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구리4.5이 영화는 당혹감으로 가득하다. 특히 오랜 시간 정재훈의 신작을 기다려왔을 관객이라면 더욱이. <ESP>라는 제목으로 알려져 있던 이 프로젝트는 2018년 처음 시작되었다. 이능력을 지닌 '에스퍼'들이 살아남기 위해, 혹은 세계를 구하기 위해 이런저런 일들을 벌인다는, 일견 단순한 이야기를 지닌 이 영화는 15명의 이름이 각본가 크레딧에 올라가 있다. 정재훈 감독은 자신이 세팅해둔 세계 위에서 섭외한 배우들이 직접 이야기를 쓰게끔 했다. 어떻게? 트위터의 서브컬처로 자리잡은 '자캐커뮤' 혹은 전통적인 TRPG의 방식처럼 배우들이 각자 '롤'을 받고 세계의 설정과 롤에 맞추어 상황을 이어나간다. 이를 일종의 릴레이 소설이라 이해할 수도, 혹은 자넷 머레이와 이안 보고스트가 '절차적 수사학'이라 부르고 에스펜 올셋이 '에르고딕 서사'라 부르는 게임연구 및 서사연구에서의 이론들을 가져올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이 이론들을 곧장 영화에 적용시킬 수는 없을 것이다. <블랙미러: 밴더스내치>와 같은 인터랙티브 무비 혹은 <디트로이트 비컴 휴먼>과 같은 시뮬레이터 게임과는 다르게, <에스퍼의 빛>은 그렇게 진행된 세 개의 '플레이 세션'을 영화화한다. 따라서 영화는 총 세 개의 챕터로 구성되어 있으며, 중간중간 스마트폰이나 태블릿을 들고 이야기만들기 게임을 '플레이'하는 이들이 등장한다. 따라서 이 영화의 이야기 자체는 관객에 의해 새롭게 쓰여지지 않는다. _ 정재훈 감독은 GV에서 이들을 '배우'가 아니라 '플레이어'라는 이름으로 불렀다. 그리고 자신은 이 영화를 일종의 다큐멘터리라 여긴다고 말했다. 물론 <에스퍼의 빛>은 각본과 연기로 채워져 있으며, 특촬물, 괴수물, 판타지 등의 장르에서 길어온 이미지들로 채워져 있다. <반지의 제왕> 같은 판타지 영화 혹은 <젤다의 전설> 같은 게임에서나 마주할 수 있을 것만 같은 고유명사들도 그러하다. 감독이 말하기로, 자신은 몇몇 설정과 지명 등의 세계관을 플레이어들에게 주고 이야기들은 전부 그들의 선택을 통해 만들어진 것이다. 영화는 그것을 드러내려는듯 트위터의 UI를 가져온 텍스트를 계속 띄운다. OA(Operator Account)가 상황을 제시하면 거기에 맞추어 선택지를 고르거나 행동을 이어나가는 방식으로 이야기는 만들어졌고, 영화는 그렇게 만들어진 이야기를 연기와 영상으로 구현하며, 이 텍스트들을 그대로 드러낸다. 영화제작에 사용되었을 트위터 계정들은 여전히 검색 가능하다(대부분이 비공개 계정이라 내용을 살펴보기는 어렵다). 이 영화가 일종의 다큐멘터리라는 정재훈의 말을 따라 <에스퍼의 빛>을 다시 생각하면, 이 영화는 '자캐커뮤' 혹은 ' TRPG'의 방식을 따라 서사가 절차적으로 생성되는 방식 자체에 대한 기록이나 다름없다. 물론 각본이 먼저 만들어지고 그 이후에 촬영이 진행된다는 익숙한 극영화의 제작방식을 따르지만, 영화는 플레이 과정을 영화 곳곳에 새겨넣음으로써 제작방식 자체를 영화 안에 포함시키려 한다.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플레이어이자 자신의 롤을 연기하는 배우인 이들의 형상은, 마치 디지털 세계에 들어가면 옷차림이 바뀌는 <디지몬>의 '선택받은 아이들'처럼 양측을 오간다. _ 그렇게 만들어진 이야기가 흥미롭고 재밌는가하면 그렇지는 않다. 익숙한 SF 장르의 이미지와 내러티브를 기대했을 관객들에게 이 영화는 배신감을 선사한다. 디스토피아적인 미래도시 대신 무수한 얼굴 클로즈입이 러닝타임을 채우는 1장, 끝없이 이어지는 비명소리로 가득한 2장, '컴퍼니'라는 미지의 존재에 속박된 안드로이드들이 등장하는 3장의 이야기가 딱히 연결성을 갖지도 않는다. 대부분이 첫 영화인 배우들의 연기가 어색하게 다가올 수도 있음은 물론이다. 다만 정재훈의 앞선 두 영화, 감독 스스로 '4DX 어드벤처물'로 명명한 <도돌이 언덕의 난기류>와 기이한 여행영화인 <Trans-Continental-Railway>가 그러했던 것처럼, <에스퍼의 빛> 또한 익숙하게 호명되는 장르적 틀을 멀찍이 벗어나 나른 방식의 체험을 요구한다. 