レビュー
レビュー
    Sleep away
    star5.0
    이것만 견디면 뭐든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얘기 너무 흔하게 돌아다닌다. 신체단련을 할 때든, 회사에서 과중한 업무를 수행해야 할 때든, 사회에서 부조리한 일을 받아들여야 할 때든, 학교에서 과중한 수업에 시달릴 때든, 군대 생활을 할 때든, 공무원 시험을 준비 할 때든. 하여간 무언가를 필요이상으로 견뎌야 할 때가 오면 이 말은 반드시 어디선가 들려오게 된다. 간편한 마법의 주문처럼 말이다. 달리 방법이 없기에 이 말을 믿고 견디다보면 이런 의문도 생긴다. 과연 정말 그럴까? 이것만 견디면 다른 것도 극복할 수 있을까? 투지와 노력과 인내만 있으면 세상에 극복하지 못할일은 없을까? 이 영화가 보여주는 것은 ‘아니다’ 이다. 모두에게 그런 건 분명히 아니겠지만, 적어도 현주와 자영에게 있어서 달리기 라는 것은 열심히 하면 그래도 성과가 나오는 일이었던 것 같다. 잘 찾아보면 누구에게나 그런 일이 하나쯤은 있을 것이다. 이 경험이 잠깐동안은 자신감 상승으로 이어지기도 하겠고 삶에 에너지를 불어넣어주기도 하겠지만 그런 시너지 효과에도 한계는 있는 것 같다. 당연히 모든 일을 수월하게 풀어주지는 못 한다. 즉, 사회적 자아를 실현시켜주거나 충분한 돈을 벌어다 주지는 못하는 것이다. 물론 그런 사람도 있겠지만 그건 극소수일 것이다. 게다가 현주의 경우를 보면 알 수 있듯이 그런 극소수의 사람이라고해서 자신이 진정 원하는 결과를 얻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거는 그거고 이거는 이거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순간이 오고야마는 것이다. 그런데 이 당연한 진실을 소화할 수 있을만한 능력이 우리 사회에 존재할까? 분명히 말하지만 이 능력이 있어야하는 건 개인만이 아니다. 사회다. 사회가 가지고 있어야 한다. 어쩌면 자영은 달리기로 인해 얻은 자신감으로 삶을 잘 살아냈을지도 모른다. 엄마가 그런식으로 말하지 않았더라면 민지가 그런식으로 말하지 않았더라면. 그런데 왜 그들은 자영을 그런식으로 밖에 대하지 못했던 걸까? 영화에서 굉장히 흥미있는 대화씬이 하나 있었다. 화장실에서 자영과 민지가 자영이 부장과 잔 일을 가지고 다툴때이다. 자영이 말한다. ‘왜 내가 인턴이 되기위해 잤다고 생각해?’ 여기에대한 민지의 대답이 굉장히 의외였다. 뻔한 거짓말 하지 말라는 것도 아니고 변명하지 말라는 것도 아니었다. 정확한 워딩은 아니지만 민지의 대답은 대충 이랬다. ‘그래, 너한텐 그깟 인턴 중요한 일도 아니겠지’ 였다. 그리고 내가 보기에 이 말을 할 때 민지는 상처 받은 것 같았다. 처음에 민지는 고의는 아니었지만 그 일에 대해 소문을 낸 것에 미안해 하고 있었고, 부장하고 자지 않았어도 인턴이 됐을텐데 괜한 짓을 했다며 자영의 행동에 대해 안타까워하는 마음도 있었던 것 같다. 만약에 지영이 진짜로 그랬다면 즉, 인턴이 되기위해 부장과 잤다면 민지는 자영에게 미안해 하고 안타까워 할 지언정 자영에게 상처를 받지는 않았을 것이다. 상처. 참 이상한 일이다. 한국사회에서 자신과 다른 사고방식을 지닌사람의 존재는 그 자체로 상처를 준다. 자신이 믿는 우선순위에 따라 행동하지 않는 존재는 단지 그것만으로도 자신의 삶을 비웃고 공격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 같다. 왜 그럴까? 아마 민지도 삶의 경주에 지쳐 핀치까지 몰려본 경험이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때 주변으로부터 자영과 똑같은 압박을 받았을 것이다. 그리고 아마 결국 그 경주를 지속하기로 마음먹은 이유는 자신의 가족과 주변인을 지키기위해서 라고 생각했을 것임이 틀림없을 것이다. 그리고 한국 사회안에서 이러한 생각은 분명 일리가 있다. 그런 구조로 되어있는 것이다. 그러니 자기와 다른 선택을 하려드는 타인을 보면 그만 자동적으로 저 사람은 이기적이고 현실감 없고 저만 아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마는 것이다. 그렇게 맞물려 있는 구조인 것이고 이 구조가 한국사회를 지탱하고 있는 것이다. 차라리 편법을 써서 그 지위를 얻으려했다면 이해할 수 있다. 적어도 그 사람이 자신의 측근일 경우 어떻게든 포용하려고 할 것이다. 