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제공 책 소개

노자의 도덕경은 무용(無用)한 책입니다. 읽어서 단순히 머리로 이해한다고 해서 도움이 되는 책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마치 자전거를 책으로 배우는 것과 같고, 사랑을 책으로 배우는 것과 같습니다. 지적으로는 이해할 수 있겠지만, 그 이해는 자전거를 실제로 탈 수 있게 해주지 않고, 사랑을 할 수 있게 해주지도 않습니다. 자전거도 사랑도 실제로 경험해야 이해할 수 있을 뿐입니다. 도덕경은 침묵으로 경험되어져야 하는 책입니다. 노자는 도덕경 1장에서, 언어로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이 없는데 억지로 표현하기 위해서 ‘도(道)’라는 말을 사용했다고 합니다. 도는 말 그대로 ‘길’입니다. 길은 하나의 과정입니다. 그 길은 시작도 없으며 끝도 없는 길입니다. 그렇다면 그 길을 어떻게 가야 하는 것일까요? 노자는 ‘덕’이라는 방법을 제시합니다. 길을 가기 위해서 ‘덕’이라는 실천방법을 구체적으로 밝힙니다. ‘덕’은 보통 ‘쌓는다’라고 표현합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쌓아가라는 것일까요? ‘덕’이라는 한자를 하나하나 뜯어서 분해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 德=[彳(조금 걸을 척) 혹은 行(다닐 행), 十(열 십), 目(눈 목), 一(하나 일) 혹은 乚(숨을 은), 心(마음 심)] ‘가다 혹은 행하다, 열 번(여러 번), 눈으로, 하나를 (집중해서), 혹은 숨어 있는 것을 살피듯 자세히, 마음을 관찰한다’라는 의미로 볼 수 있습니다. 비약해서 말씀드린다면, 내면의 관찰을 이야기합니다. 현대적인 말로 표현하면, ‘명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도’라는 길,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 ‘덕’이라는 실천 방법을 제시하고, 끊임없이 정진하라는 의미입니다. 도덕경은 1장에서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도’를 제시하고, 2장부터 ‘나 없음’, 즉, ‘도를 체득한 사람’은 ‘분별하는 지각’에서 벗어나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라는 주장’, ‘나의 것’, ‘나’가 없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이 에고적으로 말하는 ‘아름다움’, ‘선함’ 그런 것들은 ‘추함’, ‘선하지 않음’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왜냐하면 세상 사람들은 ‘나의 입장’에서 ‘아름다움’, ‘선함’을 규정하고 있을 뿐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모든 사람을 만족시킬 수 없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은 긴 것을 좋아하고 어떤 사람은 짧은 것을 좋아합니다. 어떤 사람은 단맛을 좋아하고 어떤 사람은 짠맛을 좋아합니다. 어떤 사람은 시끄러운 것을 좋아하고 어떤 사람은 조용한 것을 좋아합니다. 이처럼 모든 사람을 만족시킬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다음에 노자가 말하는 ‘있음과 없음은 서로를 만들어 내고, 길고 짧은 것은 서로를 이루며’ 등등의 이야기는 에고적인 입장 없이 본 실상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도덕경 3장부터는 언어로 표현할 수는 없지만, 노자가 경험으로 체득한 도에 대한 이야기를 해나갑니다. 3장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노자가 말하는 무위에 대한 이해가 필요합니다. 무위, 그리고 그것에 상반되는 개념이 유위입니다. 무위를 나누어 보면, 없음, 그리고 행함으로 볼 수 있습니다. 행하지 않는다는 의미라기보다는 실행을 하는데, ‘∼없이 행한다’라고 보는 것이 타당합니다. 왜냐하면 반대 개념인 유위가 있기 때문입니다. 유위를 나누어 본다면, 있음, 그리고 행함입니다. ‘∼있이 행한다’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말하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요? 무위자연이라는 말을 들어보았을 것입니다. 무위는 그렇다고 치고 자연은 무슨 말일까요? 자연은 말 그대로 스스로 그러하다라는 말입니다. 본래 그러하다는 뜻입니다. 앞의 무위는 자연이라는 말과 동일한 뜻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 즉, 무위(無爲)=자연(自然)입니다. ∼없다, 행한다.=‘본래 그러하다’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대체 ∼이 없다는 말일까요? 