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yDay4.0“조용히 퍼져가는 폭력의 잠재성” 이 영화를 감상하기에 앞서, ‘러브 디아즈’ 감독님이 만들어 낸 세상에 발을 들이는 것은 처음이었다. 러닝 타임이 길기로 유명한 감독님의 작품들 중에서 그나마 짧게 나왔기에 조심스레 도전해 보았다. 앞서 말했듯이 감독님의 작품들 중 내가 만난 첫 번째 작품이기에 다른 작품들과의 어떠한 차별점을 찾으며 볼 수는 없겠지만 이 작품 자체의 연출과 같은 표현과 감독님의 스타일을 느껴보려 노력하였다. 3시간가량 사용된 인위적인 사운드보다는 자연에서 들을 수 있는 바람 소리, 파도 소리로 다큐멘터리처럼 보이는 효과를 가져온다. 식민지 지배, 토착민들의 학살, 의식을 위한 돼지의 도살 등과 같은 폭력의 그림자가 드리우고 화면 속에는 그 후나 전의 모습들이 담겨있다. 직접적인 표현보다는 간접적으로 일어난 전후의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보이지 않는 잠재된 폭력에 대해 강조한다. 이러한 폭력은 현재에 와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마지막 내레이션의 대사도 마음에 들었다. 한 인물의 위대한 업적인 역사와 다른 부분과 함께 마주하면서 겹쳐본 이날의 시간이 체험적이면서도 재밌었고 색다른 경험이었기에 잔상에 오래 남는다. - 2025.09.19/ 30th BIFF/ 네 번째 관람 작품 -いいね28コメント0
Jay Oh3.5나아감 없는 여정. 세상을 가로지르며 폭력과 고통의 여파를 남겼던 그것은 뭐였길래. Is this not a world bruised in the name of chasing phantoms?いいね20コメント0
오세일4.0<마젤란>은 우리가 줄곧 봐왔던 전형적인 라브 디아즈의 세계로부터 한 발짝 떨어져 있는 작품이다, 혹은 그런 작품처럼 보인다. 필리핀이란 자국의 특수성에서 잠시 벗어난 공간(포르투갈)부터 일단 이질적이지만, 결국 포르투갈의 항해사 마젤란의 욕망적 모험은 다시 그의 카메라 거쳐 필리핀으로 회귀한다. 서로의 존재를 (거의) 알지도 못하던 16세기 포르투갈과 필리핀이라는 분리된 대륙은, '식민'이란 서구의 열망으로 불완전하게 잇대어진다. 그리고 영화 속에서 재현되는ㅡ대략 500년 전에 벌어졌던ㅡ이 인류적 비극은, 마치 21세기 현대에서 필리핀이 마주하고 있는 독재의 위기와 맞닿아 있는 것처럼 보인다. 다만 마젤란의 욕망은 보다 더 원초적인 모험을 경유한다. 새로운 세계의 틈새로 빨려 들어가는 듯한 바다의 항해. 나라의 지리적 구애를 넘어서는 16세기 폭력의 역사는 하늘이 아닌 바다로부터 감염된다. <마젤란>이 이질적으로 느껴지는 또 하나의 이유는 근본적인 연출 방식의 차이에서 발생한다. 그러니까, <마젤란>은 지극히 영화적이어서 어색한 작품이다 (이 이론이 성립하기 위해선 먼저 영화의 감독이 '라브 디아즈'임을 인지해야 한다). 이를테면 굳이 마젤란의 죽음을 클로즈업으로 한 번 더 관객에게 상기시키거나, 시점의 구도를 변경하는 몇몇 씬의 상투적인 연출 등을 말할 수 있겠다. 이는 분명 라브 디아즈의 세계에서 쉽사리 보기 힘든 순간이다. 롱테이크로 자국의 역사에 새겨진 비극, 혹은 사건의 현장에 뒤늦게 방문하여 오랜 시간 동안 머물면서ㅡ이미 벌어진ㅡ죽음의 기운을 기어이 관객들에게 전이시키는 미학이 곧 그가 세계를 건설하는 방식이었다. 하지만 <마젤란>은 상대적으로 짧은 러닝 타임과 함께 (약간의) 오락적인 서사가 가미된다. 