점점 많은 영화, 특히 액션이나 SF 등의 장르영화를 중심으로 소위 '게임적 서사'라는 것이 스며들어오는 상황에서, <에스퍼의 빛>은 주어진 세계와 이야기의 각색이 아니라 이야기의 게임적 생성이라는 실험을 시도하고 그 결과물을 제시한다. 그러니까 이 영화는 그 이야기가 생성되는 과정의 기록이며 생성의 체험이다. 흔하게 상상되는 영화의 재료들을 멀찍이 벗어나 기이한 모습을 빚어내는, 그야말로 '흥미진진한 괴작'이라는 표현이 어울리는 영화.いいね51コメント1
김병석4.5조금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한창 아이돌 덕질할 때 팬픽 쓰는 것에 몰두한 적이 있었다. 카카오스토리 기반 멤놀이나 RP가 가미된 릴레이 소설 커뮤니티를 만난 것도 아마 그 때 즈음 일 것이다. 특히 후자의 커뮤니티 경우는 매우 특이해서 아직도 기억에 남는데, 각자 가상의 직업과 인물을 정하여 (가령 뉴진스 하니가 아닌 사진작가 하니와 같은) 각자 게시물을 쓰고 다른 구성원들과 댓글을 주고받으며 하나의 허구적 세계를 만들어내는 구조였다. 그 흥미로운 구조 안에서 나는 새로운 순간들을 경험했다. 다만, 이게 온라인 문화에 대한 비평에서 쉽사리 찾아볼 수 있는 ‘되고 싶은 나’ 혹은 ‘되지 못할 나’를 향한 도피인 것은 아니었다. 대신, 무엇이든 될 수 있는 구조가 담보하는 무한한 가능성, 또 서로의 시나리오 속에서 새로운 관계를 쌓아가며 스크린 밖 현실과는 유리된 채 박동하는 세상을 만들고 있다는, 그 생경하지만 어딘가 벅차오르는 감각이 초등학교 고학년 김병석의 마음을 설레게 했을 뿐이다. 누군가는 환시라고 치부할 수 있었던 그 모든 시간들이 글을 쓰는 나에게 자양분이 되었으리라, 그렇게 생각하며 살아온 나날들이었다. 사실, 흑역사랍시고 기억 저편에 밀어둔 것도 사실이었다. 영화 <에스퍼의 빛, 2024>은 그런 어린 시절의 나를 대뜸 내 앞에 데려다 놓은 작품이었다. 각자의 자캐를 앞세워 (아마 영화의 제작진일) 메인 계정의 타래를 이어가는 트위터 기반 커뮤니티의 구성원들이 만들어가는 이야기를 허구적 서사의 주요 축으로 사용하는 이 영화는, 스마트폰을 잡고 게시물 타이핑을 하는 십 대 아이들의 모습과 그들이 만들어낸 판타지 서사를 병치한다. 빈약한 프로덕션 디자인, 다소 구시대적인 사운드 이펙트, 혹은 엉망진창인 배우들의 연기 등 영화가 만들어낸 아이들의 상상은 조잡하기 그지없는 결과물로 관객 앞에 당도한다. 하지만, 그렇게 조악하기에 영화는 자신의 허구성이, 또 아이들이 만들어 낸 이야기가 지금-여기에 발붙이고 있다는 것을 드러낸다. 십 대들의 특이한 온라인 사용에 관한 사회문화적 탐구 혹은 극에 대한 몰입을 완전히 배제한 채 이 작품은 아이들의 게시물들이, 또 영화의 방황이 스크린 밖 현실에 관한 미학적 무릎반사임을 계속해서 외치고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 기성세대가 종종 예단하곤 하는 ‘0과 1로 이루어진 디지털 세상을 향한 도피적 망상’은 절대 아닌 셈이다. 그리고, ’리산 시티’니 ‘이능력’이니 영화에서 반복되는 유치찬란한 명사들은 바로 그 지점에서 새로운 의미를 띈다. 목전에 둔 세계를 이해하기 위한 그들만의 수사학, 변해가는 자신과 환경을 제 나름대로 포용하기 위해 축조한 대안적인 언어. 그들이 함께 만들어낸 이세계는 단지 다른 단어들로 묘사한 이 세계였을 뿐이다. 더욱이, 제작진이 아이들에게 세계관에 관한 전체적인 설정을 제공하고 서사적 분기점에 관한 몇 가지 선택지를 제공한다는 커뮤니티의 전제를 고려하면, 어떤 딜레마가 전지적 존재에 의해 선제적으로 주어진다는 점에서 트위터 속 세계나 그들이 당장 밟고 있는 현실이나 아이들에게는 똑같은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은 화면 속 아스라한 텍스트로만 남는 이능력자들의 세계에서 오감의 세계의 파편을 경험한다. 얼굴도 모르는 사람과 관계 맺으며 이타적 사랑으로 향한다. 