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르를 넘나들며 ‘존재’와 ‘관계’에 대해 성찰해 온
고영범 작가의 자전적 장편소설”
『서교동에서 죽다』는 단 한 번 왔다가 사라져버린
그 시간에 바쳐지는 이야기이며, 그런 의미에서
통상의 성장소설과 궤를 달리한다
1974년 8월 중순에 시작된 소설의 내적 시간은 1975년 3월 초까지 이어지고, 서교동을 중심으로 진행되던 이야기는 진영네 집이 이사 가는 화곡동을 비롯, 진영이 아버지 심부름으로 다녀오게 되는 효자동을 통해 광화문과 신촌 일대까지로 확장된다. 특히 진영의 생활 반경과 동선에 바탕한 서울의 지리지는 기억의 순금 지대를 이루는데, 『서교동에서 죽다』는 소년의 작은 몸과 좁은 시야에 와닿은 1974년 서울의 공기와 풍경을 두텁게 떠메고 온 듯한 느낌을 준다.
- 발문(정홍수 문학평론가) 중에서
“나이가 들면서 이 문제 많은 존재와 가족, 동료들에 대해 이런저런 각도에서, 틈틈이, 많은 생각을 하게 됐고, 한 번 들여다보자 싶었다. 몇몇 에피소드는 오래전에 시나리오 형식으로 써본 적이 있었고, 이번에는 나머지 에피소드들을 각 에피소드의 성격에 적합한 형식들—시와 희곡, 인문학과 사회과학적 접근이 뒤엉킨 소논문, 인터뷰, 기사, 에세이, 심지어 성명서 등, 내가 여태 살아오면서 한 번이라도 다뤄본 형식은 모두 동원해서—로 써보자는 생각이었다. 여러 가지 시도를 했지만 기중 마음이 간 게 이사 가는 날을 다룬 희곡 형태의 장과, 진영이 개에 물리는 장면을 다룬 소설 형태의 글이었다. 희곡 형태로 쓴 글은 공연이 가능한 길이로 키워서 2021년 6월에 이성열 연출이 동명의 연극으로 만들어 공연을 올렸고, 나머지 부분들은 모두 해체-재구성해서 장편소설의 형태로 다시 썼다. 그게 이 소설이다.”
- 작가의 말 중에서
발문:
정홍수 (문학평론가)
지하실의 어둠, 혹은 기계체조 인형과 함께 남은 시간
1
2000년 여름으로 기억한다. 근무하던 출판사 문학동네에서 도서전 참관을 명목으로 한 미국 여행 기회가 주어졌고, 시카고와 보스턴을 거쳐 마지막 여정으로 도착한 곳이 뉴욕이었다. 여행길을 같이했던 소설가 성석제 형은 아는 후배가 뉴욕에 산다며 북디자이너와 나를 어퍼맨해튼이란 곳으로 데려갔고, 거기서 만나 우리의 한나절 뉴욕 구경을 책임져준 이가 고영범 형이었다. 그러니까 끈질기게 이어지고 있는 인연의 고리는 ‘연세문학회’였던 것 같다. 내 첫 직장 민음사의 편집장 이영준 형은(우리의 미국 여행 때 하버드대 동아시아학과 대학원에서 공부 중이었고, 보스턴이 우리 여정의 중간에 들어 있었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지금은 경희대 휴머니타스칼리지 교수로 있다) ‘연세문학회’의 좌장 격이었던 것 같고, 이영준 형의 너른 품을 좇던 나는 성석제, 원재길, 김진해, 배효룡, 이성겸, 성원근, 기형도(뒤의 두 사람은 이곳에 없다) 등 ‘연세문학회’의 또 다른 맹장들을 우러를 행운을 누렸다. 이이들은 그 당시 세상만 모를 뿐 이미 각자의 시 세계(대부분 시를 썼던 것 같다) 및 문학적(그리고 아마도 철학적) 우주의 도상적 설계를 거의 마쳤다고 믿는 호기롭지만 불우한 문사들이었고, 서로 남의 말 따위는 들을 시간이 없을 정도로 바삐 자신들만의 우주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한마디로 이이들을 둘러싸고 있는 것은 자유의 기운이었다. 지식은 체계가 없는 대로 잡다한 채 독학자들의 힘을 갖고 있었고, 주로는 음악이나 바둑, 술, 허세와 같은 무용한 놀이 쪽으로 가기 위한 부실한 사다리 구실을 하고는 금방 담배 연기와 함께 사라졌다.
뉴욕에서 처음 만난 고영범 형은 나이로는 문학회의 막내쯤이었는데, 벌써 얼마간 추레해진 선배들과는 달리 여전히 생생한 자유의 기운으로 충만한, 집안의 총명하고 귀티 나는 막내 같았다. 내가 만난 ‘연세문학회’ 사람들의 특징은 하나같이 말들을 너무 잘한다는 것이었는데, 고영범 형은 그 재능들을 한데 모아 욕심 사납게 한 사람이 가진 것 같았다(그는 이 특별한 재능이 말이 많은 것과는 별로 관계가 없다는 것도 증명해주었다). 짧은 만남이었지만 어떤 주제든 막힘이 없었고, 대개는 오래 자기만의 생각과 공부로 얻은 논리와 말들로 이야기를 주도했다. 그때야 지금 같은 SNS의 세상이 오리라고는 짐작도 할 수 없었지만, 근자에 페이스북에서 많은 이들을 애독자로 만든 고영범 계정의 현하지변을 그렇게 처음 접했다.
