哀れなるものたち
Poor Things
2023 · ラブロマンス/SF · アメリカ, アイルランド, イギリス
141分 · R18

不幸な女性ベラ(エマ・ストーン)は若くして自らの命を絶ったものの、天才外科医ゴッドウィン・バクスター(ウィレム・デフォー)の手により奇跡的に生き返る。蘇ったベラは世界を自分の目で見たいという欲に突き動かされ、放蕩者の弁護士ダンカン(マーク・ラファロ)の誘いに乗り、大陸横断の旅に出る。ベラは貪欲に世界を吸収するうちに平等と自由を知り、時代の偏見から解き放た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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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4.5
ネタバレがあります!!
심은허
2.0
ネタバレがあります!!
희정뚝
5.0
욕구라는 걸음마부터 욕망이라는 뜀박질까지 우린 어떤 흔적 남겨 인간 되려 하는가. #2023, 28th BIFF
이동진 평론가
3.5
부끄러움을 강요하는 집들을 차례로 벗어난 후 자신만의 거처를 마련하는 자의 기기묘묘한 주유천하.
테일러
1.5
말로만 여성의 해방 결국은 지독하게 남성적인 시선의 남성감독이 상상하는 여성
STONE
3.0
두 번 태어나서 보는 세상은 가여운 것을 품었던 모성의 연민으로 엠마스톤 두 번째 오스카 여우주연상 수상!!!🏆🏆
정환
4.5
세상과 자아를 탐구하기 위해 통제, 제약, 구속으로부터 도망쳐 온 조각상은 세상과 개인의 전락을 몸소 경험하여 진실로 나아가려 한다. 내게 숨을 불어넣고 색을 입혀준 것은 '신'이나, 프랑켄슈타인의 실험, 피그말리온의 기도 따위가 아닌 내가 나를 잉태한 삶이었다는 것만으로도 그녀에게 기이한 탐색의 여정은 무엇보다 고귀해진다. 스포x 마치 AI에게 동화적 톤으로 빅토리아 시대를 배경으로 한 라스 폰 트리에 영화의 이미지를 요구한다면 이런 결괏값이 나오지 않을까? 이 화려한 세트의 색감이 덧대어 가는 과정은, 벨라가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과정을 따라가는 데에 간접적인 도움이 되기도 합니다. 대놓고 허구적이라고 말하는 무대처럼, 촬영은 극단적으로 영화임을 자각하게 만들며 자꾸만 영화와의 거리감을 인식하게 만듭니다. 조명과 의상과 무대, 촬영 무엇 하나 빠지는 것 없지만, 이것들의 비애와, 환희, 각각의 미천함과 고귀함을 극대화해주는 음악이 가장 인상적이었습니다. 윌렘 대포는 그의 커리어가 현 세대 배우 중 누구보다도 화려한 이유를 다시 일깨워줍니다. 마크 러팔로의 연기도 정말 재밌었고 인상적이었지만, 무엇보다 이 영화는 완전한 엠마 스톤의 영화입니다. 그녀가 점차 성장할 때마다 그녀의 몸짓과 표정, 말투가 점진적으로 변화하는 높은 난이도의 정교한 연기가 정말 압도적입니다. 한 세계에 갇혀 산 누군가의 소유물이 세상 밖을 향해 나아간다는 측면에서 올해 나왔던 영화 ‘바비’와 란티모스의 전작들 중에서는 ‘송곳니’가 가장 먼저 떠오르긴 합니다. 더욱 괴상하고 파격적이지만, 강력한 유머를 갖고 있습니다. 불쾌하고 노골적이며 기이한 이 영화는 아무리 저속함을 가볍게 다루겠다고 하지만, 그럴수록 그와 대비되는 영화의 우아함과 고귀함, 아름다움의 농도는 더욱 짙어집니다. 어쩌면 더 동화스러운 버전이 아닐까 싶기도 한 이 영화는 앞으로 요르고스 란티모스 영화 중 최고작으로 뽑게 될 것 같습니다. 적어도 저에겐 그렇습니다. 프랑켄슈타인을 재해석한 원작 '가여운 것들'을 바탕으로 영화는 벨라가 여태껏 보지 못한 세상과 전혀 알 리 없을 이전의 나에 대한 진실, 그리고 나 자신을 찾아가는 여정입니다. 고드윈이 자살한 여인을 의학적으로 되살려 놓았다는 점에서 벨라는 고드윈으로부터 새로운 삶을 부여받았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겁니다. 벨라는 자살한 몸이었던 여인이 임신한 아이의 뇌를 이식하여 다시 태어났습니다. 벨라는 자신이 속해있는 곳 너머의 세상과 자신을 탐구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영화는 계속 벨라를 무언가로 구속하려 하거나, 통제하려 합니다. 약혼을 정한다거나, 상자나 배, 건물들에 가두는 식으로 말이죠. 그녀가 알게 모르게, 때로는 무지해서, 때로는 자의로 그곳으로부터 벗어나려고 합니다. ‘가여운 것들’에서의 프랑켄슈타인은 고드윈으로 묘사되지만, 이 둘은 서로 정반대에 위치해 있습니다. 프랑켄슈타인의 가정적인 집안과는 달리 고드윈은 자상하지 못한 아버지, 부모의 사랑의 부재를 절실히 겪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름조차 부여하지 않았던 자신의 창조물을 유기한 프랑켄슈타인과는 정반대로 고드윈은 자신의 실험으로 되살려낸 ‘벨라’를 딸처럼 여깁니다. 둘의 차이가 있다면 얼핏 전혀 문제가 없어 보이는 프랑켄슈타인의 가정인 점인데 어떻게 다른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을까. 적어도 작가가 집필했을 당시의 가정성에는 당연시하게 되는 성의 역할, 이데올로기가 있었을 것입니다. 