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멘트
아무것도 알 수 없을 때. . '대한민국에서는 하루에 평균 38명이 자살한다.' 보르헤스는 점 하나를 찍는다. 'OECD 국가의 평균 자살률은 12명이다.' 보르헤스가 점 하나를 더 찍는다. '한국은 사람 살 곳이 못 되나 보군. 정부는 대체 뭘 하고 있는 거야?' 읽는 이가 점을 잇는다. '지난 정부가 있을 때 한국의 평균 자살률은 46명이었다.' 보르헤스가 점 하나를 또 찍는다. '아닌가? 이번 정부는 잘 하고 있는 건가?' 읽는 이가 점을 다시 이어본다. '한국 국민의 85%는 현 정부가 높은 자살률에 책임이 있다고 응답했다.' 보르헤스가 점 하나를 다시 찍는다. 읽는 이는 혼란에 빠진다. 보르헤스는 그렇게 거듭 점을 찍는다. 온통 빽빽이 찍히는 점 속에서 어떻게든 선을 이어보려는 읽는 이의 노력은 계속 허사로 돌아간다. 마침내 모든 걸 포기한 읽는 이 앞에 남은 건 점으로 꽉 찬 시커먼 화면뿐이다. . '픽션들'은 이런 책이다. '픽션들'은 사실이라고 믿었던 것들이 어떻게 사실이라고 간주되기 시작했는지 묻는다. 진실(이라고 믿었던 것)이 얼마나 연약한 기반 위에 간신히 만들어졌는지, 인과관계나 통계적 추정, 권위자의 검증 따위로 꾸며낸 진실이 얼마나 쉽게 배반당할 수 있는지 보여준다. '바벨의 도서관'은 처음 언급한 예시와 가장 비슷한 형식의 단편이다. 상상 가능한 모든 알파벳의 조합으로 이루어진 도서관에서 책 한 권을 꺼내 읽고 의미를 찾아보려는 읽는 이에게 보르헤스가 다른 책을 보여준다. 그 책이 무슨 의미가 있어. 여기 완전히 반대되는 책이 있잖아. 그 책이랑 단어 하나만 다른 책도 있고. 보르헤스는 읽는 이의 고개를 들어 무한히 펼쳐진 서재 앞에서 절망하게 한다. 눈먼 사서는 깔깔대며 웃는다. 대체 뭘 근거로 네가 읽은 문장이 네가 해석한 그 뜻일 거라고 생각하는 건데. 아니라고, 사전에서 분명 이 말은 이 뜻이라고 배웠다고, 항변하는 읽는 이에게 보르헤스는 '틀뢴, 우크바르, 오르비스 테르티우스'를 들이민다. 그 사전이 어떻게 쓰였는지 아는지, 그 사전의 권위는 어떻게 검증하며 그걸 검증한 사람은 어떻게 검증할 수 있을지 아는지, 보르헤스는 계속해서 묻는다. 내가 명석판명한 이성을 써보면 알 수 있다고 읽는 이가(또는 데카르트가) 다시 외치면 보르헤스는 '원형의 폐허들'을 꺼낸다. 누가 네 이성을 믿을 만하다고 판단했냐고. 네가 그냥 꿈꾸는 중일지, 아니면 아예 꿈꿔지는 신기루일지, 네가 소파에서 생각하고 있다고 믿는 정신병자인지, 아니면 매트릭스 속에서 꿈틀대는 인간 먹이일지 어떻게 아느냐고. . 무언가 알 수 있다는 가능성을 처절하게 짓밟는 보르헤스의 잔인한 사고실험은 개인뿐 아니라 세계 전체에까지 확장된다. '바빌로니아의 복권'은 그러한 단편 중에서도 정교하고 참신하다. 이 단편이 주는 인상은 뜬금없지만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의 안톤 쉬거가 안긴 인상과 비슷했다. 어쩌다가 이 살인마가 내 앞에 오게 된 걸까? 알 수 없지. 너도 모르는 사이 네가 누군가에게 말할 수 없는 상처를 안긴 결과일까? 살인마를 탄생시킨 사회적 모순의 결과일까? 아니면 그냥 살인마가 운전하다 어쩌다보니 네 차 앞에서 기름이 떨어진 걸까? 