물론 그의 인장은 여전히 건재하지만, 그럼에도 <마젤란>을 보며 느껴지는 의아함은 끝내 마음 한편을 떠나지 않는다. 개인적으로 로베르 브레송의 <호수의 란슬롯>이 생각났다. 이미 폭력이 한차례 휩쓸고 지나간 자리를 침묵으로 응시하는 카메라, (어쩔 수 없이 폭력의 순간을 담아내야 한다면) 폭력의 찰나가 전시되는 이미지를 회피하고 간접적인 폭력의 영향을 내포하는 숏과 사운드의 마찰음으로 그 자리를 대신하는 기법이 브레송의 그것을 닮아 있다. 어쩌면 <마젤란>은 라브 디아즈의 미학적 분기점이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필리핀의 내수적인 역사에서 벗어나 미지의 대륙으로 항해를 떠나는 그의 영화적 모험. 하지만 라브 디아즈의 항해는 마젤란의 지배적 욕망과는 달리 다시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올 것이다. 약탈이 아닌 시야의 확장을 위한 항해. 포르투갈을 경유한 그의 다음 목적지는 과연 어디일까. 라브 디아즈의 차기작이 궁금해진다.いいね4コメント2
s au3.0기본 체급이 다르게 훌륭한 촬영 그런데 후반으로 갈수록 뭔가 살아있는것 같지 않고 영화에 힘이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라의 나신조차 소품처럼 인위적으로 놓여있다는 느낌.いいね3コメント0
박상민2.51. 마젤란(가엘 가르시아 베르날)은 스페인으로 돌아오기 전의 파견지에서, 항해하며 지냈던 배 위에서, 마침내 도착한 필리핀 해안 마을에서 의식(ritual)을 치른다. 성상을 놓고, 십자가를 놓고 기도를 올리거나 고해성사를 하거나 아내의 유령을 마주하거나 선상 판결 후 참수를 진행하거나... 일종의 의식이 계속 치뤄진다. 이러한 의식은 동남아시아의 원주민들도 마찬가지로 치른다. 백인들이 쳐들어오자 몸에 무언가를 바르며 하늘을 향해 기도하고, 돼지와 아이들을 바다에 제물로 바치는 의식을 치르고, 전투 이후엔 참수된 마젤란의 머리를 들고 마을 모두가 환호하기도 한다. 성상을 모시고, 누군가를 죽이며, 하늘을 향해 기도를 올리는 행위의 변주/반복 속에서 마젤란과 원주민들은 데칼코마니를 이룬다. 2. <마젤란>의 장면들은 폭력이 벌어지기 직전과 폭력이 벌어진 후를 비춘다. 이미 전투가 벌어진 후 널브러진 시신들이 해안을 메우고, 참수를 위해 도끼를 집어올린 숏은 이를 바라보는 마젤란의 숏으로 이어지며, 제물을 바치는 원주민들의 의식도 돼지를 향해 칼을 치켜든 주술사를 보여주는 숏에서 이미 피범벅이 된 주술사를 보여주는 숏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폭력 자체를 보여주지 않을 뿐, 이 전후 장면들의 연결 속에서 관객은 폭력의 이미지를 상상하게 된다. 오히려 폭력의 여파를 그리는 방식에 있어서 가장 탁월했던 장면은 스페인의 해안에서 마젤란이 사망한 선원들의 미망인들과 마주치는 장면이다. 죽음은 벌어졌지만, 관객에게는 죽음이 아니라 죽음 이후를 살아내야 하는 이들이 보인다. 폭력의 여파는 폭력의 현장이 아니라 그곳에서 떨어진, 하지만 영향은 받는 장소에서 그려져야한다. 3. 마젤란의 부인(안젤라 라모스)의 유령이 갑자기 등장한다던지,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마젤란의 노예였던 엔리케의 시점과 나레이션으로 급격히 전환된다던지 하는 지점에 충분한 설득력이 없다. 마젤란의 부인 시점에서 전개되는 9시간 분량의 감독판이 있다는 얘기가 있던데 그걸 확인해야할 듯하다. + 엔리케의 시점은 <마젤란> 이전에 키들랏 타히믹의 <발릭바얀#1 과잉 개발의 기억 리덕스iii>라는 훨씬 뛰어난 영화에서 이미 쓰인 바 있다.いいね3コメント0
