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제공 책 소개

사유와 실천의 패러다임으로 트라우마 읽어내기 문학 텍스트 속 트라우마 진실을 찾아서 20세기 인류는 홀로코스트라 불리는 유대인 대학살, 또 한 번의 세계전쟁, 베트남전쟁과 이라크전쟁, 9・11테러뿐 아니라, 성폭력과 인종청소, 강제이주와 이산 같은 대량살상과 폭력의 역사를 목격했다. 이 역사의 잔혹극은 이 책이 쓰인 현재(2023년)에도 동유럽 대륙(우크라이나 전쟁)과 중동지역(이스라엘-팔레스타인전쟁)에서 계속되고 있다. 그리하여 안드레이 후이센Andreas Huyssen이 지적하듯이, 20세기 전체가 ‘역사적 트라우마’라는 기호 아래 묶일 수 있을 정도이다. 1980년 미국정신의학협회가 정신질환 진단 및 통계 편람에 ‘외상 후 스트레스성 장애’(Post-Traumatic Stress Disorder, PTSD)라는 공식 진단명을 올림으로써 트라우마 경험을 학술적으로 인정한 이후, 트라우마의 문제는 비단 정신분석학과 문학뿐 아니라 철학과 역사학, 정치학과 사회학, 기억연구와 문화연구, 의학과 법 담론 등에 두루 걸치게 되었다. 이후 1990년대 미국 인문학계에서는 ‘재현의 아포리아’와 ‘타자에 대한 윤리적 응답’을 연결시킬 수 있는 사유의 패러다임으로 트라우마를 새롭게 읽어내는 흐름이 등장한다. 이 책은 사유와 실천의 패러다임으로서 트라우마를 이루는 여러 논의 중에서 ‘트라우마와 문학’의 관계를 다루고 있다. 각기 시간과 공간과 문화적 맥락을 달리하여 서술되고 있는 이들의 이야기는 하나의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그것은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려는 불가능한 시도를 감행하는 것이다. 트라우마가 재현의 위기를 일으킨다면 그것은 서사의 불가능성뿐 아니라 서사적 표현을 찾으려는 강박적 시도도 발생시킨다.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작가들은 한결같이 자신들이 겪었지만, 온전히 알 수도, 이해할 수도, 소유할 수도 없는 기억을 말하려고 한다.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려면, 아니 때론 말할 수 없다는 것을 말하려면 다르게 말하는 법을 찾아야 한다. 언어는 더듬거리고 뒤틀리며, 이야기는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과거를 맴돈다. 그러나 이 작가들은 망가지고 부서진 언어와 중단된 이야기를 통해 자신들이 온전히 알지 못하는 트라우마의 진실을 증언한다. 분석가가 환자의 이야기를 듣고 환자가 말하지 못한 진실을 들어야 하듯이, 텍스트를 읽는 독자는 텍스트에서 말해지고 있지 않지만, 텍스트에 들어 있는 진실을 비평적 언어로 옮겨야 한다. 부디 이 책을 읽는 독자들이 책에서 이 옮김의 작업이 잘 수행되었는지는를 확인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 어쩌면 확신할 수 없을지라도 텍스트 자체가 그것을 우리에게 강제하고 있는 것만은 분명한 듯하다. 이제 문학에서 발견하는 트라우마 패러다임을 통해 타자와 세계를 이해하는 지적 여정을 시작해보자. ‘역사적 트라우마’의 시대와 트라우마를 지닌 취약한 존재로서의 인간 20세기 인류는 홀로코스트라 불리는 유대인 대학살, 또 한 번의 세계전쟁, 베트남전쟁과 이라크전쟁, 9・11테러뿐 아니라, 성폭력과 인종청소, 강제이주와 이산 같은 대량 살상과 폭력의 역사를 목격했다. 이 역사의 잔혹극은 이 글을 쓰는 2024년 현재 동유럽 대륙(우크라이나 전쟁)과 중동지역(이스라엘-팔레스타인 전쟁)에서 계속되고 있다. 그리하여 안드레이 후이센Andreas Huyssen이 지적하듯이, 20세기 전체가 ‘역사적 트라우마’라는 기호 아래 묶일 수 있을 정도이다. 1980년 미국정신의학협회는 정신질환 진단 및 통계 편람에 ‘외상 후 스트레스성 장애’(Post-Traumatic Stress Disorder, PTSD)라는 공식 진단명을 올림으로써 트라우마 경험을 학술적으로 인정한다. 트라우마의 문제는 비단 정신분석학과 문학뿐 아니라 철학과 역사학, 정치학과 사회학, 기억연구와 문화연구, 의학과 법 담론 등에 두루 걸쳐 있다. 또한 트라우마의 문제는 폭력과 사고의 피해자들이 자신들이 입은 상처와 고통을 드러내고 치유와 보상을 요구하는 법적, 정치적 권리 주장으로 나타난다. 