그러나 나의 측근이라고 믿어온 사람이 내가 우선으로 삼고 있는 이상을 최우선으로 삼지 않는다는 말을 들으면 상처 받게되는 것이다. 사람을 모욕하는 최고의 방법은 그 사람의 이상을 비웃는 것이라고 했던가? 자영이 민지에게 한 대사 중에 이런게 있다. ‘인턴 지원 하나 안한게 그렇게 큰 일이야?’ 예전에 잠깐 한국 사교육 업계를 들여다 볼 기회가 있었는데 그 바닥에서는 과열된 사교육의 흐름에 참여하지 않는 학부모는 아이를 방치 더 심하게는 학대하고 있는 것이다 라는 인식이 상식처럼 자리하고 있는 것을 보고 경악한 적이 있다. 이러한 분위기속에서 선택의 자유가 있다는 말은 기만이다. 이와 비슷하지 않을까? . 자영이 엄마에게 어떤 말을 듣고 상처를 받는 장면들을 잘 보면 자영도 무언가 반박하고 싶은 말을 입안에서 우물거리는 것 같아 보인다. 그러나 결코 그 말을 입밖으로 내뱉지는 않는다. 왜 그럴까? 첫째로 말해봤자 이해받을 수 없다고 느끼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그게 전부라면 일단 하고 싶은 말은 해 버릴 수도 있다. 받아들여지든 말든. 어쩌면 자영은 엄마에게 상처를 주고 싶지 않아서 아무말도 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엄마는 민지처럼 잘라낼 수 없는 존재로 여겼기 때문에. 가족에게 그러는 건 정말 쉽지 않은 일이니까. . 이 사회를 살아가면서 내가 느낀 건 개인이 선택을 할 때 그 선택에 대한 리스크를 본인이 감당하기만 하면 끝나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반드시 주변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게 되어 있다. 아마 자영은 경제적으로 부모의 지원을 받으며 살아왔을 것이다. 그러니 자영의 부채감은 근거가 있는 것이기도 할 것이다. 여기다 대고 나는 내 맘대로 살 꺼야 라고 말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일 것이다. 한국사회에서 가족은 경제 공동체인데 거기서 혼자만 이탈한다는 것. 그 혜택을 누렸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이기적이라고 말한다면 근거가 없는 이야기도 아닌 것이다. 누군가 부채의 상환을 요구한다면 그걸 무시하는 일은 쉽지 않은 것이다. . 삶이 달리기와 결정적으로 다른 부분이 있다면 이것인 것 같다. 자영이 자신의 페이스에 따라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자기 삶을 꾸려가면 주변 사람들은 반드시 그로인해 상처 입는다. 실제로 피해를 입는다고 느낄 뿐만 아니라 자기 삶을 부정당했다고 느낄 수도 있다. 그렇게 꾸려져 있는 구조인 것이다. . 그렇다고해서 모두가 사회가 원하는 보편적인 기준에 맞춰살아갈 수 있을까? 설령 그러고 싶은 마음이 있다고해도 능력이 안 따라 줄 수도 있다. 그랬을 때 사회는 그것을 어쩔 수 없는 일로 받아들여 주는가? 당연히 그렇지 않다. 그런걸 용인해주면 이 사회를 떠받히는 기둥이 흔들린다. 그래서 이때 흔히 튀어나오는 나오는 말이 그 유명한 노오력이 부족해서 인 것이다. 당연히 이러한 시선에 반복적으로 노출된 개인은 그 시선을 내면화하게 되고 이때부터 자기학대가 시작되는 것이다. 현주를 한 번 보자, 현주는 고작 서른한살이다. 서른한살에 작가로 데뷔하지 못하는 것이 죽어야할 이유가 될까? 자세한 사정은 나오지 않지만 현주는 자영이 동경할만큼 자기 삶에 있어서 성취를 이루어낸 멋진 사람인 것 같다. 그런데 왜 현주는 그렇게 일찍 모든 것에 절망했을까? 달리기를 대하는 현주의 태도를 보면 어느정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술에 잔뜩 취해 자정이 다되어 집에 들어온 현주는 무언가에 쫓기듯이 달리기를 하러나가자고 한다. 오늘 못했다고. 그리고 그 모습을 본 자영은 필사적으로 그것을 저지한다. 볼 때는 왜 저렇게까지 절박하게 말리는 것일까 궁금했는데 아마 자영은 그게 뭔가 크게 잘못됐다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감지했기 때문에 그렇게 필사적으로 막았던 것이 아니었을까? 자세한 사정은 나오지않지만 한국사회에서 살아본 사람이라면 현주가 스스로에게 부여했을 압박감도 쉽게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 자영은 정규직이 될 가능성을 스스로 망쳐버리고 엄마와 동생을 불러 근사한 곳에서 외식을 한다. 