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끼나루3.0(1)종종 '가능성을 발견합니다'라는 문구를 접하게 된다. 자연스럽게 고개를 끄덕인 뒤에 영화로 눈을 돌린다면 무엇이 있을까. 당신이 우연히 봤을지 모르는 박남옥의 영화 <미망인>은 이 가능성을 미묘한 지점으로 옮겨 놓는다. 1955년에 등장한 한국영화의 가능성은 어디에 있는가. 혹은 '가능성'이라고 부르는 당위는 어디에서 오는가. 박남옥 감독은 알다시피 한국 최초의 여성감독이다. 아마, 이 글에 경유하게 된 당신이라면, <미망인>에 대한 여러 덧글들 가운데 이 전제를 먼저 발견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래서 <미망인>이라는 영화를 발견했다는 안도감에 자칫 그 자리에 멈춰설지도 모른다. 물론, 영화인들은 지금도 오래된 영화들을 찾아나서고 있다. 미처 21세기로 건너오지 못한 영화들. 하지만 영화를 보는 당신은, 영화를 박물관에 보내선 안 된다. 혹은 당신만은, 이 사유를 멈춰선 안 된다. 영화 안에서도 걸음이 반복되듯이 <미망인>은 발견했다는 안도감과 별개로 머릿속에서 사유를 걷게 만들어야 한다. 그것만이, 한국 최초의 여성감독, 이라는 ()안에 <미망인>을 가두지 않는 유일한 방어책이다. (2)<미망인>의 가능성은, 영화가 불완전하다는 사실에 있다. '불완전하다'와 '불완전하다는 사실'의 차이. 명백한 흔적. 영화의 후반부는 소리가 증발했으며, 나는 결말을 확인할 수 없었다. 오로지 남아있는 스토리의 요약본만이 이 영화의 끝을 알 수 있게 한다. 하지만 그 단절의 순간까지 영화와 함께 달려온 사람이라면 이 결말부의 쇼트가 어땠을지 무척이나 궁금할 것이다. 우회해서, 과연 나는 <미망인>을 '봤다'라고 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볼 것이다'의 표현이 맞을까. 영화의 시간을 정지 시켜놓고 원하는 시간대에 얼마든지 영화를 재생시킬 수 있는 시대에 이것은 사소한 문제일지도 모른다. 하지만(1) 붙잡아보고 싶다. 하지만(1-1) 없다. 영화가 하나의 육신 같은 것이라면 우린 일정부분의 육신이 도륙되어버린 영화를 어떻게 사랑할 수 있을까. 배워보지 못한 명제. 아주 간혹 다가오는 문제. 하지만 적지 않은 영화들이 실은 비명을 지르는 S.O.S 신호. 절단의 영화를 사랑하는, 그 사랑에 대한 가능성. (3)<미망인>을 보면서 당황하기 시작한 건, 영화를 보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영화에서 잉여의 쇼트가 발견되고 잔여의 시간이 느껴진 순간이었다. 급작스러운 여백. 어쩌면 여백이라기 보다는, '조금 긴' 것이라는 인상. 그런데 '조금 긴'이라는 것이 언어로 충분히 설명하기 어려운 박남옥 감독만의 감각이라는 것을 영화내내 느끼기 시작할 때, 내가 던져야 할 질문의 성질이 다소 달라질지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왜 박남옥 감독은 장면마다 일종의 여지를 남겼는가. (4)<미망인>은 나에게 한 명의 한국영화감독을 상기케한다. 홍상수. 이상한 늘어짐. 분명 홍상수와는 다르게 쇼트가 다음 쇼트로 넘어갔는데도 함께 건너온 늘어짐. 