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을 가진 이들은 인생의 일부에 탐닉한다
인생 그 자체에 탐닉하거나
내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사람인 동시에
나를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봐주는 사람,
이것이 하나로 합쳐지자 정말로 사는 것 같았다
―끊임없이 ‘나’로 되돌아가게 하는
현실 우정의 다이내믹에 관하여
여자와의 관계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당연히 어렵다. 그것이 자신에 관한 질문을 마주하게 하기 때문이다. 다른 여자를 어떻게 대하는지는 자기 자신을 어떻게 대하는지를 말해준다. 궁금해하는지 어색해하는지,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여기는지, 판단하는지 활용하는지, 변화를 지켜보는지, 기대 따윈 없는지, 믿을 만하다고 생각하는지 믿어보기엔 너무나 약하다고 생각하는지…… 직면은 어려운 일이다. (…) 자신의 생명력을 죽이지 않는 여자들, 의문과 불안을 읽고 쓰고 운동하는 것으로 바꾸는 여자들을 만난 것이 기쁘다. 여자인 내가 다른 여자들을 전면적으로 만날 수 있다는 사실이 엄청난 행운으로 느껴진다. 처음부터 그러지는 못했지만…….
—「에필로그」
서한나 신작 에세이. 『드라마: 그럼에도 친구가 되는 여자들』은 결정적이지도, 완전하지도 않아 보이는 우정 안에서 ‘전망 없음’을 공유하고 끊임없이 자기를 발견하며 비로소 생을 만들어가는 여자들의 이야기다. “고양이적인 기분과 정서”, 각자의 불안과 의심, 비참과 분노를 어쩌지 못한 채 살아남아보려 분투하던 여자아이들은, 다른 듯 보이는 공통의 경로와 언어를 거쳐 접점을 발견하고 서로를 응시한다. 통하는 것을 흐르게 하고, 관계의 탄생을 받아들이며, 공동체의 일원이 된다. 일단 그 일이 이루어지면 감추어야 했던 것은 본질이 되고, 닮은 점도 다른 점도 이해 가능한 특성을 넘어 서로를 끌어당기는 매력이 된다. 소소한 일상은 더 이상 버티고 때우며 허비되는 시간이 아니라, 시시각각 삶으로 축적되는 시간이다. 언제 어디에 내가 있고 삶이 있었을까? 그 자리로 끊임없이 되돌아가게 해주는 타인의 존재, 그것이 우정임을 이 책의 드라마는 환기한다.
여자애들 사이에서
얼음 정수기 되기
『드라마』는 “아무 때나 예고 없이 들이닥치는 … 여자애들에게” 바쳐졌다. 이 책의 우정도 그런 여자애들의 것이다. 모든 강렬한 것의 원형이 있었던 여자고등학교에서는 아직 우정이 되지 못한 에너지의 충돌이 끊임없이 일어났다. 반응적이고 임시적이었던, 자기가 누구인지 타인은 어떤 사람인지 알지도 못한 채 내던져졌던, 그러나 세상을 그 누구보다 예민하게 감각할 수밖에 있었던 불안한 소녀들이 거기에 있다. “엄격하고 경직돼 있어서 별로 인기가 없는 애들, 그렇지만 어디가 아프거나 약해졌을 때 기대고 싶어지는 애들, … 나이 차이 많이 나는 동생이나 언니가 있고 엄마가 일을 해서 야밤에 거리를 쏘다녀도 괜찮은 애들, 머리를 질끈 묶어서 눈꼬리가 아파 보이게 올라가 있는 애들, 밥을 한 그릇 다 먹는 애들, 가끔 좀 구수하게 말하는 애들, 누가 지적하면 할머니 손에서 자랐다고 대답하는 애들”의 모습을 하고. 그중에서 몇 명은 서로 눈을 마주치고, 말을 섞고, 시간을 함께 보내게 된다. 서로의 “순도 높은 초라함”을 서로가 감당해주며 둘만의 세계를 만들어간다. 말로 눈길로 몸짓으로 웃음도 주고 상처도 주면서 어울리는 법과 멀어지는 법을, 섞여드는 법과 겉도는 법을 배운다. 조금 웃고 많이 놀라고 늘 울면서, 세계 안에서 ‘나’로 존재한다는 게 어떤 건지 알아간다.
무방비 상태로 여고 한복판에 놓여 자기만의 투쟁에 촉각을 곤두세워야 했던, 그러느라 남의 투쟁을 가늠할 겨를이 없었던 불만 가득한 열 몇 살 때의 우정을 ‘살인마’ 같은 것이었다고 회상하면서도, 저자는 그런 생활을 단지 방어적이고 단정적이었던 어린 시절의 미성숙한 날들로 한정 짓지 않는다. 바로 여기에서 이 책은 스파크를 일으키는 것 같다. 모든 사람에게 미움받는 그 시기마저 하루빨리 빠져나오고 단절해야 하는 순간이 아닌, 끊임없이 되돌아가고 연결되고 싶은 순간으로 재생시킴으로써 그때에 ‘내’가 만들어지고 있었다고 말하는 것이다.
