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멘트
휘청이는 네온 달빛 아래 조각나는 뉴욕의 밤. 연행되는 흑인을 배경으로, 그토록 가족에 강박적인 백인은 분열한다. 모든 노력이 편집증적으로 오도된 것일 뿐이라면, 조각난 삶은 누가 치유할까. (※ 스포 주의) 한때 아메리칸 드림의 중심이었을 뉴욕은 아무런 희망 없는 도시로 전락했다. 돈을 벌기 위해선 이들 형제처럼 은행을 털든지, 크리스탈의 남자친구나 레이처럼 마약을 팔아야 한다. 오프닝의 드론 숏 이후 카메라는 뉴욕 골목길만 헤멘다. 클로즈업으로 마치 폐소공포증에 가깝게 화면을 메운다. 요컨대 상실된 꿈의 마천루. 이제 뉴욕은 벗어나야만 하는 공간이다. 결국 <굿타임>은 뉴욕을 벗어나려는 형제의 고군분투다. 허나, 그들의 '탈뉴욕'은 쉽게 허락되지 않는다. 은행 강도에서 시작된 사건은 꼬일 대로 꼬이고, 점점 더 어려운 길, 진탕으로 빠져들 뿐이다. 심지어 ㅡ뉴욕을 벗어나려는ㅡ 이들은 이민자도, 흑인도 아닌 백인이다. 뒤엉켜 가는 사건 속에 놓인 코니를 보자면 마틴 스코세이지의 <특근>이 떠오른다. 하지만 그와는 조금 다른 양상이다. 그야말로 불가항력적인 상황이 덮쳐 오던 <특근>은 그 카프카적인 상황에서 벗어나려는 주인공의 발버둥이었던 반면 <굿타임>은 사실상 코니의 선택으로 점철되어 있다. 그런데 코니의 선택은 의아하기만 하다. 정신지체의 동생과 은행을 털고자 하고, 동생을 경찰로부터 빼돌리려 하고, 돈을 구하고자 마약를 팔려 한다. 아무리 봐도 무모하건만, 그것이 최선이라는 잘못된 믿음. 한 번의 잘못된 선택은 더 잘못된 선택을 요구하고, 그런 나쁜 선택이 코니를 절망으로 이끈다. 이에 영화는 철저히 코니의 시선을 따라감에도, 어려운 길만 골라서 가려는 코니를 통해, 관객의 감정 이입을 방해한다. 최소한 동정의 여지가 적다. 그렇다면 영화는 왜 이들과 거리를 두길 원하는 걸까. 코니는 이상하리만치 동생에게 집착한다. 가족이나 형제를 들먹이며 오직 자신만이 닉을 도와줄 수 있다고 믿는다. 정작 또 다른 가족인 할머니에겐 무관심할 뿐더러 아예 배척한다. 일찍이 닉을 도와주려는 나이든 의사에게도 막말을 퍼부었다. 마치 모든 걸 해결할 수 있다는 듯이 무작정 고립을 자처한다. 그러나 그가 믿는 혈연, 공동체는 번번히 아스러지고 만다. 이건 일종의 오인에 가까워 보인다. 한때 마냥 돈과 꿈의 마천루인 줄만 알았던 뉴욕이 길거리로 침잠해 버린 것처럼, 가족(공동체)만이 해결해줄 수 있다는 폐쇄적인 믿음처럼, 또 그 모든 희망이 실은 절망에 가까웠던 것처럼. 특히 이 같은 오인은 얼굴이라는 제재로 직접적으로 드러난다. 영화 중반부터 코니와 함께 하는 건 닉이 아니라 (코니가 닉으로 오인한) 레이였다. 똑같은 백인으로, 동생인 줄 알았다는 점에서 일종의 유사가족 혹은 공동체일 둘은 '마약'을 위해 의기투합한다. 그러나 이는 오로지 돈을 위한 명목적인 공동체였던 만큼 화합은 결코 불가능하다. 그러니 또 다른 마약상인 칼리프와도 마찰만 빚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애당초 코니가 찾아 다닌 건 '동생'이었다. 요컨대 가족에 대한 강박적인 믿음 속에서 코니의 선택, 즉 자신만이 최선의 길을 찾을 수 있다는 믿음은 그저 편집증적으로 오도된 것일 뿐이다. 코니는 실상 더 나은 길이 아니라 최악의 길을 택하고 있다. 스스로 고립을 자처하고, 얼핏 유사한 공동체가 형성되지만, 끊임없이 반복하고 분열할 뿐이다. 