김병석3.5역사는 이미 완결된 과거이기에, 수 세기 뒤에 방문한 현대 영화는 특정 순간을 선택하고 임의로 재연하는 특권을 가진다. 사건을 찬찬히 나열해 보자 드러나는 폭력의 얼룩들, 십자가나 토템이나 피를 기둥 삼아 존재하기는 매한가지더라. 그제서야 깨닫는 것이다.いいね3コメント0
시나브로3.0서구세계의 약진의 발판이라고 여겨졌던 신항로개척 시기는 실은 정체의 연속이었다. 발전이란 몇몇 기득권만이 독점하였던 열매였고, 그 대가를 지불하는 과정에서 부상당하였던 수많은 영혼들에게 있어 그 시기란 냉엄하게 중지된 시간이었을 것이다. 수 차례의 원정에서 돌이킬 수 없는 부상을 입었던 마젤란도 이미 기동력을 잃어버린 몸이 된지 오래였으나, 그는 자신을 이렇게 만든 제국주의라는 화마를 억제하기는 커녕 그 고삐를 움켜쥠으로써, 자신의 멈춰세워진 시간을 재가동시키고자 하였다. 허나 다른 이의 발목을 잘라내어 그 속도를 취하려 든다 한들, 약탈자에게 있어 시간의 진전은 주어지지 않는다. 한 사람의 전진을 위하여 먹혀버렸던 다른 이들의 시간의 총합이 더욱 무거웠기에, 마젤란이 그토록 바랬던 시간의 가속은 일어나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영화가 시종일관 유지하여 파훼되지 않는 느린 페이스는, 당시 서구세계가 발전이라 칭하였던 항로의 실상에 대한 냉소적인 고발로서 기능한다. 그리고 마젤란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나아감을 위하여 다른 이의 시간을 지불하기로 선택하였던 엔리케에게조차도 자유의 빛은 내리쪼이지 않을 것이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자유민이 되지 못하였던 그는, 그저 섬기는 주인을 바꾸었을 뿐이다.いいね3コメント0
MayDay
4.0
“조용히 퍼져가는 폭력의 잠재성” 이 영화를 감상하기에 앞서, ‘러브 디아즈’ 감독님이 만들어 낸 세상에 발을 들이는 것은 처음이었다. 러닝 타임이 길기로 유명한 감독님의 작품들 중에서 그나마 짧게 나왔기에 조심스레 도전해 보았다. 앞서 말했듯이 감독님의 작품들 중 내가 만난 첫 번째 작품이기에 다른 작품들과의 어떠한 차별점을 찾으며 볼 수는 없겠지만 이 작품 자체의 연출과 같은 표현과 감독님의 스타일을 느껴보려 노력하였다. 3시간가량 사용된 인위적인 사운드보다는 자연에서 들을 수 있는 바람 소리, 파도 소리로 다큐멘터리처럼 보이는 효과를 가져온다. 식민지 지배, 토착민들의 학살, 의식을 위한 돼지의 도살 등과 같은 폭력의 그림자가 드리우고 화면 속에는 그 후나 전의 모습들이 담겨있다. 직접적인 표현보다는 간접적으로 일어난 전후의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보이지 않는 잠재된 폭력에 대해 강조한다. 이러한 폭력은 현재에 와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마지막 내레이션의 대사도 마음에 들었다. 한 인물의 위대한 업적인 역사와 다른 부분과 함께 마주하면서 겹쳐본 이날의 시간이 체험적이면서도 재밌었고 색다른 경험이었기에 잔상에 오래 남는다. - 2025.09.19/ 30th BIFF/ 네 번째 관람 작품 -
Jay Oh
3.5
나아감 없는 여정. 세상을 가로지르며 폭력과 고통의 여파를 남겼던 그것은 뭐였길래. Is this not a world bruised in the name of chasing phantoms?