극 후반부의 첨예한 갈등이 서로에 대한 무조건적 환멸로 이어지기 직전, 한 소녀는 비장한 표정으로 자신은 우정을 믿는다고 말한다. 흔들리는 다른 아이들의 눈동자들. 이윽고, 한 가지 소원만을 들어준다는 세계수 앞에서 남아 있는 인물 모두는 같은 소원을 이야기한다. 모든 존재들이 각자의 생을 자유로이 살아가게 해달라는 바람. 이어, 동화 같은 해피 엔딩을 서술하는 메인 계정의 트윗. 분명 얼굴도 실명도 모르는 한 소녀의 미성숙한 문장이, 그 안에 스민 진심이 타인에게 닿았다. 그 지점에서 아이들은, 또 영화는 매번 질문만을 던지는 세상 앞에 가장 뚜렷한 답은 서로를 맞잡은 손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사회를 해체하여 오류를 짚어내기보다, 사랑하는 법을 목격하는 이 작품은 그래서 매우 소중하고 가치 있다. 어쩌면 영화도 십대들의 트위터 커뮤 같은 것이 아닐까, 하고 느슨하게 생각해 본다. 얼굴만 바꿔가며 찾아오는 동시대적 의제를 이해하기 위해 얼기설기 쌓아 올린 쇼트들, 서로 다른 창작자의 언어와 페이스로 여기 당도하는 씬들, 그리고 스크린을 초월하여 관객들에게 내민 손. 닿았을까, 끝내 고민하는 롤링 크래딧 속 어떤 이름들. 두 시간 동안 지속되는 유치찬란한 연서. 그들의 영화는 누군가에게 닿았을까.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 계정에 방치된 내 글은 누군가에게 닿았을까. 나는 누군가에게 닿을 수 있을까. 혐오와 무지의 시대, 저기 멀리 있는 타인에게 손을 뻗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いいね30コメント0
yves2.0제작 목적과 창작 방식은 지지하나 여러 배우에게 타자기를 넘겼기에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이야기의 파편화를 응집하기 위한 (청소년기에 대한) 연출자의 고찰이 부재하며, 조악한 편집에 두 시간 반이 다소 버겁게 느껴진다いいね28コメント1
문희원2.5일부 평론가, 그리고 소위 말하는 영화의 '지지자'들은 <에스퍼의 빛을> 두고 얘기할 때 이전까지의 정재훈 감독의 비범한 커리어와 오랜 시간에 걸쳐 완성된 이 프로젝트의 기나긴 과정 및 결실을 치켜세운다. 영화가 끝나고 이어진 GV 담화에서도 모더레이터인 송경원 평론가는 "이 영화가 극장개봉까지 상영되는 과정 자체가 대단한 하나의 여정 같았다"라고 표현을 한다. 그러나 감독의 이름 및 프로젝트에 얽힌 복잡다단한 과정을 일절 알지 못하는 제3자인 관객은 과연 그 "대단한 과정"의 일부로 초청받을 권리/자격이 있을까? GV 내용에 따르면, 정재훈 감독은 이것이 여러 청소년 '플레이어'들이 저마다 각자의 이야기를 써서 다양한 형태로 혼합 및 변환해 보고 궁극적으로 영화로 촬영하기까지 하며 스토리텔링에 대한 여러 실험을 해봤다고 한다. 거기에 더해 감독은 스스로 영화 속 세계관에 얽힌 복잡한 설정들을 상세하게 풀어내는데다가, 배우들은 이 과정을 통해 그 시절의 자신들이 어떤 생각 및 이야기를 품고 있었는지 되돌아볼 수 있다는 감동적인 회고까지 남겨주었다. 그렇지만 이 내용은 모두 영화를 보고 난 이후 취득한 후일담일 뿐이다. 백지 상태의 관객이 극장 문을 열고 들어가 <에스퍼의 빛>을 보았을 때, 과연 이 기나긴 여정 속 복잡한 세계관과 인물 하나하나의 서사 및 그곳에 담겼을 감정과 경험을 과연 체험할 수 있을까? 이것이 곧 관객 저마다의 개인적인 해석을 곁들여 스크린 너머의 스토리텔링으로 확장되려면 관객이 그 이야기를 따라갈 수 있는 최소한의 지표는 마련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에스퍼의 빛>은 적어도 내가 보기에 관객이 이야기를 따라갈 수 있게 하는 데에 일절의 관심이 없다. 엄청난 양의 텍스트 안에 담긴 각종 다양한 설정들과, 절대 구분하거나 파악하기 불가능한 개개인의 서사는 물론이고 한순간도 이야기의 형태가 하나로 결집되지 못하고 그 흐름을 따라잡지 못하게 함으로써 영화는 관객을 스토리텔링의 영역에서 철저히 소외시킨다. 