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춘희4.0< 나의 이름은>(Árva, 네메스 라즐로, 2025) 첫 장편 <사울의 아들>로 일약 스타덤에 올랐던 네메스 감독의 신작. 나의 영화 공부의 시원이 되는 작품들 중 하나의 감독인만큼 이번 영화제에서도 당연히 포기하지 않고 골랐다. 이번 영화는 폭력의 원죄에 대해 다룬다. 주인공인 12세 소년 안도르는 어머니와 단 둘이 산다. 아버지는 나찌 강제수용소에서 사라졌다. 안도르는 매일같이 아버지의 귀환을 기다리며 아파트 지하실에서 아버지에게 응답받지 못할 음성편지를 남긴다. 인간에게 아버지는 자신을 만든 두 명의 인간 중 한 명이다. 그렇기에 인간이라면 자기 스스로도 자연스레 많은 것을 아버지에게 의탁했으리라 생각한다. 안도르 역시 마찬가지다. 하지만 아브라삭스가 알을 깨고 나오듯이, 인간의 주요 성숙 과정 중 하나는 살부 혹은 살모다. 부모와 자신이 다른 인간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 그럼으로써 자신이라는 주체를 확립하는 것. 하지만 이 영화의 원제처럼 고아에게 그런 기회는 주어지지 않는다. 안도르가 영아 시절을 함께 보낸 고아원의 아이들, 그 중 부모가 찾아오지 않은 - 혹은 못한 - 아이들에게 그 기회는 박탈된다. 그런 점에서 안도르는 고아다. 어머니가 있음에 그는 당연하게도 고아는 아니다. 그렇지만 안도르의 시선에서 남편 없이 홀로 살아가는 어머니는 극복의 대상이 아닌 연민의 대상에 가깝다. 극복해야할 부모는 사라졌거나 그 대상이 되지 못한다. 그런 안도르에게 아버지가 나타난다. 놀랍게도 그는 살아남아 돌아온 것이 아니라, 안도르의 탄생 이후 늘 존재하고 있었다. 그렇게 돌아온 친부를 안도르는 부정한다. 그는 폭력이기 때문이다. 그를 받아들이는 순간 자신의 존재는 절멸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순식간에 안도르를 휘감는다. 반대로 인간은 없는 존재를 너무도 쉽게 추앙하고는 한다. 안도르가 그랬고, 어머니 클라라 역시 마찬가지다. 안도르가 험한 말을 쓰는 순간 클라라는 말한다. “히르쉬라면 그렇게 말하지 않았을거야.” 여기서 갈등은 배태한다. 매정한 관객의 시선으로 본다면, 답은 사실 간단하다. 베렌드라는 새로운 성을 받아들이는 것. 그것이 안도르의 삶을 쉽게 보전하는 일일테니까. 그렇지만 안도르는 끝없이 저항한다. 자신과 너무도 다른, 새로운 삶을 지향해야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틈입하는 한 순간의 시퀀스가 있다. 울분을 삭히며 거리를 돌아다니던 안도르에게 한 청년이 온다. 청년의 패거리는 안도르의 유대어 책을 빼앗고, 권투 글러브를 끼고 거리의 싸움판에 동참할 것을 강요한다. 앞서 안도르는 미하일이 초청한 복싱 시합 관람을 이미 거부했다는 점도 여기서 참고해야만 한다. 가까스로 안도르는 패거리에서 벗어나지만, 청년은 외친다. “너의 본성을 외면하지 마라!” 결말의 선택은 여기서 갈린 것일지도 모른다. 안도르는 끝내 폭력을 거부하는 데 성공한다. 하지만 그 거부는 과연 성공적으로 끝날 수 있을까. 결국 안도르는 폭력을 받아들이게 될 수도 있지 않을까. 다만 희망을 갖게 하는 건 사리의 할아버지의 말이다. “애굽을 떠난 사람들 중 아이들만이 약속의 땅에 도착했다.” 홀로코스트-공산독재-민주화의 열망. 이 영화를 휘감은 역사적 맥락은 이렇게 안도르에게 모인다. p.s. 