상어
3.5
여행과나날 보다가 쳐자놓고 라브디아즈보면서 1초도안졸았음 ㄹㅈㄷ
오세일
4.0
<마젤란>은 우리가 줄곧 봐왔던 전형적인 라브 디아즈의 세계로부터 한 발짝 떨어져 있는 작품이다, 혹은 그런 작품처럼 보인다. 필리핀이란 자국의 특수성에서 잠시 벗어난 공간(포르투갈)부터 일단 이질적이지만, 결국 포르투갈의 항해사 마젤란의 욕망적 모험은 다시 그의 카메라 거쳐 필리핀으로 회귀한다. 서로의 존재를 (거의) 알지도 못하던 16세기 포르투갈과 필리핀이라는 분리된 대륙은, '식민'이란 서구의 열망으로 불완전하게 잇대어진다. 그리고 영화 속에서 재현되는ㅡ대략 500년 전에 벌어졌던ㅡ이 인류적 비극은, 마치 21세기 현대에서 필리핀이 마주하고 있는 독재의 위기와 맞닿아 있는 것처럼 보인다. 다만 마젤란의 욕망은 보다 더 원초적인 모험을 경유한다. 새로운 세계의 틈새로 빨려 들어가는 듯한 바다의 항해. 나라의 지리적 구애를 넘어서는 16세기 폭력의 역사는 하늘이 아닌 바다로부터 감염된다. <마젤란>이 이질적으로 느껴지는 또 하나의 이유는 근본적인 연출 방식의 차이에서 발생한다. 그러니까, <마젤란>은 지극히 영화적이어서 어색한 작품이다 (이 이론이 성립하기 위해선 먼저 영화의 감독이 '라브 디아즈'임을 인지해야 한다). 이를테면 굳이 마젤란의 죽음을 클로즈업으로 한 번 더 관객에게 상기시키거나, 시점의 구도를 변경하는 몇몇 씬의 상투적인 연출 등을 말할 수 있겠다. 이는 분명 라브 디아즈의 세계에서 쉽사리 보기 힘든 순간이다. 롱테이크로 자국의 역사에 새겨진 비극, 혹은 사건의 현장에 뒤늦게 방문하여 오랜 시간 동안 머물면서ㅡ이미 벌어진ㅡ죽음의 기운을 기어이 관객들에게 전이시키는 미학이 곧 그가 세계를 건설하는 방식이었다. 하지만 <마젤란>은 상대적으로 짧은 러닝 타임과 함께 (약간의) 오락적인 서사가 가미된다. 물론 그의 인장은 여전히 건재하지만, 그럼에도 <마젤란>을 보며 느껴지는 의아함은 끝내 마음 한편을 떠나지 않는다. 개인적으로 로베르 브레송의 <호수의 란슬롯>이 생각났다. 이미 폭력이 한차례 휩쓸고 지나간 자리를 침묵으로 응시하는 카메라, (어쩔 수 없이 폭력의 순간을 담아내야 한다면) 폭력의 찰나가 전시되는 이미지를 회피하고 간접적인 폭력의 영향을 내포하는 숏과 사운드의 마찰음으로 그 자리를 대신하는 기법이 브레송의 그것을 닮아 있다. 어쩌면 <마젤란>은 라브 디아즈의 미학적 분기점이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필리핀의 내수적인 역사에서 벗어나 미지의 대륙으로 항해를 떠나는 그의 영화적 모험. 하지만 라브 디아즈의 항해는 마젤란의 지배적 욕망과는 달리 다시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올 것이다. 약탈이 아닌 시야의 확장을 위한 항해. 포르투갈을 경유한 그의 다음 목적지는 과연 어디일까. 라브 디아즈의 차기작이 궁금해진다.
s au
3.0
기본 체급이 다르게 훌륭한 촬영 그런데 후반으로 갈수록 뭔가 살아있는것 같지 않고 영화에 힘이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라의 나신조차 소품처럼 인위적으로 놓여있다는 느낌.