이래놓고 영화가 끝난 이후, 감독과 배우들은 이 작업이 각자에게 얼마나 길고 감동적인 여정이었는에 대한 소회를 밝힌다. 마치 영화를 본 우리도 당연히 그 똑같은 감동을 마땅히 느꼈으리라 기대하는 것처럼 말이다. 더군다나, 나는 사전에 'TRPG'나 '자캐커뮤'에 대한 개념도 전혀 알고 있지 못했다. 영화는 당연히 이 개념을 친절히 설명해주지 않지만, 자연스럽게 그에 맞춰 구축된 영화의 형식에 따라 극을 진행시킨다. 물론 이 개념을 사전에 알고 있었다 하더라도, 이토록 의도적으로 불친절하고 사적인 소재의 활용을 얼마나 쉽게 파악하고 따라갈 수 있을까? 그리고 무엇보다, 기본적으로 RPG의 개념은 플레이어의 자유와 선택을 보장하고 영화에서도 이에 따라 실제로 텍스트의 형태로 플레이어의 선택지를 물어보는 순간들이 여러 차례 등장한다. 하지만 이 선택지가 나오는 순간마다 관객이 가담할 수 있는 역할은 없다. 어느 순간에 왜 이런 선택지가 나오지도 모르고, 결국 어떤 선택지가 결정되었는지도 알지 못한 채 그저 영화가 정해준 답대로 따라갈 수밖에 없는 거다. 그래놓고 GV에선 그 RPG에서 이야기를 자유롭게 확장해나가는 자유도 및 가능성에 대한 이야기를 펼쳐놓는다. 여전히 관객이 참여할 지점은 하나도 없다. 게다가 <에스퍼의 빛>은 스스로의 정체성을 "비범하고 괴랄한 괴작"이라고 삼는 데에 굉장한 자부심을 느끼고 있는 듯하다. 영화의 리뷰 예고편을 보면 굉장히 산만하게 끊임없이 반짝이는 이미지 위로 영화에 대한 각종 (혹평 위주의) 반응들이 등장했다가 사라진다. 심지어 예고편에서 등장하는 이미지는 영화에서 나오지도 않는다. 메인 예고편에서도 김병규 평론가의 "모험적 괴작"이라는 짤막한 코멘트만 등장할 뿐, 따로 이것이 대체 어떤 영화인지 파악하는 게 불가능하다. 이렇게 온갖 바이럴한 마케팅으로 신비적이고 괴랄할 거 같은 인상은 일부러 한참 심어주고, 정작 영화를 풀어놓고 보면 관객과 함께 완성해야 할 아름다운 스토리텔링의 여정이라고 포장하려고 한다. 과연 <에스퍼의 빛>은 관객의 담론을 수용하고 이를 새로운 영역으로 확장하는 영화인가? 프로젝트의 출발점과 작품 안에 담긴 이야기 정신에 대한 포부는 철저히 소거한 채 굉장한 '괴작'이라고 각인되길 바라는 이상한 욕망만 남아있진 않은가? 이것이 그들만의 아름다운 워크숍과 여정에 머무르지 않고, 관객이라는 제3자에게까지 전달되어야 할 이유, 근본적으로 시청각적 매체인 영화의 형태로 제공되어야 할 이유는 도대체 무엇인가? 고민의 시간이 길아질 수록, 나와 소통을 거부하는 영화와의 거리는 더 멀어질 뿐이다.いいね26コメント4
영화를 봅시다0.5엑스맨, 릴리슈슈를 꿈꿨으나 8,90년대 전대물과 ebs어린이 드라마보다 못한 수준의 결과물. 이런 장르의 영화는 자칫하면 짜치고 유치해질 수 있기에 세계관, 캐릭터, 스타일 등이 중요하지만 이 영화는 그 무엇 하나 제대로 성취하지 못했다. 세계관은 순전히 그들만의 대환장 파티가 되어 몰입은 커녕 실소를 자아내고 캐릭터들은 단체로 중2병걸린 트위터리안마냥 나와 시종일관 관객에게 항마력 테스트를 시도한다. 영화가 전체적으로 너무 어두워서 제대로 보이지도 않는데 그마저도 조악하다. 배우들의 연기력도 심각한데 사운드 상태까지 좋지 않다. 모든 배우들이 하나같이 발연기를 보여주는 걸 보니 이건 연출의 문제가 아닐까 싶다. 한국영화에서 흔치 않은 시도라는 점을 높게 칭찬해주고 싶었으나 20년전에 나온 <울라불라 블루짱>이나 <요정 컴미>보다 실험 정신이 떨어지는 작품을 호평하자니 힘이 빠진다. 심각한 장면에서 웃음을 터뜨리는 관객도, 이 영화를 견디지 못하고 중간에 상영관을 떠나는 수많은 관객도,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자마자 황급히 자리를 떠나는 관객도, 끝까지 자리는 지켰지만 졸고 있던 관객 모두가 한 마음 한 뜻으로 이 영화를 감상하지 않았을까? 이 영화를 좋게 본 사람들의 의견도 존중하지만 그보다는 먼저 2시간 반동안 정신적 충격을 받은 나 자신부터 위로해주고 싶다.いいね26コメント0
이동진 평론가
3.0
빛이 있으라 하시니 갈래를 따라 절로 흐르기 시작하는 마음들.
