出版社による書籍紹介
외형은 물론 정신까지 담아내려 한 조선시대 초상화,
예술성 높은 그림들의 이면에는 어떤 이야기들이 숨어 있을까?
초상화에 깃든 조선의 정치, 사회, 문화 풍경
조선시대 사람들은 초상화를 왜 그렸고, 어떤 용도로 사용했을까? 초상화는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고, 사람들은 초상화를 어떻게 활용했을까? 화가들은 초상화의 주인공을 실제 모습대로 그리기 위해 어떤 노력을 기울였으며, 그렇다고 그저 외형만 잘 닮게 그리면 되었을까? 그리고 초상화의 주인공들은 그저 “잘 그려 주시오!” 하고 가만히 앉아만 있었을까?
이 책은 조선시대 초상화들에 얽혀 있는 다양한 이야기들을 통해 당대 정치, 사회, 문화상을 추적, 해설한다. 왕의 권위를 상징하는 ‘어진(御眞)’, 충성심의 증표로 왕이 하사한 ‘신하 초상’, 각 당파나 학파의 정통성을 과시하기 위해 그려진 ‘스승 초상’, 지방 수령과 백성들의 이해관계에서 생겨난 ‘목민관 초상’, 출사(出仕)와 은일(隱逸) 사이의 고뇌가 담긴 ‘사대부 초상’, 그리고 사랑과 애도의 마음이 담긴 ‘벗과 가족의 초상’까지, 저자는 조선시대 초상화 120점을 하나하나 분석하여 미술사적 의미와 흐름을 밝힐 뿐 아니라, 그 초상화가 어떤 배경에서 그려졌으며, 그려진 초상화들은 어떤 역할을 하고 어떤 힘을 발휘했는지, 초상화를 단순한 그림 이상의 무언가로 여겼던 당대 사람들의 인식은 무엇인지, 그렇게 그려진 초상화가 정치, 사회, 문화에 어떻게 반영되었는지를 추적한다.
닮게 그린다는 것 - “터럭 한 올이라도 더 많으면 곧 다른 사람이다!”
조선시대에 초상화 제작을 의뢰받은 화가에게 요구된 가장 중요한 사항은 누구라도 주인공을 단번에 식별할 수 있을 정도로 ‘닮게’ 표현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송나라 유학자 정이(程頥)의 “터럭 하나라도 더 많으면 곧 다른 사람이 된다.”라는 말이 자주 인용되었다. 이에 따라 화가들은 주인공의 모습을 더 닮게 그리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면서 회화 기법상의 큰 진전을 이루었다. 저자는 1700년을 전후하여 초상화 표현 기법에 일대 변화가 있었다고 하면서, 김진규가 그린 것으로 추정되는 <김만중 초상>(1600년대 말)과 <김진규 초상>(1710년대)을 통해 이러한 변화를 잘 알 수 있다고 설명한다.
한편, 실제 모습에 가깝게 그리는 쪽으로만 초상화 기법이 발전해 나가지만은 않았다. 김진여가 그린 <권상하 초상>(1719)은 서양의 명암법이 잘 반영되어 있어 사실적 재현 솜씨가 뛰어난 작품으로 평가할 수 있는데, 이보다 후에 그려진 진재해의 <유수 초상>(1726)은 서양화법을 반영하지 않고 따뜻한 질감의 피부색을 표현하는 데 집중했다. 결과적으로 <권상하 초상>은 사실적이기는 하나 어둡게 그려진 반면, <유수 초상>은 매우 온화한 성품의 소유자로 재현되었다. 오늘날 사람들도 자기 얼굴의 주름이나 잡티가 드러나지 않기를 원해서 사진을 보정하는 것처럼, 당대 사람들도 사실적인 그림만을 지향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과장된 묘사로 내면을 드러내다 - <송시열 초상>, <박세채 초상>, <윤두서 자화상>
외형 못지않게 내면 즉 주인공의 정신적인 면을 드러내는 것도 중시되었는데, 이때는 주인공의 특징적인 면을 의도적으로 과장되게 부각한 경우가 많았다. 얼굴 곳곳의 굵직하고 구불구불한 주름, 붉은색의 두꺼운 입술, 무성한 수염과 눈썹, 큰 몸체 등 매우 강렬한 인상의 인물로 보이게 하는 <송시열 초상>, 떡 벌어진 어깨, 넓은 팔소매 등 덩치가 매우 커 보이게 그려져서 그의 제자가 “높고 큰 산의 형상”이라 말한 <박세채 초상>이 대표적인 사례다. 특히 한쪽 귀밑에서 다른쪽 귀밑까지 빙 둘러 나 있는 수염 한 올 한 올이 서로 얽히지 않고 가지런히 바깥쪽으로 뻗은 모습으로 그려진 <윤두서 자화상>을 두고, 저자는 “윤두서는 자신이 평생 쌓은 학문적·예술적 성취와 자신감의 근원을 자화상에 담아내고자 했으며, 자신의 머리(얼굴)에서 기가 발산되는 듯한 모습으로 수염을 표현함으로써 이를 실현할 수 있다고 믿었던 것 같다.”고 말한다.
