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 과학의 결정적 초석을 놓은 다윈 이후 가장 위대한 생물학자
유전의 핵심에 있는 디지털 암호이자 생명과 비생명을 구분해 주는 요소, 바로 유전 부호를 발견하여 생물학 혁명을 일으킨 프랜시스 크릭(1916~2004). 의식의 문제까지 천착하여 언젠가 인간의 의식도 생물학적으로 샅샅이 설명되리라는 ‘놀라운 가설’을 주창함으로써 오늘날 뇌 과학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 20세기 생명 과학 혁명은 어떻게 싹트게 되었는가? 노벨상을 공동 수상한 제임스 왓슨에 비해서 잘 알려지지 않은 크릭의 독특한 진면목을 제대로 그려낸 전기이자 20세기 유전자 발견의 역사를 보여주는 매트 리들리의 수작.
국내에 처음 소개되는 크릭 전기인 이 책에서 지은이는 과학자의 입장에서 크릭의 과학적 탐구의 여정과 유전 부호 해독의 의미를 간결하고 매력적으로 쉽게 설명할 뿐만 아니라 과학자로는 보기 드물게 수다스럽고 사교적이었던 크릭의 인간적인 모습을 생생하게 묘사한다. 크릭과 노벨상을 공동 수상한 절친한 동료 제임스 왓슨과 모리스 윌킨스, DNA의 X선 회절 분석을 통해 이중나선 구조의 발견에 기여한 로절린드 프랭클린, 분자 생물학에서 크릭과 왓슨의 협력 관계와 유일하게 쌍벽을 이루었던 자크 모노와 프랑수아 자콥, 크릭과 함께 유전 부호의 비밀을 밝혀낸 시드니 브레너, 크릭에게 생각하는 방법을 알려 준 수리논리학자 게오르그 크라이젤, 프랭클린과 가장 가까웠던 동료였던 화학자 아론 클루그, 멘델과 다윈의 이론을 조화시킨 저명한 진화학자 로널드 피셔 등 20세기 과학계를 풍미했던 인물들과의 협력과 교류를 통해 20세기 생물학의 발전 과정과 그 의미를 엿볼 수 있다. 크릭과 만난 대부분의 사람이 노벨상을 수상할 정도로 그가 지적 교류의 중심지였음을 보여 준다.
이 책은 크릭이 평생 자신의 목표로 설정한 화두는 ‘생명’과 ‘의식’이었음을 주목한다. 크릭에게 이중나선의 발견이 끝이 아니라 시작이었으며, 어쩌면 DNA 구조의 발견보다는 유전 부호의 완성이 더 위대한 업적이일지도 모른다고 강조한다. 유전 부호는 과거에서 미래로 메시지를 전달하는 암호였다. 이것이야말로 생물과 무생물의 차이를 낳는 요인이었다. 토끼와 돌멩이가 다른 까닭은 토끼의 몸에 알파벳 네 개를 사용하는 세 문자 단어들로 이루어진 기나긴 메시지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토끼와 사람이 다른 까닭은 토끼의 메시지 속 문자 서열이 사람의 것과 다르기 때문이다. 지은이는 “단백질 합성 기구의 거의 모든 요소들에 크릭의 통찰과 실험이 낙인처럼 찍혀 있다. DNA 부호를 읽는 능력은 오늘날의 생물학에 막강한 힘을 제공했다”고 밝힌다. 전령 RNA의 존재를 예견하고, DNA가 삼중 부호라는 것을 입증한 크릭은 유전 부호 해독에 중추적으로 기여했다. 이는 단백질 결정학, 염색질 구조, 배아 발생, 신경과학의 폭발적인 발전에 중요한 토대가 되었고 인간 게놈 프로젝트 등 생명 공학 연구의 실마리가 되었다.