동구리
4.5
이 영화는 당혹감으로 가득하다. 특히 오랜 시간 정재훈의 신작을 기다려왔을 관객이라면 더욱이. <ESP>라는 제목으로 알려져 있던 이 프로젝트는 2018년 처음 시작되었다. 이능력을 지닌 '에스퍼'들이 살아남기 위해, 혹은 세계를 구하기 위해 이런저런 일들을 벌인다는, 일견 단순한 이야기를 지닌 이 영화는 15명의 이름이 각본가 크레딧에 올라가 있다. 정재훈 감독은 자신이 세팅해둔 세계 위에서 섭외한 배우들이 직접 이야기를 쓰게끔 했다. 어떻게? 트위터의 서브컬처로 자리잡은 '자캐커뮤' 혹은 전통적인 TRPG의 방식처럼 배우들이 각자 '롤'을 받고 세계의 설정과 롤에 맞추어 상황을 이어나간다. 이를 일종의 릴레이 소설이라 이해할 수도, 혹은 자넷 머레이와 이안 보고스트가 '절차적 수사학'이라 부르고 에스펜 올셋이 '에르고딕 서사'라 부르는 게임연구 및 서사연구에서의 이론들을 가져올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이 이론들을 곧장 영화에 적용시킬 수는 없을 것이다. <블랙미러: 밴더스내치>와 같은 인터랙티브 무비 혹은 <디트로이트 비컴 휴먼>과 같은 시뮬레이터 게임과는 다르게, <에스퍼의 빛>은 그렇게 진행된 세 개의 '플레이 세션'을 영화화한다. 따라서 영화는 총 세 개의 챕터로 구성되어 있으며, 중간중간 스마트폰이나 태블릿을 들고 이야기만들기 게임을 '플레이'하는 이들이 등장한다. 따라서 이 영화의 이야기 자체는 관객에 의해 새롭게 쓰여지지 않는다. _ 정재훈 감독은 GV에서 이들을 '배우'가 아니라 '플레이어'라는 이름으로 불렀다. 그리고 자신은 이 영화를 일종의 다큐멘터리라 여긴다고 말했다. 물론 <에스퍼의 빛>은 각본과 연기로 채워져 있으며, 특촬물, 괴수물, 판타지 등의 장르에서 길어온 이미지들로 채워져 있다. <반지의 제왕> 같은 판타지 영화 혹은 <젤다의 전설> 같은 게임에서나 마주할 수 있을 것만 같은 고유명사들도 그러하다. 감독이 말하기로, 자신은 몇몇 설정과 지명 등의 세계관을 플레이어들에게 주고 이야기들은 전부 그들의 선택을 통해 만들어진 것이다. 영화는 그것을 드러내려는듯 트위터의 UI를 가져온 텍스트를 계속 띄운다. OA(Operator Account)가 상황을 제시하면 거기에 맞추어 선택지를 고르거나 행동을 이어나가는 방식으로 이야기는 만들어졌고, 영화는 그렇게 만들어진 이야기를 연기와 영상으로 구현하며, 이 텍스트들을 그대로 드러낸다. 영화제작에 사용되었을 트위터 계정들은 여전히 검색 가능하다(대부분이 비공개 계정이라 내용을 살펴보기는 어렵다). 이 영화가 일종의 다큐멘터리라는 정재훈의 말을 따라 <에스퍼의 빛>을 다시 생각하면, 이 영화는 '자캐커뮤' 혹은 ' TRPG'의 방식을 따라 서사가 절차적으로 생성되는 방식 자체에 대한 기록이나 다름없다. 물론 각본이 먼저 만들어지고 그 이후에 촬영이 진행된다는 익숙한 극영화의 제작방식을 따르지만, 영화는 플레이 과정을 영화 곳곳에 새겨넣음으로써 제작방식 자체를 영화 안에 포함시키려 한다.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플레이어이자 자신의 롤을 연기하는 배우인 이들의 형상은, 마치 디지털 세계에 들어가면 옷차림이 바뀌는 <디지몬>의 '선택받은 아이들'처럼 양측을 오간다. _ 그렇게 만들어진 이야기가 흥미롭고 재밌는가하면 그렇지는 않다. 익숙한 SF 장르의 이미지와 내러티브를 기대했을 관객들에게 이 영화는 배신감을 선사한다. 디스토피아적인 미래도시 대신 무수한 얼굴 클로즈입이 러닝타임을 채우는 1장, 끝없이 이어지는 비명소리로 가득한 2장, '컴퍼니'라는 미지의 존재에 속박된 안드로이드들이 등장하는 3장의 이야기가 딱히 연결성을 갖지도 않는다. 대부분이 첫 영화인 배우들의 연기가 어색하게 다가올 수도 있음은 물론이다. 다만 정재훈의 앞선 두 영화, 감독 스스로 '4DX 어드벤처물'로 명명한 <도돌이 언덕의 난기류>와 기이한 여행영화인 <Trans-Continental-Railway>가 그러했던 것처럼, <에스퍼의 빛> 또한 익숙하게 호명되는 장르적 틀을 멀찍이 벗어나 나른 방식의 체험을 요구한다. 점점 많은 영화, 특히 액션이나 SF 등의 장르영화를 중심으로 소위 '게임적 서사'라는 것이 스며들어오는 상황에서, <에스퍼의 빛>은 주어진 세계와 이야기의 각색이 아니라 이야기의 게임적 생성이라는 실험을 시도하고 그 결과물을 제시한다. 그러니까 이 영화는 그 이야기가 생성되는 과정의 기록이며 생성의 체험이다. 흔하게 상상되는 영화의 재료들을 멀찍이 벗어나 기이한 모습을 빚어내는, 그야말로 '흥미진진한 괴작'이라는 표현이 어울리는 영화.