초상화는 곧 ‘주인공의 대체물’ - <안향 초상> 도난, 훼손 사건
조선시대 사람들은 닮게 그려진 초상화를 주인공의 ‘대체물’로 인식했다. 1684년 소수서원에 도둑이 들어 그곳에 봉안돼 있던 <안향 초상>이 도난당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도둑은 <안향 초상>을 훼손한 뒤 고을의 성 서쪽 큰길가에 버렸다. 당시 이 지역에서는 순흥부를 다시 설치하기로 함에 따라 여러 관공서의 신축을 자체적으로 진행하면서 많은 백성들이 부역에 동원되었고, 이 때문에 지역 양반들에 대한 백성들의 원성이 자자했다. 우의정 남구만은 이러한 백성들의 원성을 안향 초상화 도난 및 훼손 사건의 주요 원인으로 지적했다. 즉 당시 사람들은 안향의 초상화를 한낱 그를 재현한 ‘그림’으로 보지 않고 바로 ‘안향’ 자체로 보았고, 안향은 곧 양반 사대부의 대명사였으며, 그래서 안향의 초상화를 훼손함으로써 불만을 표시했던 것이다.
초상화 봉안의 정치학 - 추모를 더욱 간절하게 만드는 힘
16세기 중반 이후 훈구 세력을 누르고 권력을 쟁취한 사림 세력은 선현을 기리는 작업을 본격적으로 전개했으며, 전국 각지에 서원을 건립해 나가면서 ‘초상화의 힘’에 주목했다. 초상화가 선현을 사모하고 기리는 마음을 더욱 간절하게 만드는 중요한 매개체라고 인식하기 시작한 것이다. 1814년 소론계 유학자 강필효가 유봉영당(酉峯影堂)에서 윤증의 초상화를 보고 “마치, 그때 선사(先師) 앞에서 친히 말씀을 듣는 듯했다.”라고 한 것, 17세기를 대표하는 남인 유학자 장현광이 정몽주의 초상화를 첨배한 뒤 “거슬러 당시를 멀리 상상하니 구천(九泉)에서 다시 나오신 듯하네.”라고 한 것 등이 그 예로, 저자는 16세기 이후 초상화는 단순히 특정 인물을 재현한 그림이 아닌, 위패에 버금가는 봉안 대상으로서의 권위를 갖게 되었다고 말한다.
생사당 봉안용 초상화 - 목민관과 백성들 간의 결탁의 산물
조선시대 초상화 중 상당수는 주인공이 화가에게 의뢰해 제작한 것이 아니라, 그를 추모하고자 하는 사람들에 의해 ‘그려진’ 것이었다. 이 중에는 한 고을에서 선정(善政)을 베풀고 떠난 목민관을 기리기 위해 고을 사람들이 제작한 ‘생사당(生祠堂) 봉안용 초상화’라는 것이 있다. 생사당은 제향 대상 인물이 살아 있는데도 그를 제사 지내기 위해 세운 사당을 말한다. 1595년경 평안감사 이원익을 위해 지역 백성들이 세운 생사당이 그 시발점으로 여겨지는데, 저자는 생사당의 유래 및 성행의 흐름을 평안감사 허적‧이만원‧홍만조, 평양서윤 성수웅 등의 초상화를 들면서 살핀다.
한편, 생사당 조성은 17세기 말 이후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는데, 이 시기에 조정에서는 생사당의 무분별한 난립에 따른 폐단에 대해 거듭 논의했다. 즉 지방관들이 ‘양리(良吏)’라는 명예를 얻을 요량으로 세금을 무분별하게 경감하는 등 필요 이상의 은혜를 베풀고, 지역민들은 이에 대한 보답으로 생사당을 건립해 주었던 것이다. 영조는 1724년 이후 평안도에 건립된 관찰사의 송덕비(頌德碑)와 생사당을 모두 철거할 것을 지시했다. 결국, 생사당 봉안용 초상화는 17~18세기에 출몰한 특수한 그림이 되고 말았다.
제자들이 화가를 시켜 몰래 그린 스승의 초상화 - <윤증 초상>
1711년 여름, 도화서 화원 변량은 윤증의 초상화 두 점을 그렸다. 이때의 초상화 제작은 윤증의 제자들이 주관했다. 제자들이 윤증에게 초상화 제작 계획을 말하자 그는 “나의 부친도 초상화가 없는데 내가 어떻게 그것을 가질 수 있겠느냐.”며 제의를 거절했다. 이에 제자들은 향음례(鄕飮