할머니, 의사, 여자친구, 보석 채권자, 레이, 칼리프, 심지어 닉까지. 코니는 그 어떤 백인과도 평화가 유지되지 못한다. 한편 백인들의 분열 속에서 희생되는 건 애꿎은 흑인들이다. 영화 초반부, 코니는 닉과 은행을 털 때 가면를 사용한다. 다름 아닌 흑인 가면이었다. 코니가 병원에서 나와 들른 집 역시 흑인의 집이었다. 방 하나를 내어줄 정도로 코니를 믿고 아량을 베풀지만, 코니는 그저 이용만 할 뿐이다. 특히 크리스탈은 끝내 외면 당하고 말았으며, 와중에 놀이공원 시큐리티는 코니에게 폭행 당하고 옷과 신분까지 빼앗긴다. 즉 이용하는 쪽은 백인 코니지만, 번번이 연행되는 건 크리스탈과 시큐리티와 같이 흑인이었다. 이 모든 게 가능했던 건 아마 백인의 사회적 특권 때문인지도 모른다. 물론 무리한 일반화일 수 있지도 모르나, 백인 경찰에게 진압 당하는 흑인을 보여주던 TV 프로그램 푸티지가 아마 우연은 아닐 것이다. 가해자와 피해자, 흑인과 백인의 얼굴. 분열하는 관계를 보자면, 혹시 이 역시 어떤 오인의 연장은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든다. 우리가 여태 믿은/본 얼굴은 무엇일까. 그렇다면 코니가 최종적으로 얻은 건 무엇인가. 없다. 그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해결된 건 없다. 본인 역시 체포되었고, 동생과 함께 뉴욕을 떠나려던 그의 꿈은 허망히 무너졌다. 그저 경찰차 뒷자석, 철창 속에 갇혀 있다. 스스로 모든 걸 해결하려다 자초하고 만 완전한 고립과 구속. 남은 건 창살 너머의 공허한 얼굴뿐이다. #_나가며 매끈한 범죄 스릴러의 형태를 한 <굿타임>은 (어쩌면 미국 길거리의 좌표일) 흑인은 연행되고 백인은 분열하는 뉴욕을 비춘다. 영화는 희망을 찾기 위해 최악인지 차악인지 모를 선택을 이어가는 코니의 절박한 발버둥을 비추는 한편 그것이 실은 잘못된 것임을 동시에 조망한다. 어느 쪽에 포커스를 두든 영화는 단순히 장르적인 쾌감을 넘어 다층적인 매력을 선보임에 틀림없다. 특히 <굿 타임>의 다소 과장된 듯한 스타일은 오히려 그 자체로 리얼한 질감을 만든다. 불안하고 거친 카메라와 차가운 금속성의 신디사이저 음악. 빠른 컷과 벅찬 호흡. 물론 시종 쏘아대는 클로즈업이 거북할 만도 하나, 우리가 보아야 할 건 분명 그처럼 화면을 메운 얼굴들일 것이다. 또한 그 덕에, 중간중간 롱숏이 주는 시선의 환기가 괜히 더 관조적이다. 무엇보다 일련의 흐름 끝에 마주한 엔딩은 서정적인 울림마저 준다.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도록 끝나지 않는 (치료 받는) 닉의 '얼굴'을 보면서 한 가지 생각과 마주한다. 그 모든 노력이 편집증적으로 오도된 것에 불과하다면, 조각난 삶은 누가 치유해야 하는 걸까. 한편 로버트 패틴슨을 말하지 않을 수 없을 것 같다. 끊어질 듯 팽팽한 리듬의 영화를 지탱하는 건, 단연 로버트 패틴슨의 존재감이다. 오프닝과 엔딩, 그리고 영화를 줄곧 채운 그의 얼굴과 도시를 종횡하는 그의 움직임이야말로 영화의 모든 걸 대신하고 짊어진다. 장르적인 탓일지 일견 부족해 보이는 개연성마저 그의 표정과 몸짓이 설득해낸다. 조금 단적으로 말해 <굿 타임>은 로버트 패틴슨의 영화라 불러도 손색없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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