그 인연이 띄엄띄엄 20년이 넘었다. 돌아보면, 나는 처음 그의 명석함에 매혹되었지만 점차 인간을 더 좋아하게 된 것 같다. 말이나 글에서 그의 예각이 두드러져 보인다면, 그의 사람됨은 둔각 쪽으로 따뜻하고 속 깊다. 그의 유다르고 세련된 지성은(나는 그 뿌리에 ‘신학’이 있지 않나 짐작한다) 늘 인간적 배려와 관용에 감싸여 있다. 그는 언제나 무언가를 쓰고, 만들고(고영범 형은 맥가이버 수준의 수공업 장인이기도 하다), 작업하고 있었지만 그것들은 그가 늘 생각하는 ‘더 나은 인간’ ‘더 나은 세상’과 분리된 것이 아니었다. 남들이 표나게 무언가를 성취하고, 이런저런 방식으로 이름을 알리는 동안에도 그가 상대적으로 덜 드러났다면, 그것이 그의 방식이자 삶의 태도이기 때문이었을 테다. 본인이야 게을러서 그랬겠지, 라는 한마디로 퉁치고 말겠지만.
처음부터 ‘작가’인 사람이 있다. 고영범 형이 딱 그랬는데, 내가 처음 만났을 무렵 그의 관심은 영화 쪽에 있는 것 같았다. 몇 년 뒤 영화 일들이 구체화되면서 아예 가족들과 함께 한국으로 들어오기도 했다. 그때 몇몇 국내 대학의 영화과에서 강의를 하는 한편, 시나리오를 쓰고, 각색을 하고, 편집을 하면서 감독 데뷔를 준비했다. 영화계 일이 원래 그렇다고 하는데, 여러 차례 ‘엎어졌던’ 걸로 안다. 그는 미국 영화과 대학원에서 다큐멘터리를 공부했고, 직접 만든 영화로 세계적 권위의 오버하우젠 국제단편영화제에 초청받기도 했다. 홍상수 영화를 컷 단위로 분석해가며 이야기할 때는 혼이 쏙 빠지기도 했는데,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클로즈업>을 다룬 글은(물론 어디에도 발표되지 않았던 것 같다) 내가 그 무렵 읽은 최고 수준의 영화 평론 중 하나였다. 희곡은 그가 대학 때부터 가장 꾸준히 해온 작업이었고, 시 역시 ‘문학회’의 전통을 충실히 이으며 발표와는 전혀 무관하게 쓰고 있었다. 한두 편 내게 보여준 기억도 있다. 번역은 생계를 위해 틈틈이 해왔고 강출판사에도 그의 이름으로 된 두 권의 역서가 있다. 그중 『레이먼드 카버: 어느 작가의 생』(캐롤 스클레니카 지음)은 500페이지에 육박하는 분량에다 인용 시의 번역을 비롯해서 난처가 많은 텍스트였는데 고생만 잔뜩 시키고 살림에도 거의 도움을 못 드려 지금도 미안한 마음을 갖고 있다. 다만 그 번역이 계기가 되어 카버와 카버 문학에 대한 뛰어난 안내서인 『레이먼드 카버: 삶의 세밀화로 그린 아메리칸 체호프』(아르테, 2019)를 저서로 갖게 되었으니 조금 빚을 던 느낌도 없지 않다. 이 책은 얼치기 문학평론을 하는 처지에서는 문장이며 문학 이해의 깊이에서 읽는 내내 질투심을 억누르기 힘들었다는 걸 고백해둔다. 10여 년 전 서울에 있을 때 소설을 써볼까 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적극 권하면서 막연히 머리에 떠올려본 게 최인훈, 이승우 같은 지적이고 관념적인 소설 계보였던 것 같다. 역시 돈은 좀 안 될 것 같다는 생각과 함께 말이다. 그러다 그는 다시 한국을 떠났다.
그리고 2021년 가을, 한 편의 멋진 소설이 도착했다. 소설의 모습과 관련된 내 막연한 짐작은 보기 좋게 틀렸지만, 책의 판매와 관련해서는 무엇보다 더 많은 독자들이 이 근사한 소설을 만남으로써 그렇게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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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교동에서 죽다』는 이진영이라는 소년이 국민학교 6학년 여름방학부터 이듬해 봄 중학교 입학 무렵까지 반년 남짓한 시간을 통과한 기록이다. 소설은 방학 중 새 자전거가 생긴 진영이 8월 15일 광복절 날 서교동 집을 나와 홍대 앞, 상수동과 마포를 거쳐 서울대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