“글이 나오지 않는 건 삶을 대하는 태도가 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전까지는 세상에 애정이 없기 때문에 할 말도 없는 것이라고 얘기했었는데, 지금은 차라리 정수기 얼음에 가까울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내 안에서 무언가가 바뀌는 동안에는 뭘 내놓아야 할지 모르는 것이다. 마치 얼음 정수기가 얼음을 만드는 중에는 얼음을 내놓지 못하는 것처럼…….”(116)
우정의 아사코들과 함께
“자기와의 관계에서 편안할 수 없는 사람은 타인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도 알지 못한다. 나는 좀더 내밀하게 내 욕망의 왜곡된 부분을 파고들었고, 내 안의 무언가가 나에게 말하려고 하는 것을 줄을 잡아나가듯 파악하기 시작했다. … 다른 사람과 잘 지내는 데는 생각보다 더 많은 것이 필요했다. 나는 그런 사람들을 관찰했다. 그들은 혼자 있을 때나 둘이 있을 때나 건강하고 낙천적이고 편안해 보였다. 그것은 개인적인 기질에서 나오는 것이기도 하겠지만, 그들은 무엇보다 남을 꿰뚫어보려고 하지 않았고, 더 나아가 그것으로 자신의 안위를 확보하려고 들지 않았다. 그들은 숨기지 않았고, 파고들지도 않았다.”(21, 35-36)
멀쩡해 보이는 남들의 우정을 곁눈질하며 완벽한 우정을 기다리던 그에게 예고 없이 들이닥친 여자들이 있었다. 그들과의 우정은 완벽하다기보다…… 웃기고 짜증 났다. 먹을 거 사 먹고 돌아다니고 한담하고, 오라고 불러놨지만 갔으면 싶네 생각하고, 그러다 ‘또 저러네’ 싶은 짓을 어느 한쪽이 하면 뒷골이 녹을 때까지 싸우고, 다른 날엔 얘가 있는 생활의 마음 놓임을 내 정신의 평화에 편입시키고, 우정이 극치에 이르면 못 참겠다는 듯이 고백하고―“난 너랑 얘기하는 게 제일 재밌어. 너랑 말하고 웃을 때 너무 시원해.”(69) 먼저 말하겠다고 너무 자주 서로를 “야”, 라고 부르고, 할 얘기가 그렇게 많아도 다 별 얘기 아닌 것들이라 코웃음만을 간직한 채 가뿐하게 헤어지고, 그래서 헤어져도 말할 것이 생각나고, 아무 말이나 시킬 수 있고.
이 책의 중간 두 파트는 현실 우정의 주인공들이 저자와 만났을 때 발생하는 다이내믹이 이끌어간다. 부부 같은 사이, 헤어진 연인 사이, 동료 작가 사이, 먼 풍경 같은 사이, 거슬리는데 끌리기도 하다가 역시 거슬리는 사이, 배울 게 많은 사이, 어쩌다 보니 멀어진 사이, 그래도 가끔 생각나는 사이, 인터넷에 카페 차려놓고 댓글 다는 사이, 평생 연락은 안 해도 블로그는 염탐할 사이, 둘이 남겨지면 ‘자, 이제 진실을 말할 시간이야’라는 눈빛을 주고받는 사이…… 우정은 한 가지 모습이 아니다. 이제 그는 함께 시간을 만들어내지 않아도 괜찮다는 걸 알고, 상대의 시간이 멈추거나 흐르기를 기다릴 수 있다. 거기서 우정의 아사코를 발견할 줄도 안다.
“‘너의 아사코는 누구야?’ 앞뒤로 몇 번의 끌림이 반복되어도 덮이지 않고 오히려 그쪽에 수렴되거나 정리돼버리는, 사랑의 원형 같은 존재가 너에게 누구인가 하는 질문이다. 내가 그 순간 생각한 것은 이런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이 대답하길 주저하더라도, 금세 누군가를 떠올릴 것이라는. 우정의 아사코도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되면 이미 그는 아사코가 아니겠지만……”(72-73)
전망 없음을 공유하며
끊임없이 돌아가기
사실 그때 그 여자애에게는 사정이 있었다, 모든 소녀에게 사정이 있듯이.
모든 여자에게는 살아야 했던 삶이 있는지 모른다―아직 어리고 미숙해서, 순하고 부드러워서, 기반이 없고 자원이 없어서, 그런데 똑똑해서, 세상이 내가 잘하는 걸 모르는 체하고 나한테만 꽉 막혀서 가혹하게 굴었기 때문에, 내가 아닌 나로 기웃거려야 했던 자리가 너무 많았기 때문에, 그 바람에 제대로 살지 못한 인생의 부분이. “하지만 어떻게 그곳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우리가 진작 그렇게 만날 순 없었을까?” 저자는 묻는다.
“엄마의 베란다에 있는 물건들은 잘 쓰였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