대화 속에서 건드려지는 이중의 창. 이상한 개운함. (5)가장 기묘한 순간은 해변가에서, 신자와 주의 세계가 완전히 분리됐을 때다. 신자의 세계엔 주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진행된다. 완전히 무심한 상태에서 치뤄지는 자유의 순간. 시선의 차단. 결국, 객관식의 문제다. 누군가에게 관심을 쏟는 순간은, 당연히 그 바깥의 세계에 대해서 일정 무심한 상태다. 하지만 '시스템으로서의 모성'은 그 방향이 가족 바깥으로 향하는 순간 그녀를 '죄'의 기운으로 몰아넣는다. 그리고 부재의 공간에서 사건이 벌어진다. 그 순간 박남옥은 되려 신자를 '어머니'의 자리에서 분리시켜 놓는다. 아슬아슬한 베팅. 하지만 시나리오의 간결함이 영리하게 이 사고를 신파로 몰아가지 않는다. 뻔뻔할 정도의 간결함. 박남옥이 객관식을 벗어나는 방식. (6)"한국전쟁이 가져간 걸요." 진이와 택이가 재회하고, 그들의 회상도 영화에 끼어드는 반면에 신자의 회상은 존재하지 않는다. 한국전쟁이 가져간 남편. 여성이 아내와 동의어가 아니듯이, 남성도 남편과 동의어가 아니다. 한국전쟁이 가져간 것은 무엇인가. 남편, 아니면 그 남자. 신자와 그 남자와의 회상은 생략되어있지만, 그 한국전쟁이 갈라놓은 진이와 택이의 이별은 회상된다. 산 자들에게 주어지는 플래시백의 특권. 박남옥 감독이 두번째 영화를 찍었다면, 혹은 60년대로 넘어올 수 있었다면, '한국전쟁'은 또 어떻게 그려졌겠는가. (7)신자와 주의 관계는 영화가 진행되어가면서 포옹과 밀어냄을 반복한다. 그 사이에 놓인 택의 존재. 심지어 다른데가서 자라고 주를 쫓아내는 장면의 투쇼트는 어린아이와 성인의 관계라기보단 성년과 성년의 관계로 보인다. 한없이 작아보이는 주를, 화면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는 신자와 나란히 놓을때 느껴지는 그로테스크함. (8)액자 속 그레타 가르보. 박남옥 감독은, 학창시절 <집 없는 천사>(1941, 최인규)에 출연한 김신재를 그렇게 좋아했다고 한다. 여배우에 대한 소녀의 고백. 영화 안에서 개인적인 취향은 어떻게 은연중에 발휘되는가? 물론, 박남옥이 그레타 가르보를 좋아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하지만 앨범 사이의 기호를 알아본 외계인들끼리의 묘한 수신호 같은 것. 박남옥 감독님, 당신은 그레타 가르보의 어떤 영화를 가장 좋아하셨습니까? 하늘에 올려보낼 편지. (9)<미망인>은 사이사이마다 기묘한 반복이 존재한다. 이사장과 부인, 택이와 신자가 뒤엉키는 동선에서의 반복. 진이와 택이의 포옹과 엎드림이, 신자와 주 사이에서의 포옹과 신자 혼자서의 엎드림으로 반복될 때. 다른 공간(시간)에서 반복되는 순간들. 그리고 이사장 부인의 추격전을 신자가 재현할 때. 또는 신자의 발이, 택이의 발로 옮겨갈 때. 박남옥 감독은 어쩌면 본인의 영화에서 일종의 규칙을 쌓는 와중이었을지도 모른다. 안타까운 건 그것이 유일한 규칙과 예외가 되어버렸다는 점이다. (10)눈으로 볼 수는 없지만, 분명한 건, 신자가 택에게 칼을 겨눈다는 점이다. 어떤식으로 휘둘렀는지, 혹은 어떻게 찔렀는지는 알 수 없다. 