메리 셸리는 프랑켄슈타인을 익명으로 출간했었습니다. (이름조차 부여하지 않았던 프랑켄슈타인의 괴물처럼) 셸리는 프랑켄슈타인의 어머니를 아버지와의 채무관계로 이루어졌음을 설정하였고, 언제나 여성은 감사와 의무적인 봉사를 해야만 했던 가정을 그 시대의 가정상으로 대표하여 비난합니다. 어떤 생명을 창조한다는 것으로 신, 자연에게 도전장을 내밀었던 프랑켄슈타인은 바꿔 말하면, 생명을 잉태할 수 있는 여성의 권리에 도전한 것과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가 정복하고 싶었던 세계는 여성화된 자연이며, 셸리에게 이러한 정복은 당연시했왔던 당시의 남성 중심 사회의 만연함으로 의미를 확장하는 것이었죠. 프랑켄슈타인과는 정반대에 위치한 고드윈에게는 부성애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또한 신의 영역에 도전한 (또한, 스스로를 신이라 일컫는) 오만한 인간에 불과합니다. 고드윈은 그들을 괴물로 받아들일 세상으로부터 벨라를 안전한 새장에 가두었습니다. 그러나 정작 밖이 두려워 나가고 싶어 하지 않아 하는 것은 고드윈 자신이었습니다. 세상으로 나가고 싶지 않은 본인의 두려움으로 세상을 마주하고 싶은 벨라를 강제시킵니다. 벨라는 과연 고드윈의 조각상일까. 그녀의 생명력은 어디서부터 왔을까. 그녀의 정체성, 근본은 무엇인 걸까. 벨라는 세상과 자아를 탐색하기 위해 통제와 제약, 구속으로부터 도망치기로 했을 때, 그녀에게는 무엇보다도 강력한 의지가 있습니다. 그 의지는 100%의 온전한 나 자신을 찾는 거겠죠. 주체성이 결여된 사람에서 자유와 나를 찾는 것. 내가 누구인지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스스로 나를 찾아 나서는 것은 어쩌면, 내가 나를 스스로 창조하는 것과도 같을 수도 있을 겁니다. 흑백의 삶이었던 벨라는 점차 세상의 색채를 음미합니다. 다소 여정이 탐색(여색)적이기도 하지만, 그녀가 성적으로나, 세상의 일부들을 마주함에 비로소 눈을 뜨게 된 것들은 모두 그녀의 의지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누군가의 노래를 들으며 눈시울이 붉어지거나, 세상의 끔찍한 밑바닥을 목격했을 때처럼요. 그렇게 벨라는 스스로 나라는 사람을 찾아갑니다. 개인의 정체성을 만들어갑니다. 즉, 벨라는 스스로를 재창조합니다. 그렇지만, 사실 생각해 보면 피그말리온(의 기도)이나 프랑켄슈타인은 자신의 조각상에게 생명을 불어넣었던 것이었겠지만, 벨라의 몸은 이전부터 있던 것입니다. 따라서 벨라는 고드윈의 조각상이거나 창조물이라는 말은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리고 벨라의 뇌는 이전의 몸이었던 여인이 임신한 아이로부터 이식한 것입니다. 그러니, 그녀는 이미 삶을 잉태했던 (과장하여 창조했던) 경험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결국 내게 숨을 불어넣고 색을 입혀준 것은 '신'이나, 프랑켄슈타인의 실험이나, 피그말리온의 기도 따위가 아닌 내가 나를 잉태한 삶이었다는 것이었습니다. 한편으로는 우리 모두 누군가의 조각상이지만, 동시에 무언가(자아, 정체성)를 창조하기도 합니다. 그것을 깨달아가는 벨라의 기이한 탐색의 여정은 제아무리 웃기거나 이상하거나 더럽거나 슬퍼도 결국은 무엇보다 고귀해집니다. 냉소적인 웃음거리가 가득하고 수위도 강하며 정말 비현실적이고 동화스러운 이야기지만, 한편으로 또 다르게 해석하면, 예술에 관한 이야기로도 볼 수 있을 정도로 깊이를 갖춘 영화이기도 합니다. 저속적이고 불쾌할 수 있는 것들, 우스꽝스러운 것들 사이에서도 끊임없이 품위를 잃지 않는 영화의 톤을 다루는 솜씨가 놀랍습니다. 누군가를 출산하는 것에 가장 커다란 고통이 수반되는 것처럼, 누구보다 아파했기에 치유할 수 있는 것 아니겠어요. 고통, 슬픔, 타락까지도 세상의 모든 것을 경험하라는 스위니가 벨라에게 했던 말처럼요. (좋은 대사들이 많은 ‘가여운 것들’이지만 이 대사를 가장 좋아합니다.) 가장 솔직한 나를 발견하고, 아파하고, 힘겨워하고, 환희를 찾고 희망을 찾는 것. 결국 나를 찾았다는 것은 나를 스스로 빚어내었다는 말과 같습니다. 이 영화는 모든 이들의 ‘창조’를 응원하는 영화이기도 합니다. 누군가를 창조하라는 오만함이 아니고,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결코 피조물을 온전히 소유하거나 다루지 못할 것이라는 영화의 태도입니다. 그러니, ‘가여운 것들’은 나를 찾아 헤매는 모든 이들에게 바치는 정신 나간 영화 한 편입니다. + 근래에 본 것 중 가장 아름다운 크레딧 영상이 아니었나
감정
2.0
여성 해방(특히 섹슈얼리티)를 논하며 월경은 다루지 않은 뻔뻔함. 소아성애적 코드도 짙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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