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멘트
육승완

육승완

5 years ago

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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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광찬란적일자 : 햇빛 쏟아지던 날들

영화 ・ 1994

평균 3.6

나는 나한테 나고, 너는 너한테 나. # # # 본작은 상대적인 시간감각 하에서 주인공에게 의미 있던 사건들을 골라 과장되고 특징적인 방식으로 표현한다. 어린 시절의 자신감 넘치고 즐거운 시간들은 흡사 만화처럼 느껴지는 과장된 각도로 촬영되고, 위험한 상황도 주인공이 의식하지 않았을 땐 위험요소를 배제한 상태로 화면을 구성하며, 아름답게 추억하는 시간들은 유달리 밝은 색감으로 조정되어 있다. 러닝타임에서 특정 사건을 다루는 비중은 곧 주인공이 해당 사건에 느끼는 중요도와 일치하므로, 일탈의 시간이나 미란과의 추억은 그 비중이 높고 묘사 또한 아름답다. 즉, 본작은 개인이 시간을 상대적으로 인식하고, 정보를 나름의 기준으로 규정함으로써 각자의 진실이 발생하는 과정을 그린다. 객관적 사실만 놓고 보면 그 날의 풀밭에선 불타는 풀냄새가 나지 않았고, 햇빛도 그 시절에만 유달리 가득하지 않았다. 하지만 주인공에겐 그렇게 규정되었기에, 훗날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 봐도 자신이 인식한 대로 기억날 뿐, 객관적인 진실은 사라지고 없다. 이를 확장해보면 지프에 총을 싣고 200명의 불량배가 대치했던 사건 역시, 당시의 주인공에게 그만큼 거대하고 비장한 전쟁으로 인식됐을 뿐 실제로는 다른 양상이었을지도 모른다. 이런 가능성은 영화 내에서 노골적으로 점쳐지는데, 기억이 장난을 쳤다던가, 실제와 꿈이 헷갈린다는 주인공의 독백, 류이쿠와의 다툼에서 화면을 멈췄다가 다시 역순으로 되돌리는 과감한 연출 등은 극중의 장면들이 있는 그대로의 진실이 아니며, 상대적인 인상을 자의적 기준으로 재조합한 결과물임을 천명한다. 이로써 유베이페이와 미란을 둘러싼 모호한 사실관계처럼 직접적으로 언급된 부분 외에도 극중의 정보와 객관적 진실 사이에 간극이 존재할 수 있다는 추론이 가능해진다. 보통 모든 존재가 동등하다는 점을 이야기하려면 어떤 존재에도 스포트라이트를 비추지 않는 방식을 택하겠지만, 본작은 대담하게도 한 존재에만 스포트라이트를 비춘다. 이로써 개인은 시간과 존재를 상대적으로 인식하고, 개인이 느끼는 상대성은 진위 여부의 문제가 아닌 가치 판단의 문제이며, 가치는 결코 절대적이지 못하기에 모든 존재엔 우열이 없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쉬운 말로 비교하자면, 전자는 모두가 평범해서 모두가 동등하고 후자는 모두가 특별해서 모두가 동등하다는 논리이다. 이렇듯 주제의식의 도달에 서사보단 방법론을 경유하는 작품이기에, 작품 내의 모든 정보를 신경 쓰며 감상하지 않더라도 무리 없는 감상이 가능하다. ​ ​​개인은 의식하지 못하더라도 역사의 영향을 받지만, 의식하기 전까진 역사의 영향은 개인의 의식 속에 부재하는 것과 다름없다. 따라서 극중에서 역사적 정보의 제공은 매우 소극적으로 이루어지며, 본작에서 서사와 역사적 사건의 연계를 읽어내는 것은 관객이 미리 학습한 정보의 인용에 가깝다. 이 말인즉, 본작은 역사적 지식이 배제된 관객들에게 역사적 정보를 제공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는 뜻으로 역사적 맥락은 "역사가 개인에게 영향을 끼친다"는 대전제 정도로만 기능해도 충분하다. 앞서 말했듯 작품 내의 정보를 다 알고 이해할 필요가 없는 영화인만큼, 역사적 맥락에 집중하느라 다른 재미와 놀라움을 놓치지 말자. 정치적으로만 읽어내기엔 훨씬 크고 영화적인 영화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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