진태
4.5
누군가는 이 영화에 참가한 플레이어를 부러워하고 있을 것이다
진레논
1.0
미친 여자가 괴성을 내뱉을 때마다 연어가 거슬러오르듯 영화관을 나서는 관중을 보았다
김병석
4.5
조금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한창 아이돌 덕질할 때 팬픽 쓰는 것에 몰두한 적이 있었다. 카카오스토리 기반 멤놀이나 RP가 가미된 릴레이 소설 커뮤니티를 만난 것도 아마 그 때 즈음 일 것이다. 특히 후자의 커뮤니티 경우는 매우 특이해서 아직도 기억에 남는데, 각자 가상의 직업과 인물을 정하여 (가령 뉴진스 하니가 아닌 사진작가 하니와 같은) 각자 게시물을 쓰고 다른 구성원들과 댓글을 주고받으며 하나의 허구적 세계를 만들어내는 구조였다. 그 흥미로운 구조 안에서 나는 새로운 순간들을 경험했다. 다만, 이게 온라인 문화에 대한 비평에서 쉽사리 찾아볼 수 있는 ‘되고 싶은 나’ 혹은 ‘되지 못할 나’를 향한 도피인 것은 아니었다. 대신, 무엇이든 될 수 있는 구조가 담보하는 무한한 가능성, 또 서로의 시나리오 속에서 새로운 관계를 쌓아가며 스크린 밖 현실과는 유리된 채 박동하는 세상을 만들고 있다는, 그 생경하지만 어딘가 벅차오르는 감각이 초등학교 고학년 김병석의 마음을 설레게 했을 뿐이다. 누군가는 환시라고 치부할 수 있었던 그 모든 시간들이 글을 쓰는 나에게 자양분이 되었으리라, 그렇게 생각하며 살아온 나날들이었다. 사실, 흑역사랍시고 기억 저편에 밀어둔 것도 사실이었다. 영화 <에스퍼의 빛, 2024>은 그런 어린 시절의 나를 대뜸 내 앞에 데려다 놓은 작품이었다. 각자의 자캐를 앞세워 (아마 영화의 제작진일) 메인 계정의 타래를 이어가는 트위터 기반 커뮤니티의 구성원들이 만들어가는 이야기를 허구적 서사의 주요 축으로 사용하는 이 영화는, 스마트폰을 잡고 게시물 타이핑을 하는 십 대 아이들의 모습과 그들이 만들어낸 판타지 서사를 병치한다. 빈약한 프로덕션 디자인, 다소 구시대적인 사운드 이펙트, 혹은 엉망진창인 배우들의 연기 등 영화가 만들어낸 아이들의 상상은 조잡하기 그지없는 결과물로 관객 앞에 당도한다. 하지만, 그렇게 조악하기에 영화는 자신의 허구성이, 또 아이들이 만들어 낸 이야기가 지금-여기에 발붙이고 있다는 것을 드러낸다. 십 대들의 특이한 온라인 사용에 관한 사회문화적 탐구 혹은 극에 대한 몰입을 완전히 배제한 채 이 작품은 아이들의 게시물들이, 또 영화의 방황이 스크린 밖 현실에 관한 미학적 무릎반사임을 계속해서 외치고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 기성세대가 종종 예단하곤 하는 ‘0과 1로 이루어진 디지털 세상을 향한 도피적 망상’은 절대 아닌 셈이다. 그리고, ’리산 시티’니 ‘이능력’이니 영화에서 반복되는 유치찬란한 명사들은 바로 그 지점에서 새로운 의미를 띈다. 목전에 둔 세계를 이해하기 위한 그들만의 수사학, 변해가는 자신과 환경을 제 나름대로 포용하기 위해 축조한 대안적인 언어. 그들이 함께 만들어낸 이세계는 단지 다른 단어들로 묘사한 이 세계였을 뿐이다. 더욱이, 제작진이 아이들에게 세계관에 관한 전체적인 설정을 제공하고 서사적 분기점에 관한 몇 가지 선택지를 제공한다는 커뮤니티의 전제를 고려하면, 어떤 딜레마가 전지적 존재에 의해 선제적으로 주어진다는 점에서 트위터 속 세계나 그들이 당장 밟고 있는 현실이나 아이들에게는 똑같은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은 화면 속 아스라한 텍스트로만 남는 이능력자들의 세계에서 오감의 세계의 파편을 경험한다. 얼굴도 모르는 사람과 관계 맺으며 이타적 사랑으로 향한다. 극 후반부의 첨예한 갈등이 서로에 대한 무조건적 환멸로 이어지기 직전, 한 소녀는 비장한 표정으로 자신은 우정을 믿는다고 말한다. 흔들리는 다른 아이들의 눈동자들. 이윽고, 한 가지 소원만을 들어준다는 세계수 앞에서 남아 있는 인물 모두는 같은 소원을 이야기한다. 