어렴풋이 느낄 수 있는 건 분노의 춤사위. 내내 정적이었지만 산뜻했으며, 담백했지만 호쾌했던 그 영화가 그 광기를 어떻게 담았을지 무척이나 궁금하다. 영화가 그 순간 어떻게 변했을까. (11)반복. 분명한 건, 신자가 택에게 칼을 겨눈다는 점이다. 진이 아니라 택에게 겨누는 것. (12)대사 "피차간 뭐가 있어야 말이죠. 안 그렇습니까?" "뭐, 이 년아?" "여잔 혼자 살아야 돈 벌어요." "극히 순수한 마음으로요." (13)41:05-41:07 (14)구로사와 아키라의 <들개>를 다시 볼 생각이다.いいね9コメント0
정경진見たい“예술이란 개념은 그날 나에게는 사치였다. 여름부터 겨울까지 반년 넘도록 아이를 업고 기저귀 가방을 든 형상으로 미친 사람처럼 이리 뛰고 저리 뛰며 촬영기재 마련, 돈 마련, 스태프진 식사 마련으로 정신이 빠져 있던 나는 영화 동지들의 그동안의 도움과 격려에 그저 고마운 마음뿐이었다. <미망인> 제작 들어가기 전까지만 해도 나는 예술을 논했었다. 그러나 그날, 완성된 <미망인>을 다 같이 보던 그날, 그런 것들은 더 이상 나에게 의미 없었다. 나는 그저 속으로 울고만 있었다.” 한겨레 "온몸으로 시대를 밀고 간 첫 여성들, 박남옥과 노라노" 중 박남옥이 <미망인> 영화 완성본을 보던 날을 회상하며 한 말.いいね7コメント0
생웡2.5전형적이지 않은 여성 캐릭터, 진보적인 대사와 페미니즘적 시도, 다른 남성 감독들이 다루지 못한 작으면서도 독보적인 장면, 옆에서 코골며 자는 아저씨까지. *신수원 감독님: 남성감독들이 보지 못하는 지점들이 보이는 건 당연하다. 여성을 주연으로 하면 그래도 세계를 그리는 데 잘안다. 어려운 일은 많다. 사실은 아직도 여자 배우가 캐스팅 되면 투자가 어렵다. 이런 이야기를 몇 달 전에도 듣고 왔다. 이런 부분 때문에 포기하고 싶은 적도 많다. 영화를 만드는 행위자체는 그늘에 가려진 것들을 끄집어내는 행위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오마주>를 만들 때도 만들고 나서 좋았던 거는 관객들이 이런 사람이 있었어? 여판사가 있었어? 감히 죄송하지만 감독님의 존재가 잊혀져있는 상태였는데, 감독님의 이름을 부르게 하고 작품을 하나라도 더 보겠금 하는게, 물론 사명감은 아니었지만, 국내에서도 <미망인>과 <여판사>를 틀고 오늘도 이 자리에 태국 아카이브 필름 소장님이 보고 갔다. 영화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된다. 이런 것들이 과거에 잊혀진 것들을 소화하는 행위로 영화가 하는게 아닐까. +신수원 감독님 코멘트: 작가주의적인 여성 감독으로 독보적인 존재가 되었을 수도 있다. 촬영 컷들이라던지, 인물들의 대사처리, 기대하는 관습을 벗어나는 시도들, 상상도 못하는 이야기가 좋았다. 박남옥 감독이 두 번째, 세 번째 작품을 찍었으면 어땠을까 궁금하다. 손희정 평론가: 21세기적 관점에서 미망인을 해석하면 놓치는 부분이 많을텐데 우리한테 다가올 간극을 느낀 장면이 있었나? 신수원 감독님: 각각의 독립적인 형태로 사는데, 가족처럼 돌보는 것이, 지금은 현대사회에서 보기 어려운 풍경인데, 단독 가구들이 많아서, 과거엔 이런 시절이 있었을 거야. 라고 유추하는 장면이 있었다. 딸을 옆 방의 아저씨에 맡기는데, 그 존재가 물음표였다. 