그것이 바로 행위를 하는 주체가 없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나’라는 것이 없다는 말입니다. 스스로 그러한 것이지, 그것을 하는 주체가 없다는 것입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무아(無我)’와 일맥상통하는 이야기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노자가 말하는 무위(無爲)는 사실 무아위(無我爲)라고 보면 쉽습니다. 유위(有爲)는 유아위(有我爲)라고 보면 됩니다. 무위(無爲)=무아위(無我爲)=에고 없이 행함=나 없이 행함 유위(有爲)=유아위(有我爲)=에고 있이 행함=나 있이 행함 그렇기 때문에 노자가 도를 체득한 성인(깨달은 사람)에 대해 묘사할 때, ‘에고 없이 행하기에 자랑하지 않는다’라는 식의 표현을 한 것입니다. 행위를 하는 행위자인 ‘나’라는 것이 없으니, ‘나의 이익’도 없고, ‘나의 자부심’ 등등도 당연히 없습니다. 그러므로 ‘살지만 소유하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나’라는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무욕(無欲)이라는 것도 욕망을 만들어 낸 내가 없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고, 그렇기에 노자는 ‘무욕(無欲)을 하고자 한다’라는 표현을 쓴 것입니다. 이렇게 무위(無爲)를 무아위(無我爲)로 풀어서 도덕경을 읽어보면, 아리송한 부분이 쉽게 풀리게 됩니다. 도덕경 25장에 도법자연이란 말이 있습니다. “도는 자연(스스로 그러함)을 법으로 삼는다”라는 이야기가 있는데,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에고 없이 스스로 그러한 것을 도의 법으로 삼는다는 것입니다. 자연은 자연을 움직이는 주체자를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그저 스스로 그러한 것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현대 과학기술 문명을 통해, 자연을 움직이는 어떤 주체자 따위가 없다는 것은 현재 인류에게 명백한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노자가 살았던 시대에는 이러한 사실이 명백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한 이유로 아마도 그 당시의 사람들에게 노자의 말은 오해의 소지가 많은 하나의 주장에 지나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도덕경 3장에서 에고가 생겨나는 이유를 분별심에 두고 있는 것도 유심히 읽어보시면 알 수 있습니다. 현명함을 숭상하지 않는 것, 분별은 바로 에고가 있기 때문에 생겨납니다. 그렇지만 에고가 사라지면, 좋다 나쁘다의 분별심, 현명함, 멍청함 등의 분간이 당연히 사라져 버릴 것입니다. 도덕경 4장부터 8장까지는 ‘도’라는 것이 대체 어떤 것인지에 대해 노자는 비유를 통해 이야기합니다. 왜냐하면 경험적인 영역을 지적으로 이해할 수는 없기 때문에 그저 비유를 통해 전달하려 하는 것입니다. 9장은 에고의 특성에 대해 10장은 에고가 없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11장은 에고가 없어져도 괜찮다고 이야기합니다. 12장은 에고로 사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고, 에고로 인해 파생되는 나의 것으로 여기는 것들의 허상에 대해 13장에서 부연해 줍니다. 이렇게 1장에서 13장까지 노자는 도덕경에서 말하고자 하는 개관을 밝혀놓습니다. 14장부터는 개관에 대한 부분을 좀 더 구체화하는 방향, 또한 도를 실현한 성인(깨달은 사람)은 어떻게 살아가고, 그것이 우리들에게 어떤 영향을 주고 있는지를 알려줍니다. 또한 나아가 현실의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의 고통과 그 고통이 발생하고 있는 원인들, 그에 대한 해결책도 제시해 줍니다. 그렇지만 노자가 누누이 말하고 있는 해결책들이 세상에서 실현되기 어렵다는 것도 부연합니다. 노자는 포기하지 않고, 도를 체득하는 방법으로 덕이라는 것을 제시하며, 어떻게 하는 것이 덕을 쌓는 것인지에 대해 설명합니다. 처음에는 모호하게, 그러나 점점 구체적으로 그 방법에 대해 밝혀나갑니다. 72장부터 76장까지 노자는 ‘삶과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며, 진실로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말해줍니다. 그리고 77장부터 80장에 걸쳐서 다시 한번 자신이 앞에서 이야기한 것들을 정리해 줍니다. 81장에 비로소 제일 첫 장에서 말한 것처럼, ‘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