보르헤스는 운명의 총구 앞에서 허망해 하는 읽는 이에게 이 세계가 원래 설명할 방법이 없다고, 우리가 알 수 있는 건 지금 여기 내 앞에 총이 있다는 사실밖에 없다고 말한다. 그리고 기어이 살인마가 동전을 던지게 한다. 단편의 끝부분은 한층 더 나아가 복권놀이의 궁극에 앉아 있을 신을 찾아 헤맨다. 제게 찾아온 이 재난은, 이 비극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합니까. 이런 일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는 필연을 보여주십시오. 어떻게 하면 이를 막을 수 있었을지 알려주십시오. 그러나 신은 침묵한다.(신의 존재마저 불확실해진다.) 보르헤스 역시 무수한 우연으로 해체된 사실의 '점'들을 보여줄 뿐 그 어떤 것도 이어주지 않는다.(이런 점에서 끝부분은 '곡성'의 섬뜩한 메시지와도 맞닿아 있다고 느꼈다.) '두 갈래로 갈라지는 오솔길들의 정원'과 '배신자와 영웅에 관한 주제'는 '바빌로니아의 복권'이 그려내는 그러한 무수한 우연의 점 중 하나를 선택해 보여준다. 나치 독일에 협력하는 영국군 중국인 스파이, 미로를 소재로 해 미로가 되어버린 책을 보관하는 미로같은 집, 자기와 같은 이름의 도시를 알리기 위해 죽은 앨버트는 모두 1인칭 시점에서는 알 길이 없는 우연의 속성을 극대화해 보여주는 소재다. 반면 '배신자와 영웅에 관한 주제'는 (셜록 홈즈식의 설명을 덧붙여 가장 친절하게) 수면 밖으로 드러난 사건 밑에 얼마나 복잡하고 기묘한 우연과 필연들이 복권놀이처럼 섞여 있는지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보르헤스가 바라보는 세상은, 마치 시력을 잃은 후 그가 응시했던 세상처럼 온통 까맣다. . 그러나 보르헤스의 작품세계가 '우린 아무것도 알 수 없다.'에서 '그러니 아무것도 하지 말자.'로 이어지는 회의적 세계인 것은 아니다. 보르헤스는 크게 세 가지 방식으로 희망의 여지를 남긴다. 첫 번째, 가장 문학적이면서도 가장 불가능해 보이는 방식은 '비밀의 기적'에 제시된다. "하느님은 클레멘티눔 도서관이 소장한 사십만 권 중의 한 책에 있는 한 페이지의 글자들 중의 하나에 있어요. 나도 그것을 찾느라 눈이 멀어 버렸소. (중략) 갑자기 확신에 사로잡혀 그는 아주 작은 글자들 중의 하나를 만졌다. 그러자 세상의 모든 곳에 존재하는 목소리가 그에게 말했다. '네가 일할 수 있는 시간이 주어졌노라.' 여기서 흘라딕은 잠을 깼다." 바벨의 도서관에 있을 단 한 권의 책, 도달할 수 없을 듯한 진리, 복권놀이의 실체를 사십만 분의 일 확률로 꿈과 우연을 빌어 찾아낸 것이다. 짖궂은 보르헤스는 '아무것도 알 수 없으니, 우리가 아무것도 알 수 없을지도 확실히 알 수 없다.'라고 말하며 진리를 찾아내고 세계를 설명하며 나를 이해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상상의 영역에 남겨둔다. 두 번째 해결책은 '바빌로니아의 복권'을 역방향으로 전개한 것과 같은 단편인 '불사조 교파'에 드러난다. "내가 이미 지적한 대로 '비밀'은 대대로 물려 내려오고 있지만, 어머니가 그것을 자식들에게 가르쳐서는 안 되며, 심지어 사제들도 그래서는 안 된다고 금하는 것이 그들의 전통이다. (중략) 그들에게는 그것을 지칭할 만한 버젓한 단어가 없지만, 모든 단어가 그것을 지칭한다고,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불가피하게 그것을 암시한다고 이해한다." 