모든 존재들이 각자의 생을 자유로이 살아가게 해달라는 바람. 이어, 동화 같은 해피 엔딩을 서술하는 메인 계정의 트윗. 분명 얼굴도 실명도 모르는 한 소녀의 미성숙한 문장이, 그 안에 스민 진심이 타인에게 닿았다. 그 지점에서 아이들은, 또 영화는 매번 질문만을 던지는 세상 앞에 가장 뚜렷한 답은 서로를 맞잡은 손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사회를 해체하여 오류를 짚어내기보다, 사랑하는 법을 목격하는 이 작품은 그래서 매우 소중하고 가치 있다. 어쩌면 영화도 십대들의 트위터 커뮤 같은 것이 아닐까, 하고 느슨하게 생각해 본다. 얼굴만 바꿔가며 찾아오는 동시대적 의제를 이해하기 위해 얼기설기 쌓아 올린 쇼트들, 서로 다른 창작자의 언어와 페이스로 여기 당도하는 씬들, 그리고 스크린을 초월하여 관객들에게 내민 손. 닿았을까, 끝내 고민하는 롤링 크래딧 속 어떤 이름들. 두 시간 동안 지속되는 유치찬란한 연서. 그들의 영화는 누군가에게 닿았을까.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 계정에 방치된 내 글은 누군가에게 닿았을까. 나는 누군가에게 닿을 수 있을까. 혐오와 무지의 시대, 저기 멀리 있는 타인에게 손을 뻗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
yves
2.0
제작 목적과 창작 방식은 지지하나 여러 배우에게 타자기를 넘겼기에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이야기의 파편화를 응집하기 위한 (청소년기에 대한) 연출자의 고찰이 부재하며, 조악한 편집에 두 시간 반이 다소 버겁게 느껴진다
문희원
2.5
일부 평론가, 그리고 소위 말하는 영화의 '지지자'들은 <에스퍼의 빛을> 두고 얘기할 때 이전까지의 정재훈 감독의 비범한 커리어와 오랜 시간에 걸쳐 완성된 이 프로젝트의 기나긴 과정 및 결실을 치켜세운다. 영화가 끝나고 이어진 GV 담화에서도 모더레이터인 송경원 평론가는 "이 영화가 극장개봉까지 상영되는 과정 자체가 대단한 하나의 여정 같았다"라고 표현을 한다. 그러나 감독의 이름 및 프로젝트에 얽힌 복잡다단한 과정을 일절 알지 못하는 제3자인 관객은 과연 그 "대단한 과정"의 일부로 초청받을 권리/자격이 있을까? GV 내용에 따르면, 정재훈 감독은 이것이 여러 청소년 '플레이어'들이 저마다 각자의 이야기를 써서 다양한 형태로 혼합 및 변환해 보고 궁극적으로 영화로 촬영하기까지 하며 스토리텔링에 대한 여러 실험을 해봤다고 한다. 거기에 더해 감독은 스스로 영화 속 세계관에 얽힌 복잡한 설정들을 상세하게 풀어내는데다가, 배우들은 이 과정을 통해 그 시절의 자신들이 어떤 생각 및 이야기를 품고 있었는지 되돌아볼 수 있다는 감동적인 회고까지 남겨주었다. 그렇지만 이 내용은 모두 영화를 보고 난 이후 취득한 후일담일 뿐이다. 백지 상태의 관객이 극장 문을 열고 들어가 <에스퍼의 빛>을 보았을 때, 과연 이 기나긴 여정 속 복잡한 세계관과 인물 하나하나의 서사 및 그곳에 담겼을 감정과 경험을 과연 체험할 수 있을까? 이것이 곧 관객 저마다의 개인적인 해석을 곁들여 스크린 너머의 스토리텔링으로 확장되려면 관객이 그 이야기를 따라갈 수 있는 최소한의 지표는 마련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에스퍼의 빛>은 적어도 내가 보기에 관객이 이야기를 따라갈 수 있게 하는 데에 일절의 관심이 없다. 엄청난 양의 텍스트 안에 담긴 각종 다양한 설정들과, 절대 구분하거나 파악하기 불가능한 개개인의 서사는 물론이고 한순간도 이야기의 형태가 하나로 결집되지 못하고 그 흐름을 따라잡지 못하게 함으로써 영화는 관객을 스토리텔링의 영역에서 철저히 소외시킨다. 이래놓고 영화가 끝난 이후, 감독과 배우들은 이 작업이 각자에게 얼마나 길고 감동적인 여정이었는에 대한 소회를 밝힌다. 마치 영화를 본 우리도 당연히 그 똑같은 감동을 마땅히 느꼈으리라 기대하는 것처럼 말이다. 