엄밀히 말하면 이 영화의 제목은 ‘나의 이름은‘보다는 ‘나의 성은’이 맞다고 생각한다. (물론 성을 포함하는 개념이겠지만) 굳이 붙이는 이 각주는 헝가리 영화를 다룰 때 한국에서 쓰는 인명의 문제 때문이다. 헝가리는 타 서양국가와 달리 어찌보면 동양식이라 할 수 있는 성-이름 체계의 인명을 사용한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영어 중역의 한계인지 몰라도 늘 이름-성의 일반적인 서양식 이름 체계를 사용한다. 이 영화의 감독 역시 통상 한국에서는 라슬로 네메스로 통칭되지만 실제로는 네메스 라슬로다. 내가 아는 단 두 명의 헝가리 감독 중 하나인 에네디 일디코 역시 에네디가 성이지만 한국에선 통상 일디코 에네디로 통칭된다. 단순 감독에 대한 이야기뿐만 아니라 영화에서도 이상한 지점이 도드라지게 되는데 분명 대사는 인물들의 이름에 대해 베렌드 미하일, 히르쉬 안도르 등의 단어로 나오는 걸 굳이 안도르 히르쉬, 베렌드 미하일로 자막을 다는 이상한 상황이 반복된다. 감히 추론하자면 영어 기반의 자료들은 대부분 이름-성으로 써있는 걸 그대로 가져다 쓰는 게으른 행태의 반복이 가져온 무지성 아닐지. 더욱이 우리나라는 헝가리와 동일한 성-이름 인명을 사용하는 국가이므로 더욱 더 이해가 가지 않는 행태일뿐이라 아쉬울 뿐이다.いいね11コメント0
심주형
4.0
아버지가 물탱크에 갇힌건가요??
이승희
4.5
시대의 역사를 반영하듯이 열정적으로 폭발하다가 냉정하리만큼 차갑고 소름돋게 식어버린다
이춘희
4.0
< 나의 이름은>(Árva, 네메스 라즐로, 2025) 첫 장편 <사울의 아들>로 일약 스타덤에 올랐던 네메스 감독의 신작. 나의 영화 공부의 시원이 되는 작품들 중 하나의 감독인만큼 이번 영화제에서도 당연히 포기하지 않고 골랐다. 이번 영화는 폭력의 원죄에 대해 다룬다. 주인공인 12세 소년 안도르는 어머니와 단 둘이 산다. 아버지는 나찌 강제수용소에서 사라졌다. 안도르는 매일같이 아버지의 귀환을 기다리며 아파트 지하실에서 아버지에게 응답받지 못할 음성편지를 남긴다. 인간에게 아버지는 자신을 만든 두 명의 인간 중 한 명이다. 그렇기에 인간이라면 자기 스스로도 자연스레 많은 것을 아버지에게 의탁했으리라 생각한다. 안도르 역시 마찬가지다. 하지만 아브라삭스가 알을 깨고 나오듯이, 인간의 주요 성숙 과정 중 하나는 살부 혹은 살모다. 부모와 자신이 다른 인간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 그럼으로써 자신이라는 주체를 확립하는 것. 하지만 이 영화의 원제처럼 고아에게 그런 기회는 주어지지 않는다. 안도르가 영아 시절을 함께 보낸 고아원의 아이들, 그 중 부모가 찾아오지 않은 - 혹은 못한 - 아이들에게 그 기회는 박탈된다. 그런 점에서 안도르는 고아다. 어머니가 있음에 그는 당연하게도 고아는 아니다. 그렇지만 안도르의 시선에서 남편 없이 홀로 살아가는 어머니는 극복의 대상이 아닌 연민의 대상에 가깝다. 극복해야할 부모는 사라졌거나 그 대상이 되지 못한다. 그런 안도르에게 아버지가 나타난다. 놀랍게도 그는 살아남아 돌아온 것이 아니라, 안도르의 탄생 이후 늘 존재하고 있었다. 그렇게 돌아온 친부를 안도르는 부정한다. 그는 폭력이기 때문이다. 그를 받아들이는 순간 자신의 존재는 절멸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순식간에 안도르를 휘감는다. 