사장도 그렇고, 택도 바람둥인데 남자들도 마초적으로 그리지 않는 것들이 있다. 박남옥 감독님께 질문을 던지고 싶다. 요즘 영화를 보면 마초적인 남자들이 등장하기에, 여기 나오는 인물들은 이사장의 와이프가 극성스럽게 여기저기 다닌다. 이야기의 짜임새가 진부할 수도 있다만, 우연히 만나는 것들이라던지, 요즘도 안쓰는 장면에 가깝다. 역으로 인물을 다루는 방식들이 오히려 더 새롭게 느껴지고 모던한 느낌이 있었다. 손희정 평론가: 남자다움의 상징이 전후 남성성일 수도 있겠다. 식민지와 전쟁을 지나고오면서 손상된 남성성일 수도 있지만, 돌보는 남성성이 아니었을까? 질문해볼 수 있는 건, 최근의 영화들은 자신의 부족함을 폭력으로 채우는 남성성만 그려지게 되었는가? 라는 질문을 스스로 할 수 있었다. 범죄도시를 보고 오니 그런 생각이 들었다. 여성 감독이 주인공인 영화에선 남성들이 되게 재밌다. 감독님은 남성 캐릭터를 잡을 때 어떻게 하는지 듣고 싶다. 신수원 감독님: 명왕성에서는 스토리 자체가 학교 폭력이기에, 남성이 폭력자로 나온다. 어쨌든 폭력을 쓰는 남자를 좋아하지 않는다. 폭력이 심해지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안 그려도 된다. 어떤 면에선 일상적인 드라마에서 출발을 하면, 사실은 어쨌든 사람의 성격에 따라 다르다. 성격에 따라 다르게 묘사한다. 그래서 이 영화가 더 특별하다고 생각한다. 뭔가 오히려 과거에서 우리가 현재를 바라보는 게 필요하지 않나? 손희정 평론가: 여자 셋, 남자 둘이 등장한다. 남자캐릭터들이 계급적으로 차이가 난다는 것이 흥미롭다. 다양한 여성들의 면모를 보여줬다. 다양한 사람의 얼굴을 보여주는 지점이 좋았다. 신수원 감독님: 감독님이 식민지 시절 엄청난 영화광이었다. 캐릭터를 정형화시키지 않은 부분이 인상적이었다. 손희정 평론가: 유실된 부분을 연출해 복원하신다면 결말을 어떻게 할 것인가? 신수원 감독님: 영화의 톤 앤 매너 그 부분. 유실된 장면이 있는데, 배우의 얼굴이 너무 좋았다. 카메라가 배우의 클로즈업을 잡고 끝냈어도 좋지 않았을까. 배우가 갖고 있는 매력? 클로즈업될 때마다 배우한테 빠져들었다. 거기서 끝내도 좋지 않을까. 여러분도 결말을 상상해보면 좋지 않을까. 손희정 평론가: 나와있는 결말은 술이 취한 신자가 문을 열었는데, 택이 사과를 하러왔다. 신자가 과도를 흔들었다. 죽였는지 안죽였는지 정리된 건 없다. 새로운 보금자리를 찾아 떠난다. 가 끝이다. 급진적인 결말이다. 이 영화의 가장 놀라온 점은 결말을 정해놓고 끝내는데, 신자를 팜므파탈로 끝내지 않는다. 감독님이 가장 좋아하는 장면은? 신수원 감독: 거울을 보는 장면에서 배우의 착잡함,불안감이 다 보였다. 그 사이즈의 장면으로 단 한방에 캐릭터가 누군지를 설명해주는 게 인상적이었다.いいね5コメント0
토끼나루
3.0