더군다나, 나는 사전에 'TRPG'나 '자캐커뮤'에 대한 개념도 전혀 알고 있지 못했다. 영화는 당연히 이 개념을 친절히 설명해주지 않지만, 자연스럽게 그에 맞춰 구축된 영화의 형식에 따라 극을 진행시킨다. 물론 이 개념을 사전에 알고 있었다 하더라도, 이토록 의도적으로 불친절하고 사적인 소재의 활용을 얼마나 쉽게 파악하고 따라갈 수 있을까? 그리고 무엇보다, 기본적으로 RPG의 개념은 플레이어의 자유와 선택을 보장하고 영화에서도 이에 따라 실제로 텍스트의 형태로 플레이어의 선택지를 물어보는 순간들이 여러 차례 등장한다. 하지만 이 선택지가 나오는 순간마다 관객이 가담할 수 있는 역할은 없다. 어느 순간에 왜 이런 선택지가 나오지도 모르고, 결국 어떤 선택지가 결정되었는지도 알지 못한 채 그저 영화가 정해준 답대로 따라갈 수밖에 없는 거다. 그래놓고 GV에선 그 RPG에서 이야기를 자유롭게 확장해나가는 자유도 및 가능성에 대한 이야기를 펼쳐놓는다. 여전히 관객이 참여할 지점은 하나도 없다. 게다가 <에스퍼의 빛>은 스스로의 정체성을 "비범하고 괴랄한 괴작"이라고 삼는 데에 굉장한 자부심을 느끼고 있는 듯하다. 영화의 리뷰 예고편을 보면 굉장히 산만하게 끊임없이 반짝이는 이미지 위로 영화에 대한 각종 (혹평 위주의) 반응들이 등장했다가 사라진다. 심지어 예고편에서 등장하는 이미지는 영화에서 나오지도 않는다. 메인 예고편에서도 김병규 평론가의 "모험적 괴작"이라는 짤막한 코멘트만 등장할 뿐, 따로 이것이 대체 어떤 영화인지 파악하는 게 불가능하다. 이렇게 온갖 바이럴한 마케팅으로 신비적이고 괴랄할 거 같은 인상은 일부러 한참 심어주고, 정작 영화를 풀어놓고 보면 관객과 함께 완성해야 할 아름다운 스토리텔링의 여정이라고 포장하려고 한다. 과연 <에스퍼의 빛>은 관객의 담론을 수용하고 이를 새로운 영역으로 확장하는 영화인가? 프로젝트의 출발점과 작품 안에 담긴 이야기 정신에 대한 포부는 철저히 소거한 채 굉장한 '괴작'이라고 각인되길 바라는 이상한 욕망만 남아있진 않은가? 이것이 그들만의 아름다운 워크숍과 여정에 머무르지 않고, 관객이라는 제3자에게까지 전달되어야 할 이유, 근본적으로 시청각적 매체인 영화의 형태로 제공되어야 할 이유는 도대체 무엇인가? 고민의 시간이 길아질 수록, 나와 소통을 거부하는 영화와의 거리는 더 멀어질 뿐이다.
영화를 봅시다
0.5
엑스맨, 릴리슈슈를 꿈꿨으나 8,90년대 전대물과 ebs어린이 드라마보다 못한 수준의 결과물. 이런 장르의 영화는 자칫하면 짜치고 유치해질 수 있기에 세계관, 캐릭터, 스타일 등이 중요하지만 이 영화는 그 무엇 하나 제대로 성취하지 못했다. 세계관은 순전히 그들만의 대환장 파티가 되어 몰입은 커녕 실소를 자아내고 캐릭터들은 단체로 중2병걸린 트위터리안마냥 나와 시종일관 관객에게 항마력 테스트를 시도한다. 영화가 전체적으로 너무 어두워서 제대로 보이지도 않는데 그마저도 조악하다. 배우들의 연기력도 심각한데 사운드 상태까지 좋지 않다. 모든 배우들이 하나같이 발연기를 보여주는 걸 보니 이건 연출의 문제가 아닐까 싶다. 한국영화에서 흔치 않은 시도라는 점을 높게 칭찬해주고 싶었으나 20년전에 나온 <울라불라 블루짱>이나 <요정 컴미>보다 실험 정신이 떨어지는 작품을 호평하자니 힘이 빠진다. 심각한 장면에서 웃음을 터뜨리는 관객도, 이 영화를 견디지 못하고 중간에 상영관을 떠나는 수많은 관객도,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자마자 황급히 자리를 떠나는 관객도, 끝까지 자리는 지켰지만 졸고 있던 관객 모두가 한 마음 한 뜻으로 이 영화를 감상하지 않았을까? 이 영화를 좋게 본 사람들의 의견도 존중하지만 그보다는 먼저 2시간 반동안 정신적 충격을 받은 나 자신부터 위로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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