반대로 인간은 없는 존재를 너무도 쉽게 추앙하고는 한다. 안도르가 그랬고, 어머니 클라라 역시 마찬가지다. 안도르가 험한 말을 쓰는 순간 클라라는 말한다. “히르쉬라면 그렇게 말하지 않았을거야.” 여기서 갈등은 배태한다. 매정한 관객의 시선으로 본다면, 답은 사실 간단하다. 베렌드라는 새로운 성을 받아들이는 것. 그것이 안도르의 삶을 쉽게 보전하는 일일테니까. 그렇지만 안도르는 끝없이 저항한다. 자신과 너무도 다른, 새로운 삶을 지향해야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틈입하는 한 순간의 시퀀스가 있다. 울분을 삭히며 거리를 돌아다니던 안도르에게 한 청년이 온다. 청년의 패거리는 안도르의 유대어 책을 빼앗고, 권투 글러브를 끼고 거리의 싸움판에 동참할 것을 강요한다. 앞서 안도르는 미하일이 초청한 복싱 시합 관람을 이미 거부했다는 점도 여기서 참고해야만 한다. 가까스로 안도르는 패거리에서 벗어나지만, 청년은 외친다. “너의 본성을 외면하지 마라!” 결말의 선택은 여기서 갈린 것일지도 모른다. 안도르는 끝내 폭력을 거부하는 데 성공한다. 하지만 그 거부는 과연 성공적으로 끝날 수 있을까. 결국 안도르는 폭력을 받아들이게 될 수도 있지 않을까. 다만 희망을 갖게 하는 건 사리의 할아버지의 말이다. “애굽을 떠난 사람들 중 아이들만이 약속의 땅에 도착했다.” 홀로코스트-공산독재-민주화의 열망. 이 영화를 휘감은 역사적 맥락은 이렇게 안도르에게 모인다. p.s. 엄밀히 말하면 이 영화의 제목은 ‘나의 이름은‘보다는 ‘나의 성은’이 맞다고 생각한다. (물론 성을 포함하는 개념이겠지만) 굳이 붙이는 이 각주는 헝가리 영화를 다룰 때 한국에서 쓰는 인명의 문제 때문이다. 헝가리는 타 서양국가와 달리 어찌보면 동양식이라 할 수 있는 성-이름 체계의 인명을 사용한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영어 중역의 한계인지 몰라도 늘 이름-성의 일반적인 서양식 이름 체계를 사용한다. 이 영화의 감독 역시 통상 한국에서는 라슬로 네메스로 통칭되지만 실제로는 네메스 라슬로다. 내가 아는 단 두 명의 헝가리 감독 중 하나인 에네디 일디코 역시 에네디가 성이지만 한국에선 통상 일디코 에네디로 통칭된다. 단순 감독에 대한 이야기뿐만 아니라 영화에서도 이상한 지점이 도드라지게 되는데 분명 대사는 인물들의 이름에 대해 베렌드 미하일, 히르쉬 안도르 등의 단어로 나오는 걸 굳이 안도르 히르쉬, 베렌드 미하일로 자막을 다는 이상한 상황이 반복된다. 감히 추론하자면 영어 기반의 자료들은 대부분 이름-성으로 써있는 걸 그대로 가져다 쓰는 게으른 행태의 반복이 가져온 무지성 아닐지. 더욱이 우리나라는 헝가리와 동일한 성-이름 인명을 사용하는 국가이므로 더욱 더 이해가 가지 않는 행태일뿐이라 아쉬울 뿐이다.
4.71km
3.0
아버지 날 보고 있다면 정답을 알려줘.
이민허
4.5
그 사람을 미워하면 너도 그만큼 닮아갈 거야
OhJoonHo
4.0
자유를 얻은 대가로 잃은 이름인가, 이름을 얻은 대가로 잃은 자유인가.
불시착외계인
3.5
나의 삶 전부이자 나의 일상 + 이름을 지킨다는 건 나의 뿌리이자 정체성, 나의 조국, 나의 가족을 지키는 것
영화 한 잔 A cup of film
3.5
현실 딥다크 헝가리판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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