이들의 발언과 주장이 슬픔과 분노를 공유하는 새로운 공적 공동체의 창출로 이어지기도 한다. 트라우마 피해자와 생존자라는 말은 트라우마를 직접 겪은 당사자들뿐 아니라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그것을 공적으로 인정하는 사람들에게도 공히 적용되는 언어로 자리 잡았다. 아니 인간 자체가 이성의 광휘로 빛나는 존재가 아니라 트라우마를 안고 살아가는 취약한 존재로 재정의된다. ‘사유의 패러다임’으로서의 트라우마와 누구도 소유할 수 없는 무경계로서의 트라우마 1980년 외상 후 스트레스성 장애라는 진단명이 공식화된 이후 1990년대 미국 인문학계에서는 ‘재현의 아포리아’와 ‘타자에 대한 윤리적 응답’을 연결시킬 수 있는 사유의 패러다임으로 트라우마를 새롭게 읽어내는 흐름이 등장한다. 이 책의 1장에서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있는 캐시 캐루스와 쇼샤나 펠만은 트라우마의 문제를 탈구조주의 철학과 모더니스트 아방가르드 미학으로 확장시킨 대표적 논자들이다. 이제는 현대적 고전의 반열에 올라선 이들의 논의는 (내가 전적으로 수긍하는 것은 아니지만) 언어의 자유 유희에 떨어졌다는 비판을 받던 탈구조주의에 윤리적 토대를 마련했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이처럼 트라우마가 단순히 병리적 현상이 아니라 ‘사유의 패러다임’으로 올라선 것은 자아, 정체성, 기억, 시간성 등 근대 서구문화를 지배해왔던 범주들이 안고 있던 내재적 문제를 드러내고 그것들을 탈구脫臼시키면서도 허무주의로 떨어지지 않고 윤리적 책임과 사회적 연대성을 논의할 수 있는 강력한 레퍼토리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홀로코스트 역사 연구자로 유명한 도미니크 라카프라가 주장하듯이, “어느 한 장르나 분과학문도 하나의 문제로서 트라우마를 ‘소유’할 수 없으며, 트라우마에 확정적 경계를 그을 수도 없다.” 트라우마는 경계에 균열을 일으키고 안정된 구분을 무너뜨리는 것이다. 프리모 레비에서 제인 정 트렌카까지 문학작품에서 발견하는 트라우마 패러다임 사유와 실천의 패러다임으로서 트라우마를 이루는 여러 논의 중에서 ‘트라우마와 문학’의 관계를 이 책은 다루고 있다. 여러 문학작품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트라우마를 가진 이들의 모습을 발견한다. 홀로코스트를 증언하는 프리모 레비의 증언집에서(2장과 4장),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미국 남부 미시시피주 시골 마을에서 남부 역사의 트라우마로 돌아가 남북전쟁에서 패한 남부 백인들과 흑인 노예들의 상실을 애도하는 윌리엄 포크너에게서(6장, 7장, 8장), 노예제가 종식된 지 100년이 넘었지만, 딸을 노예제도로 보내지 않기 위해 제 손으로 딸을 죽인 뒤 유령으로 돌아온 딸에게 못다 한 사랑을 건네주고 그 딸을 역사의 저편으로 떠나보내는 토니 모리슨의 흑인 어머니(9장, 10장)에게서 발견한다. 또한 식민지 지배와 전쟁과 분단의 아픔을 겪은 뒤 타국으로 떠나야 했던 한국계 미국인 여성작가 테레사 학경 차가 받아쓰는 문화번역의 이야기(13장)와 한국의 가족에게서 버림받은 뒤 미국인 가정에 입양된 제인 정 트렌카가 들려주는 강제 이식과 인종 차별의 입양서사에서(14장)에서 이들의 모습을 다시 만난다. 망가지고 부서진 언어와 중단된 이야기 텍스트에서 발견하는 트라우마 진실 각기 시간과 공간과 문화적 맥락을 달리하여 서술되고 있는 이들의 이야기는 하나의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그것은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려는 불가능한 시도를 감행하는 것이다. 트라우마가 재현의 위기를 일으킨다면 그것은 서사의 불가능성뿐 아니라 서사적 표현을 찾으려는 강박적 시도도 발생시킨다. 내가 이 책에서 읽고 있는 작가들은 한결같이 자신들이 겪었지만, 온전히 알 수도, 이해할 수도, 소유할 수도 없는 기억을 말하려고 한다.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려면, 아니 때론 말할 수 없다는 것을 말하려면 다르게 말하는 법을 찾아야 한다. 언어는 더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