카메라가 없는 것처럼 호연을 펼친다.
그냥영화많이보는사람
見たい
진진 수입 완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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