박상민
2.5
1. 마젤란(가엘 가르시아 베르날)은 스페인으로 돌아오기 전의 파견지에서, 항해하며 지냈던 배 위에서, 마침내 도착한 필리핀 해안 마을에서 의식(ritual)을 치른다. 성상을 놓고, 십자가를 놓고 기도를 올리거나 고해성사를 하거나 아내의 유령을 마주하거나 선상 판결 후 참수를 진행하거나... 일종의 의식이 계속 치뤄진다. 이러한 의식은 동남아시아의 원주민들도 마찬가지로 치른다. 백인들이 쳐들어오자 몸에 무언가를 바르며 하늘을 향해 기도하고, 돼지와 아이들을 바다에 제물로 바치는 의식을 치르고, 전투 이후엔 참수된 마젤란의 머리를 들고 마을 모두가 환호하기도 한다. 성상을 모시고, 누군가를 죽이며, 하늘을 향해 기도를 올리는 행위의 변주/반복 속에서 마젤란과 원주민들은 데칼코마니를 이룬다. 2. <마젤란>의 장면들은 폭력이 벌어지기 직전과 폭력이 벌어진 후를 비춘다. 이미 전투가 벌어진 후 널브러진 시신들이 해안을 메우고, 참수를 위해 도끼를 집어올린 숏은 이를 바라보는 마젤란의 숏으로 이어지며, 제물을 바치는 원주민들의 의식도 돼지를 향해 칼을 치켜든 주술사를 보여주는 숏에서 이미 피범벅이 된 주술사를 보여주는 숏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폭력 자체를 보여주지 않을 뿐, 이 전후 장면들의 연결 속에서 관객은 폭력의 이미지를 상상하게 된다. 오히려 폭력의 여파를 그리는 방식에 있어서 가장 탁월했던 장면은 스페인의 해안에서 마젤란이 사망한 선원들의 미망인들과 마주치는 장면이다. 죽음은 벌어졌지만, 관객에게는 죽음이 아니라 죽음 이후를 살아내야 하는 이들이 보인다. 폭력의 여파는 폭력의 현장이 아니라 그곳에서 떨어진, 하지만 영향은 받는 장소에서 그려져야한다. 3. 마젤란의 부인(안젤라 라모스)의 유령이 갑자기 등장한다던지,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마젤란의 노예였던 엔리케의 시점과 나레이션으로 급격히 전환된다던지 하는 지점에 충분한 설득력이 없다. 마젤란의 부인 시점에서 전개되는 9시간 분량의 감독판이 있다는 얘기가 있던데 그걸 확인해야할 듯하다. + 엔리케의 시점은 <마젤란> 이전에 키들랏 타히믹의 <발릭바얀#1 과잉 개발의 기억 리덕스iii>라는 훨씬 뛰어난 영화에서 이미 쓰인 바 있다.
김병석
3.5
역사는 이미 완결된 과거이기에, 수 세기 뒤에 방문한 현대 영화는 특정 순간을 선택하고 임의로 재연하는 특권을 가진다. 사건을 찬찬히 나열해 보자 드러나는 폭력의 얼룩들, 십자가나 토템이나 피를 기둥 삼아 존재하기는 매한가지더라. 그제서야 깨닫는 것이다.
시나브로
3.0
서구세계의 약진의 발판이라고 여겨졌던 신항로개척 시기는 실은 정체의 연속이었다. 발전이란 몇몇 기득권만이 독점하였던 열매였고, 그 대가를 지불하는 과정에서 부상당하였던 수많은 영혼들에게 있어 그 시기란 냉엄하게 중지된 시간이었을 것이다. 수 차례의 원정에서 돌이킬 수 없는 부상을 입었던 마젤란도 이미 기동력을 잃어버린 몸이 된지 오래였으나, 그는 자신을 이렇게 만든 제국주의라는 화마를 억제하기는 커녕 그 고삐를 움켜쥠으로써, 자신의 멈춰세워진 시간을 재가동시키고자 하였다. 허나 다른 이의 발목을 잘라내어 그 속도를 취하려 든다 한들, 약탈자에게 있어 시간의 진전은 주어지지 않는다. 한 사람의 전진을 위하여 먹혀버렸던 다른 이들의 시간의 총합이 더욱 무거웠기에, 마젤란이 그토록 바랬던 시간의 가속은 일어나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영화가 시종일관 유지하여 파훼되지 않는 느린 페이스는, 당시 서구세계가 발전이라 칭하였던 항로의 실상에 대한 냉소적인 고발로서 기능한다. 그리고 마젤란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나아감을 위하여 다른 이의 시간을 지불하기로 선택하였던 엔리케에게조차도 자유의 빛은 내리쪼이지 않을 것이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자유민이 되지 못하였던 그는, 그저 섬기는 주인을 바꾸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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