(1)종종 '가능성을 발견합니다'라는 문구를 접하게 된다. 자연스럽게 고개를 끄덕인 뒤에 영화로 눈을 돌린다면 무엇이 있을까. 당신이 우연히 봤을지 모르는 박남옥의 영화 <미망인>은 이 가능성을 미묘한 지점으로 옮겨 놓는다. 1955년에 등장한 한국영화의 가능성은 어디에 있는가. 혹은 '가능성'이라고 부르는 당위는 어디에서 오는가. 박남옥 감독은 알다시피 한국 최초의 여성감독이다. 아마, 이 글에 경유하게 된 당신이라면, <미망인>에 대한 여러 덧글들 가운데 이 전제를 먼저 발견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래서 <미망인>이라는 영화를 발견했다는 안도감에 자칫 그 자리에 멈춰설지도 모른다. 물론, 영화인들은 지금도 오래된 영화들을 찾아나서고 있다. 미처 21세기로 건너오지 못한 영화들. 하지만 영화를 보는 당신은, 영화를 박물관에 보내선 안 된다. 혹은 당신만은, 이 사유를 멈춰선 안 된다. 영화 안에서도 걸음이 반복되듯이 <미망인>은 발견했다는 안도감과 별개로 머릿속에서 사유를 걷게 만들어야 한다. 그것만이, 한국 최초의 여성감독, 이라는 ()안에 <미망인>을 가두지 않는 유일한 방어책이다. (2)<미망인>의 가능성은, 영화가 불완전하다는 사실에 있다. '불완전하다'와 '불완전하다는 사실'의 차이. 명백한 흔적. 영화의 후반부는 소리가 증발했으며, 나는 결말을 확인할 수 없었다. 오로지 남아있는 스토리의 요약본만이 이 영화의 끝을 알 수 있게 한다. 하지만 그 단절의 순간까지 영화와 함께 달려온 사람이라면 이 결말부의 쇼트가 어땠을지 무척이나 궁금할 것이다. 우회해서, 과연 나는 <미망인>을 '봤다'라고 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볼 것이다'의 표현이 맞을까. 영화의 시간을 정지 시켜놓고 원하는 시간대에 얼마든지 영화를 재생시킬 수 있는 시대에 이것은 사소한 문제일지도 모른다. 하지만(1) 붙잡아보고 싶다. 하지만(1-1) 없다. 영화가 하나의 육신 같은 것이라면 우린 일정부분의 육신이 도륙되어버린 영화를 어떻게 사랑할 수 있을까. 배워보지 못한 명제. 아주 간혹 다가오는 문제. 하지만 적지 않은 영화들이 실은 비명을 지르는 S.O.S 신호. 절단의 영화를 사랑하는, 그 사랑에 대한 가능성. (3)<미망인>을 보면서 당황하기 시작한 건, 영화를 보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영화에서 잉여의 쇼트가 발견되고 잔여의 시간이 느껴진 순간이었다. 급작스러운 여백. 어쩌면 여백이라기 보다는, '조금 긴' 것이라는 인상. 그런데 '조금 긴'이라는 것이 언어로 충분히 설명하기 어려운 박남옥 감독만의 감각이라는 것을 영화내내 느끼기 시작할 때, 내가 던져야 할 질문의 성질이 다소 달라질지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왜 박남옥 감독은 장면마다 일종의 여지를 남겼는가. (4)<미망인>은 나에게 한 명의 한국영화감독을 상기케한다. 홍상수. 이상한 늘어짐. 분명 홍상수와는 다르게 쇼트가 다음 쇼트로 넘어갔는데도 함께 건너온 늘어짐. 대화 속에서 건드려지는 이중의 창. 이상한 개운함. (5)가장 기묘한 순간은 해변가에서, 신자와 주의 세계가 완전히 분리됐을 때다. 신자의 세계엔 주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진행된다. 완전히 무심한 상태에서 치뤄지는 자유의 순간. 시선의 차단. 결국, 객관식의 문제다. 누군가에게 관심을 쏟는 순간은, 당연히 그 바깥의 세계에 대해서 일정 무심한 상태다. 