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Fridaythe13th

ザ・ブライド!
平均 1.9
새로운 이야기가 살아 숨쉬기 위해선, 아직 명명되지 않은 캐릭터가 필요하다. - - (아래 스포일러 리뷰) "아직 할 얘기가 남았어. 속편이 나올거야.. 새어나오는 틈으로 내가 침투하게." 새로운 이야기, 미처 다뤄지지 않은 '여성'에 대한 이야기를 위해선 새로운 캐릭터가 필요하다. 아직 '이름'이란 정체성에 갇히지 않아야 하며, 그녀가 이름을 찾게 되는 과정 자체가 이야기인 것이다. 프랑켄은 전통적인 로맨스 영화들을 보며 떠돈다. 그는 등장인물 속에 본인을 투영시킨다. 이미 완성된 캐릭터기에, 약간은 수동적이며, 신부를 보편적인 이야기 속으로 귀속시키려 한다. 그는 신부에게 '페니'라는 이름을 붙여준다. 분수대에서 수많은 동전들(penny)들을 줍는 모습처럼, 이런 이름을 부여한다는 것 역시 보편적인 틀에 그녀를 가두려는 노력으로 보인다. 프랑켄은 신부와 함께 "heartbreak anniversary"를 관람하며 그 속에 둘을 투영한다. 영화 속의 연인처럼, 정식적인 부부가 되길 요청하지만 그녀는 거절한다. 이 거절의 순간에 프랑켄은 죽는다. 왜냐하면 이미 명명되어 캐릭터성이 확실한 존재가 풀어나갈 이야기는 더 이상 없기 때문이다. 그나마 남은 여지가 '프랑켄슈타인의 신부'로서 신부를 귀속시키며 이야기의 주인공으로 서는 것일 텐데, 이 시도가 좌절된 것이다. 그가 이 영화에서 메인 서사를 트리거만 하며, 거의 말동무 수준으로 역할한다는 점도 그렇다. 이 영화의, 이야기의 주인은 브라이드다. 더 이상 습득하며 변화할 수 없는 프랑켄슈타인은 자신이 좋아하는 옛날 영화 들 속으로 들어간다. 영화의 진짜 배우를 만났을 때, 그는 It’s me!라고 외친다. 그는 자신을 찾으러만(배우의 영화만을 찾으러) 다니는 존재일 뿐이고, 더 이상 변화하지 못한다. 신부는 기존의 틀에 갇히기를 거부한다. 어떤 이름에 귀속되기도 거부한다. 아이다도 아니며, 프랑켄슈타인의 신부도아니며, 페니도 아니다. 그저 '신부'로서 스스로 이름을 부여하며, 정체성을 확립한다. 이제 이 캐릭터는 처음으로 능동적이게 창조자에게 말을 건다. 똑똑. Knock knock 누구세요. Who’s there 신부요. The Bride. 어떤? Of what? 그냥 신부요. Just a bride. 남자 형사와 여자 형사의 관계 역시 프랑켄과 브라이드의 관계이다. 프랑켄처럼, 남자 형사 역시 어떠한 캐릭터성을 지닌다. 보편적인 남성과는 다르다. 둘 다 여성을 존중함에도, 그들은 이미 오래전에 확립되어 크게 변화할 수 없는 존재들이다. 프랑켄은 브라이드에게 도망다니기를 권유하며, 형사는 기존의 수사 방식을(여성 대신 나서는)고집한다. 영화 속에서 언급되듯 그들은 목격자일 뿐이다. 따라서 이 영화가 새로운 이야기의 발언권을 준 것은 '브라이드’, ‘여성‘이다. 두 커플의 대면에서도, 총을 쏘는 건 여자들이다. 아직 차마 다루어지지 않은, 완전히 빚어지지 않은 캐릭터들 말이다. 행동하는 것, 어떤 변화를 일으키는 것은 결국 이들이다. 바로 박사를 체포하지 않고 프랑켄과 신부 커플에게 기회를 한번 더 부여하는 것도, 폭력적인 목소리들을 이끌어낸 것도. (적어도 이 영화에서는 이러한 소생, 새로운 변화에 대한 평가는 필요치 않다.) 다시 브라이드의 이야기로 돌아오자면, 역설적이게도 이 캐릭터는 정체성을 확립하게 된 순간 죽음을 맞는다. 이름을 붙이는 순간 정체성과 주체성은 충족되나 프랑켄과 마찬가지로 더 이상 이 캐릭터론 새로이 할 수 있는 이야기가 없다. 여기서 메리 셀리는 말한다. ‘아주 멋진 이야기지.’ 그러고는 더 이상 관여하지 않는다. 여기서 메리 셀리의 이야기는 끝난다. 그리고 박사는 ‘I prefer not to.’라고 하며 둘을 소생시킨다. 여기서부턴 이야기의 주체가 다시 바뀐다. 그녀는 메기 질렌할, 감독 자신이다. 이야기가 그녀의 죽음으로 끝났음에도(끝나야함에도), 다시 소생시키겠다고 선언한다. 같은 존재로 소생시키는 것이 아니다. 박사는 브라이드처럼 자신의 기억을 잃어버린 채로 되살아날 것이라고 말한다. 박사는 자신의 연인을 되살린 이야기를 전하며 이렇게 말한다. 기하학적 구조를 깨버리고 싶었다고. 그러니까, 새로 숨을 불어넣는 것, 창조하는 것은 틀을 부숴야한다. 브라이드처럼 혼란을 가져올지라도 말이다. 그 혼란이 두려워 소생시키길 멈추는 것이 아니다. 영화는 이 소생, 새로운 변화 앞에서 두려워 하지 않는다. 아직 충분하지 않다고 느낀다면 몇번이고 새롭게(그대로가 아니다. 새로워야 한다.)되살려 창조자의 목소릴 부여할 것이라 한다. 죽은 존재를 소생시킨다는 것, 그것 자체가 차마 발언되지 못한 것들을 되살려내는 것이다. 혀를 잘라 모으는 마피아 보스처럼, 이 발언권의 파급력은 매섭다. 브라이드는 가끔 창조자의 목소리에 반감을 가진다. 자신이 그로 인해 벌인 행동들에 회의적이기도 하다. 메리 셀리가, 매우 충격적인 이야기라 껍데기가 깨지기를 기다리고 있었다고( 아마 시대적으로 이런 영화가 받아들여질 수 있을 때까지) 하는 것 처럼 말이다. 이 영화는 이야기의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것이 아니다. 그보단 아직 다뤄지지 않은 것들에 한해선 소생을 멈추지 않겠다는 일종의 집념이다. 이는 방향을 잃고 단순히 폭력적으로 번질 수도 있다. 그럼에도 상관없다. 공간과 시대를 타지 않는 이 이야기로서의 소생은 요구에 응할 때까지, 제대로 된 파급력을 전할 때까지 이어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