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상훈남
4.0

싱글 인 서울
영화 ・ 2023
평균 2.8
2023년 11월 25일에 봄
보고 나면 따스한 미소 정도는 품고 나오게 되는 영화. 감독의 전작 <레드카펫>에서도 느낀 것이지만 이 감독은 영화에 선한 분위기라든가 마음을 몽글몽글하게 하는 장면을 연출하는 법을 잘 알고 있는 것 같다. 다른 점은, <레드 카펫>은 작품성에 있어서 결함이 많이 드러났었는데 이번 작품은 여러모로 신경썼다는 것이 티가 났다는 것이다. 그녀를 보기 위해 매주 수요일 북카페에서 기다리는 감성, 첫사랑의 기억, 관계로 인해 상처받은 인물이 점차 성장하는 과정, 그리고 연인으로 발전하기까지의 설렘 같은 좋은 감정들이 느껴지고 따뜻한 이미지가 기억에 남는 꽤 괜찮은 영화였던 것 같다. "왜들 그리 첫사랑을 궁금해하는 거야. 대부분은 누군가한테 첫사랑이 아니었을 텐데." 영호는 자신이 하루키 소설을 읽다 그녀를 처음 만났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녀가 흘렸던 아이스크림은 하루키 책에 묻어있던 게 아니었다. 바로 그녀가 기억하는 모든 것이 담겨있는 에세이가 진실이었던 것이다. 그는 자신만이 상처받은 줄 알았다. 자신만이 관계에 있어 어려움을 느끼고 그러다 보니 자기 자신만을 생각했던 것이다. 뭐가 중요한지도 모르면서. 자신이 무엇을 하고 싶은지, 무엇이 부끄러운지, 누구와 함께 있는지. 잠시나마 잊고 있던 것들을 하나둘씩 찾아가며 점차 밝아지는 그의 표정을 보고 있으니 나도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다. "여자는 직진이지." "얘는 자꾸 뒤로 직진을 하네." 하고 싶어도, 마냥 '할 수 있을 것 같다'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 때가 있다. 우리는 하고 싶은 일이 생기면 그 일을 이루기 위해 만반의 준비를 하고 최선을 다해 노력한다. 그 모든 것이 완성이 되면 그제서야 '할 수 있다'는 확신에 가까운 느낌이 든다. 단언컨대, 그 감정을 느낄 수 있다는 건 축복이다. 진심으로 작가가 되고 싶었던 영호가, 그 동안 관계로부터의 상처를 견뎌내며 목표만을 간절히 염원하고 얼마나 많은 준비를 했을지 와닿아서 그의 감정선이 굉장히 울컥했다. "왜 작가가 되고 싶은 건데?" "전부터 하고 싶었고, 이젠 할 수 있을 거 같아서." 영호는 이제 자신에게 있었던 일이 아닌 소설을 쓰려 한다. 소설은 진실된 것이 아니다. 새로 무언가를 계속 만들어 가야 한다는 점에서 논술 에세이보다는 훨씬 어려웠기에. 그는 도전을 하려 나선다. 그리고 그 옆에는 그의 소설을 응원해주는 현진이 있었다. 그녀가 책을 사랑하는 만큼, 달콤한 입맞춤을 시작으로 함께 한 잔 하는 맥주에 취해 영호까지 사랑하게 될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니까. "20대는 화장을 안 해도 이쁜 나이다. 하지만 화장을 한다. 왜냐하면 자신을 잘 모르기 때문이다." 영호는 언젠가부터 혼자가 제일 편하다고 믿어왔지만, 그가 쓰고 싶었던 책이라는 건 결코 혼자서 낼 수 없는 것이었다. 관계로부터 도피한 곳에 낙원이란 없었다. 결국 그 관계 속에서 잘 스며들어야 혼자일 때도 더 영양가 있는 혼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이고, 더 행복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 메세지를 이렇게 유연하게 풀어낸 것이 참 마음에 들었다. "관계 속에서 행복할 수 있는 진정한 혼자가 되길 바란다." 누군가를 변하게 만드는 건, 자신의 진심이다. 책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마음이, 진실된 글이 영호를 변화시켰다. 특정한 악역 없이, 사연 있는 인물들로 구성하여 모두와 함께 좋은 기억을 지닌 채로 영화가 끝이 났다. 난, 아무리 봐도 이런 영화를 좋아하는 것만 같다. "혼자 사는데 식기세척기가 필요할까?" "필요하면 사." [이 영화의 명장면] 1. 키스 이렇게 가버리는 줄 알았던 아쉬움이 결국 더 큰 설렘이 되어 돌아온다. 함께 와인을 조금 마신다는 것은 술에 취한다기 보다는 술에 취할지도 모르는 서로의 눈빛에 취한다는 말과도 같았다. 꼭꼭 숨겨 쉽게 내놓지 않는 영호의 마음 앞에 적극적으로 다가가며 그 경계선을 풀어 헤치려는 현진의 태도가 인상적. 그는 그녀가 취한 건 아닌지 걱정하지만, 현진의 눈빛엔 올곧음이 묻어있었다. 둘은 술에 취한 건지, 밤에 취한 건지 입을 맞추게 된다. 이 장면이 어찌나 설레던지. 이후 '글몸살'이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단어가 참 이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랑 딱 맞는 사람은 나밖에 없어." "그걸 맞춰보지도 않고 어떻게 알아." 2. 홍작가 자신의 아픔이 누군가에겐 글거리밖에 되지 않는다는 분노와, 좋아했던 대상이 자신을 배신했다는 생각. 자신 앞에서 모른 체하고 있다는 오해. 모든 것이 뒤섞여 혹시 둘의 관계가 엇나가기라도 할까 봐 덜컥 겁이 났던 장면. 현진은 그럼에도 이 책을 완성시키길 바랐고 영호는 그렇지 않았다. 뼈아픈 과거의 잔상들이 다시 살아나는 것만 같아서. 하지만 그것은 착각에 불과했다. 고작 그런 것들로 아파하며 책으로부터 도망치기엔, 영호는 진심으로 작가가 되고 싶어했다. 글을 쓰게끔 도와준 사람들에게 고마워했다. 이번만큼은 둘 사이에 '썸을 타는 남녀'가 아닌, 서로가 서로의 목표에 닿을 수 있게 도와주는 '공생관계'의 기류가 흘렀다. "내 마음이 어떤지 알아?" "그럼 내 마음은?" 있지도 않은 일을 써야 하는 소설은 어렵다 한 번도 써본 적 없으니 더욱 그렇다 관계도 마찬가지다 혼자로서 좋으려면 옆에 있는 사람과 더 좋은 관계가 되어야 했다 어려워도 결국 써야 하는 소설처럼 "어렵지, 어려워도 어쩌겠어. 써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