하지만 '시스템으로서의 모성'은 그 방향이 가족 바깥으로 향하는 순간 그녀를 '죄'의 기운으로 몰아넣는다. 그리고 부재의 공간에서 사건이 벌어진다. 그 순간 박남옥은 되려 신자를 '어머니'의 자리에서 분리시켜 놓는다. 아슬아슬한 베팅. 하지만 시나리오의 간결함이 영리하게 이 사고를 신파로 몰아가지 않는다. 뻔뻔할 정도의 간결함. 박남옥이 객관식을 벗어나는 방식. (6)"한국전쟁이 가져간 걸요." 진이와 택이가 재회하고, 그들의 회상도 영화에 끼어드는 반면에 신자의 회상은 존재하지 않는다. 한국전쟁이 가져간 남편. 여성이 아내와 동의어가 아니듯이, 남성도 남편과 동의어가 아니다. 한국전쟁이 가져간 것은 무엇인가. 남편, 아니면 그 남자. 신자와 그 남자와의 회상은 생략되어있지만, 그 한국전쟁이 갈라놓은 진이와 택이의 이별은 회상된다. 산 자들에게 주어지는 플래시백의 특권. 박남옥 감독이 두번째 영화를 찍었다면, 혹은 60년대로 넘어올 수 있었다면, '한국전쟁'은 또 어떻게 그려졌겠는가. (7)신자와 주의 관계는 영화가 진행되어가면서 포옹과 밀어냄을 반복한다. 그 사이에 놓인 택의 존재. 심지어 다른데가서 자라고 주를 쫓아내는 장면의 투쇼트는 어린아이와 성인의 관계라기보단 성년과 성년의 관계로 보인다. 한없이 작아보이는 주를, 화면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는 신자와 나란히 놓을때 느껴지는 그로테스크함. (8)액자 속 그레타 가르보. 박남옥 감독은, 학창시절 <집 없는 천사>(1941, 최인규)에 출연한 김신재를 그렇게 좋아했다고 한다. 여배우에 대한 소녀의 고백. 영화 안에서 개인적인 취향은 어떻게 은연중에 발휘되는가? 물론, 박남옥이 그레타 가르보를 좋아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하지만 앨범 사이의 기호를 알아본 외계인들끼리의 묘한 수신호 같은 것. 박남옥 감독님, 당신은 그레타 가르보의 어떤 영화를 가장 좋아하셨습니까? 하늘에 올려보낼 편지. (9)<미망인>은 사이사이마다 기묘한 반복이 존재한다. 이사장과 부인, 택이와 신자가 뒤엉키는 동선에서의 반복. 진이와 택이의 포옹과 엎드림이, 신자와 주 사이에서의 포옹과 신자 혼자서의 엎드림으로 반복될 때. 다른 공간(시간)에서 반복되는 순간들. 그리고 이사장 부인의 추격전을 신자가 재현할 때. 또는 신자의 발이, 택이의 발로 옮겨갈 때. 박남옥 감독은 어쩌면 본인의 영화에서 일종의 규칙을 쌓는 와중이었을지도 모른다. 안타까운 건 그것이 유일한 규칙과 예외가 되어버렸다는 점이다. (10)눈으로 볼 수는 없지만, 분명한 건, 신자가 택에게 칼을 겨눈다는 점이다. 어떤식으로 휘둘렀는지, 혹은 어떻게 찔렀는지는 알 수 없다. 어렴풋이 느낄 수 있는 건 분노의 춤사위. 내내 정적이었지만 산뜻했으며, 담백했지만 호쾌했던 그 영화가 그 광기를 어떻게 담았을지 무척이나 궁금하다. 영화가 그 순간 어떻게 변했을까. (11)반복. 분명한 건, 신자가 택에게 칼을 겨눈다는 점이다. 진이 아니라 택에게 겨누는 것. (12)대사 "피차간 뭐가 있어야 말이죠. 안 그렇습니까?" "뭐, 이 년아?" "여잔 혼자 살아야 돈 벌어요." "극히 순수한 마음으로요." (13)41:05-41:07 (14)구로사와 아키라의 <들개>를 다시 볼 생각이다.