엄마에게는 정규직이 됐다고 거짓말을 하고. 그런데 엄마는? 그것으로도 만족하지 못한다. 믿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그 거짓말이 사실이라고해도 만족하지 못하는 것이다. 엄마가 넌지시 다시 행시준비를 하는 것이 어떠냐고 말했을때 자영이 느꼈을 절망감은 어땠을까? 거짓말이 사실이 된다고 해도 끝이 아닌 것이다. 자영이 마지막으로 호텔 스위트룸에 가는 장면은 현주가 마지막 달리기를 하러 나타난 것과 다르지 않게 느껴졌다. 자영은 막다른 길에 몰렸고 재촉은 계속되고 있다. 그리고 동생은 그런 자영을 보며 속도 모르고 달리기를 같이 하자고 한다. 자영은 이제 현주의 입장이 된 것이다. 그런데 현주는 어떻게 되었나? 끝없이 이어지는 헬조선의 싸이클. . 성적 대상화가 없다는 식의 이야기에는 동의하기 어렵다. 다만 그러면 절대 안되는가? 하는 의문은 있다. 자영의 시선으로 본 현주의 몸은 상당히 관능적이고 감각적으로 그려진다. 물론 자영은 이성애자 여자 인 것 같으니 그 시선이 섹스하고 싶다는 욕망의 직접적인 표현은 아닐 것이다. 다만 거기에 아무런 욕망도 없느냐하면 그것은 아닌 것 같다. 이성애자 여성의 눈으로 본 이성애자 여성의 신체에는 아무런 욕망도 끼어들지 못하는 걸까? 그건 너무 작위적인 구분이 아닐까? 환상장면에서 자영이 현주의 등을 쓰다듬을 때 그 손길에는 정신적인 우정만이 존재했을까? 욕망의 갈래는 다양하고 그 모든 것들은 존재하는 것 같다. 그 중에 어떤 지점을 묘사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만 익숙한 남성적 시선에의한 성적대상화의 의도가 잘 보이지 않았을 뿐이다. 근데 또 그렇다고해서 이 장면이 이성애자 남성관객에의해 성적대상화 될 가능성이 전혀 없을까? 내 생각엔 그것도 아닐 것 같다. 성적대상화의 형태는 다양하기 때문이다. 근데 그렇다고해서 그 모든 가능성들을 차단하기 위해 영화에서 여성의 신체에 대한 묘사는 아예 금지해야 할까? 아니면 성에 관한 부분은 영화가 아예 다루면 안되는 걸까? 예전에 어떤 고등학교에서 여학생의 목덜미가 남학생의 성욕을 자극하니 여학생이 머리 묶는 것을 금해야 한다는 글을 본 적이 있다. 이런 사고방식은 옳은 걸까? 확실한 건 이 영화에서 자영의 욕망이 담긴 섹슈얼한 이미지들은 영화의 주제와 밀접한 관련이 있고 인물들의 감정과 감각을 심도깊게 보여주기 위한 기능을 한다는 것이다. 단지 기능적으로 훌륭하기만 한 것도 아니다. 그 장면들은 분명 이 영화가 지닌 매혹의 상당부분을 차지 한다. 이성애자 여성의 눈으로 본 이성애자 여성의 신체가 쉽게 범주화하기 어려운 복잡한 욕망의 시선으로 보여지는 것은 분명 흔하게 볼 수 있는 장면은 아닌 것이다. 다루기 까다롭고 불편하기 때문에 혹은 범속하게 해석될 위험성 때문에 영화의 이런 부분들을 못 본 척 넘어가는 것은 아쉽지 않은가? 이 부분은 이 영화에서 뺄 수 없는 성취가 아닌가 싶다. . 연기가 매우 훌륭하다. 개개인의 연기도 너무 좋고 배우들간의 합도 굉장하다. 특히 최희서 배우와 안지혜 배우가 함께 있을 때 느껴지는 묘한 텐션은 굉장히 인상적이었다. 엄마역할의 김정영 배우의 연기도 굉장히 뛰어나서 어떤 순간 훅하고 다가오는 한국사회 특유의 사고방식이 정말 무시무시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굉장한 압박감이었다. 연기들을 담아내는 연출방식도 무척효과적이었고. 음악의 사용도 인상적이었다. 사바하에서 그야말로 독보적인 카리스마스를 보여주었던 이재인 배우의 힘 뺀 생활연기를 보는 것도 신선했다. 과연 배우구나 싶더라. 그 동안 성장한 것도 있겠지만 암튼 너무 신기했다. 연기뿐만 아니라 영화의 리듬이나 구성도 더할나위없이 효과적이었다. 완성도에대한 논란이 대체 왜 있었는지 전혀 이해가 안 갈 정도였다. 적어도 나에게는 모든 장면들이 효과적이었고 꼭 필요한 장면들처럼 보였다.
    21510
    달릴 땐 그게 마냥 전진인 거 같은데, 결국 돌아가야 하는 거잖아. 뛸 때 무슨 생각 하냐고? 그때 도망치자고 말했더라면. 어떻게든 될 거라고 그냥 끌어 안았더라면. 우리 아주 멀리 갔었더라도 결국 돌아와야 했을 거야, 서로 모른 척 버티던 말 내가 했을 거고. 그래서 그랬어. 늘 그 생각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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