아무것도 알 수 없다는 건 모든 걸 알 수 있다는 것과 같은 말이라는 희망이다. 그 어떤 것도 확증할 수 없을 때 역으로 인간에게는 마음껏 점과 점을 이어 선을 이을 자유가 주어진다. 미묘한 표정에서 상대의 감정을, 아침뉴스에서 주식시장의 향방을, 실험 결과에서 인류의 미래를 예측하고 분석하고 본인이 맞거나 틀리다고 판단할 선택의 자유가 주어지는 것이다. (이 대목은 '루시'의 마지막 장면을 떠올리게 한다. 어떤 실체가 모든 곳에 있다면 그 실체는 존재하지 않는다. 어떤 실체가 무한히 빠르다면 그 실체는 사라진다.) . 세 번째 희망은 문학을 통해 온다. '피에르 메나르, 돈키호테의 저자'는 물론 메타픽션이라는 어렵고 복잡한 개념과 엮어서 생각할 수도 있지만, 나에게는 그보다 주관적 재구성이라는 희망의 제시라고 다가왔다. 보르헤스는 읽는 행위는 다시 쓰는 행위와 같다는 지극히 원론적인 명제를 매력적인 이야기로 풀어나가면서, 무지의 광대한 바다에서 자기 자신이 이해할 수 있는 영역만을 끌어와 스스로 납득할 수 있도록 재구성하는 행위에 면죄부를 준다. 그는 절대적인 진리나 지식에 도달하려는 강렬한 욕망을 포기하고 삶과 타협한다. 각자 생각하는 세계는 다른 거지 뭐. 내가 바라보는 세상과 네가 바라보는 세상은 다를 수밖에 없는 거지 뭐. 내가 옳다고 강요하고 윽박지르지만 않는다면 그렇게 무한한 세상이 존재하는 것도 나쁘지 않지 뭐. 그리고 그는 자신에게 세상이 어떻게 다가오고 있는지 말하기 위해 이야기를 쓴다. '픽션들'에 실린 열일곱 편의 단편은 모두 그러한 타협의 결과물이다. 최대한 지역색이나 개성을 지우려고 노력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묻어나오는 작가의 취향(무협 장르나 추리 기법에 대한 애정, 아르헨티나의 색채, 책에 대한 무한한 존경)도 그래서 더욱 의미심장하다. 그는 문학을 통해 인간의 한계를 초월하면서 동시에 인간이라는 한계를 받아들이려고 한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보르헤스는 열일곱 개의 풍요로운 세계를 구축해 나의 세계에 선물했다. . +가장 재미있게 읽은 단편은 '유다에 관한 세 가지 이야기'. 아무리 노력해도 내 언어로 설명해낼 수 없는 작품이지만, 몇 번이고 곱씹어도 작가의 상상력에 놀라고 또 허탈해 웃고 다시 놀라게 되는 신기한 작품이다. 제일 재미없던 건 '알모타심으로의 접근'. +단편집을 다 읽고 나서 가장 먼저 떠올린 영화는 '메멘토'였는데, 이 역시 막연하게만 연관성이 떠오를 뿐 단어와 문장으로 정리가 되지 않는다. 보르헤스도 놀란도 그런 놈들이다. +송병선 선생님이 옮긴 버전이 훨씬 문장도 깔끔하고 문체도 읽는 맛이 난다. 다만 이런 작품이야말로 주석이 각주가 아닌 미주여야 하는 게 아닌가라는 생각이 든다. [자가격리 기념 서문학 걸작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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