두 번째 연구 주제로 평생 인간의 뇌에 관해서 생각한 크릭은 예순 살에 자신의 오래된 결심을 실행하고자 캘리포니아로 떠났다. 생명을 공동 연구했던 왓슨과 브레너에 이어 의식을 연구하는 동료 학자 크리스토프 코흐를 만나게 되었다. 크릭은 자신의 책 『놀라운 가설』에서 “당신이라는 사람, 당신의 기쁨과 슬픔, 당신의 기억과 야망, 당신의 개인적 정체성과 자유의지가 사실은 방대한 무리의 신경세포들과 연관 분자들이 취하는 활동에 지나지 않는다”고 자신만만하게 말한다. 크릭과 코흐는 뉴런 연합체들끼리 경쟁해서, 여기서 이긴 연합체가 어떻게든‘의식’으로 들어간다는 환원주의적 입장을 밝혔다. 크릭은 뇌의 특정 부위에서만 발현하는 유전자를 찾아내는 최신 분자 생물학 기법들을 쓰면 전장(前障)의 분자 생물학적 특징을 곧 밝혀낼 수 있을 거라고 기대했다. 크릭은 죽기 직전에 그 주제에 관한 자필 초고를 마무리했지만, 시간이 부족했다. 이 초고의 마지막 문장은 그답게 몹시 다급한 말투였다.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이 무엇이겠는가? 그러니 더 기다릴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왓슨의『이중나선』부터가‘나는 크릭이 겸손하게 구는 것을 한 번도 보지 못했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하거니와, 과학자로서는 왓슨보다 크릭이 훨씬 더 흥미로운 인물이다. 크릭은 대학에서 물리를 전공했다. 2차 세계대전 중에는 어뢰 연구로 이름을 날렸고, 전쟁이 끝난 후 서른이 넘어서야 생물학으로 전향했다. DNA 이중나선 구조를 발견했을 때 왓슨은 스물다섯 살이었고, 크릭은 띠동갑인 서른일곱 살이었다. 왓슨이 열여섯 살에 대학에 들어간 신동이었던 반면, 크릭은 노벨상에 값하는 연구를 해낸 다음에야 겨우 박사학위를 받은 대기만성 형이었다. 또한 크릭은 케임브리지에서 멋쟁이 축에 들었고, 동료들은 그의 차림을 선선히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처럼 패션 잡지 『보그』를 구독하는 과학자는 많지 않았다. 그는 과묵하지 않고, 수줍어하지 않고, 편집증적이지 않다는 점에서 과거의 위대한 과학자들 가운데 두드러지는 존재였다.
크릭은 제임스 왓슨, 시드니 브레너, 크리스토프 코흐로 단짝을 바꿔가며 늘 소크라테스적 문답을 즐기곤 했다. 그는 대화로 과학을 하는 사람이었다. 과학적 수다에 대한 열정을 공유한다는 점이야말로 이 2인조 관계의 핵심이었다. 또한 논리적 이해력이 뛰어나, 남의 십자말풀이를 구경하다가 마지막 빈칸을 자신이 덜컥 채우곤 했다. 크릭이 단백질 결정학, 유전학을 이해하는 방식은 독특했다. 그것은 주로 시각적인 방식, 시각화의 직관이었다. 이것이 그의 독창적인 기여였다. 그는 “물론 상세한 계산을 다루는 능력은 필수이지만, 나는 수학적 강행군에 먼저 매달리지 않고도 사상과 논리의 조합을 통해 그런 수학 문제들의 답을 대부분 눈앞에 떠올릴 수 있다는 것을 깨우쳤다”고 밝혔다.
왓슨이 “우리는 한때 우리의 운명이 별들 속에 있다고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그러나 이제 운명은 우리의 유전자 안에 있음을 안다”고 말했듯이, 우리는 물리학을 이어 과학의 왕좌를 물려받은 생물학의 세상, 현 세기를 생물학 시대로 만든 크릭의 세상에서 살고 있다. 유전학, 분자 생물학, 생명 과학에서 리처드 도킨스, 스티븐 제이 굴드, 리처드 르원틴 등으로 대표되는 현대 생물학의 최전선까지 크릭의 연구 성과는 오늘날 현대 과학의 원류가 되고 있다.
이 책은 많지 않은 분량임에도 불구하고 필요한 내용을 압축적으로 잘 골라 정석적으로 잘 쓴 전기이자 초심자를 위한 훌륭한 유전학 안내서이다. 기억을 바탕으로 한 자료보다 기록된 증거를 신뢰하라는 크릭의 조언에 따라, 지은이는 크릭의 편지, 강연 메모, 논문 초고, 연구 일지 등 크릭이 직접 남긴 문서를 꼼꼼하게 검토하고 인용했다. 또한 크릭의 가족, 왓슨, 브레너, 코흐 등이 제공한 미발표 자료, 인터뷰 내용, 서면 질의를 통해서 크릭의 선구적이고 모험적인 과학 세계에 대한 분석과 해설뿐만 아니라, 잘 알려지지 않은 크릭의 인간적인 면모까지 온전히 복원해 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