정경진
見たい
“예술이란 개념은 그날 나에게는 사치였다. 여름부터 겨울까지 반년 넘도록 아이를 업고 기저귀 가방을 든 형상으로 미친 사람처럼 이리 뛰고 저리 뛰며 촬영기재 마련, 돈 마련, 스태프진 식사 마련으로 정신이 빠져 있던 나는 영화 동지들의 그동안의 도움과 격려에 그저 고마운 마음뿐이었다. <미망인> 제작 들어가기 전까지만 해도 나는 예술을 논했었다. 그러나 그날, 완성된 <미망인>을 다 같이 보던 그날, 그런 것들은 더 이상 나에게 의미 없었다. 나는 그저 속으로 울고만 있었다.” 한겨레 "온몸으로 시대를 밀고 간 첫 여성들, 박남옥과 노라노" 중 박남옥이 <미망인> 영화 완성본을 보던 날을 회상하며 한 말.
생웡
2.5
전형적이지 않은 여성 캐릭터, 진보적인 대사와 페미니즘적 시도, 다른 남성 감독들이 다루지 못한 작으면서도 독보적인 장면, 옆에서 코골며 자는 아저씨까지. *신수원 감독님: 남성감독들이 보지 못하는 지점들이 보이는 건 당연하다. 여성을 주연으로 하면 그래도 세계를 그리는 데 잘안다. 어려운 일은 많다. 사실은 아직도 여자 배우가 캐스팅 되면 투자가 어렵다. 이런 이야기를 몇 달 전에도 듣고 왔다. 이런 부분 때문에 포기하고 싶은 적도 많다. 영화를 만드는 행위자체는 그늘에 가려진 것들을 끄집어내는 행위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오마주>를 만들 때도 만들고 나서 좋았던 거는 관객들이 이런 사람이 있었어? 여판사가 있었어? 감히 죄송하지만 감독님의 존재가 잊혀져있는 상태였는데, 감독님의 이름을 부르게 하고 작품을 하나라도 더 보겠금 하는게, 물론 사명감은 아니었지만, 국내에서도 <미망인>과 <여판사>를 틀고 오늘도 이 자리에 태국 아카이브 필름 소장님이 보고 갔다. 영화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된다. 이런 것들이 과거에 잊혀진 것들을 소화하는 행위로 영화가 하는게 아닐까. +신수원 감독님 코멘트: 작가주의적인 여성 감독으로 독보적인 존재가 되었을 수도 있다. 촬영 컷들이라던지, 인물들의 대사처리, 기대하는 관습을 벗어나는 시도들, 상상도 못하는 이야기가 좋았다. 박남옥 감독이 두 번째, 세 번째 작품을 찍었으면 어땠을까 궁금하다. 손희정 평론가: 21세기적 관점에서 미망인을 해석하면 놓치는 부분이 많을텐데 우리한테 다가올 간극을 느낀 장면이 있었나? 신수원 감독님: 각각의 독립적인 형태로 사는데, 가족처럼 돌보는 것이, 지금은 현대사회에서 보기 어려운 풍경인데, 단독 가구들이 많아서, 과거엔 이런 시절이 있었을 거야. 라고 유추하는 장면이 있었다. 딸을 옆 방의 아저씨에 맡기는데, 그 존재가 물음표였다. 사장도 그렇고, 택도 바람둥인데 남자들도 마초적으로 그리지 않는 것들이 있다. 박남옥 감독님께 질문을 던지고 싶다. 요즘 영화를 보면 마초적인 남자들이 등장하기에, 여기 나오는 인물들은 이사장의 와이프가 극성스럽게 여기저기 다닌다. 이야기의 짜임새가 진부할 수도 있다만, 우연히 만나는 것들이라던지, 요즘도 안쓰는 장면에 가깝다. 역으로 인물을 다루는 방식들이 오히려 더 새롭게 느껴지고 모던한 느낌이 있었다. 손희정 평론가: 남자다움의 상징이 전후 남성성일 수도 있겠다. 식민지와 전쟁을 지나고오면서 손상된 남성성일 수도 있지만, 돌보는 남성성이 아니었을까? 질문해볼 수 있는 건, 최근의 영화들은 자신의 부족함을 폭력으로 채우는 남성성만 그려지게 되었는가? 라는 질문을 스스로 할 수 있었다. 범죄도시를 보고 오니 그런 생각이 들었다. 여성 감독이 주인공인 영화에선 남성들이 되게 재밌다. 감독님은 남성 캐릭터를 잡을 때 어떻게 하는지 듣고 싶다. 신수원 감독님: 명왕성에서는 스토리 자체가 학교 폭력이기에, 남성이 폭력자로 나온다. 어쨌든 폭력을 쓰는 남자를 좋아하지 않는다. 폭력이 심해지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안 그려도 된다. 어떤 면에선 일상적인 드라마에서 출발을 하면, 사실은 어쨌든 사람의 성격에 따라 다르다. 성격에 따라 다르게 묘사한다. 그래서 이 영화가 더 특별하다고 생각한다. 뭔가 오히려 과거에서 우리가 현재를 바라보는 게 필요하지 않나? 손희정 평론가: 여자 셋, 남자 둘이 등장한다. 남자캐릭터들이 계급적으로 차이가 난다는 것이 흥미롭다. 다양한 여성들의 면모를 보여줬다. 다양한 사람의 얼굴을 보여주는 지점이 좋았다. 신수원 감독님: 감독님이 식민지 시절 엄청난 영화광이었다. 캐릭터를 정형화시키지 않은 부분이 인상적이었다. 손희정 평론가: 유실된 부분을 연출해 복원하신다면 결말을 어떻게 할 것인가? 신수원 감독님: 영화의 톤 앤 매너 그 부분. 유실된 장면이 있는데, 배우의 얼굴이 너무 좋았다. 카메라가 배우의 클로즈업을 잡고 끝냈어도 좋지 않았을까. 배우가 갖고 있는 매력? 클로즈업될 때마다 배우한테 빠져들었다. 거기서 끝내도 좋지 않을까. 여러분도 결말을 상상해보면 좋지 않을까. 손희정 평론가: 나와있는 결말은 술이 취한 신자가 문을 열었는데, 택이 사과를 하러왔다. 신자가 과도를 흔들었다. 죽였는지 안죽였는지 정리된 건 없다. 새로운 보금자리를 찾아 떠난다. 가 끝이다. 급진적인 결말이다. 이 영화의 가장 놀라온 점은 결말을 정해놓고 끝내는데, 신자를 팜므파탈로 끝내지 않는다. 감독님이 가장 좋아하는 장면은? 신수원 감독: 거울을 보는 장면에서 배우의 착잡함,불안감이 다 보였다. 그 사이즈의 장면으로 단 한방에 캐릭터가 누군지를 설명해주는 게 인상적이었다.
film fantasia
2.5
수렁에 빠졌을 때도 그는 해바라기였다 +) 뒷부분이 유실되어 끝까지 볼 수 없었다. 신자의 선택이 궁금
머야 고스
見たい
- 그 젊은 녀석은 뭘 하는 녀석이래? - 별로 하는 일이 없는 사람입니다.
만만두
4.5
다음 행동을 궁금하게 하는 입체적 여성 캐릭터의 시작
조명진
4.5
카메라에 지속적으로 나오던 발. 서로가 향하는 걸음의 끝. 무엇일까? 결말을 보고 싶다.
스페이스바
3.5
뒷부분의 필름유실과 원본훼손으로 뒷부분 사운드까지 없으니 그 뒷부분까지 평가하기는 곤란. 그전까지는 신의 심적변화가 이해가 안가지만 재밌었음
さらに多くのコメントを見るには、ログインしてくださ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