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멘트
정성일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그가 얼마나 ‘영화’라는 매체를 소중하게 여겼는지를 이미 인식했을 것이다. 동시에, 적극적으로 자신의 애정을 비평적이며 영화적인 언어로써 다뤄내고 싶어한 사람이었다. 특히 시간이 지나면서 그 애정이 두터워진 대상은 ‘임권택’이었다. 단순히 장문의 비평문을 기고하는 것을 넘어, 임권택을 다룬 두 권의 인터뷰집을 발간하고, 한국영상자료원 KMDb에는 ‘임권택✖️101’라는 이름으로 임권택이 연출한 (<화장> 이전의) 101편의 영화를 각 편마다 모두 조망하는 기획을 진행하기도 했다. 이번에 동시 발표한 <녹차의 중력>과 <백두번째 구름>은 정성일의 임권택에 대한 시선을 승화하는 과정이자, 그가 계속 하고자 했던 ‘영화’로써 임권택을 사고한 결과물이다. 마치 정성일이 왕빙에 대해 남겼던 <천당의 밤과 안개>처럼 말이다. <녹차의 중력>과 <백두번째 구름>은 숨겨진 부제이자 기획인 ‘세계소년소녀 교양문학전집 - 임권택’의 아래 제작된 쌍을 이루는 다큐멘터리지만, 이는 단순히 전반과 후반으로 분리되는 것은 아니다. 두 작품을 모두 내적인 완결성을 지니는 한편, 두 편을 같이 보는 순간 하나의 논리적인 정합성을 지니도록 설계가 되어있다. <녹차의 중력>은 ‘원인’이고, <백두번째 구름>은 ‘결과’이다. 동시에 전자는 ‘임권택이 놓인 파편화된 배경’이고, 후자는 ‘임권택이 거친 연속적인 순간’들이다. 한편으로는 제목처럼 하나의 점으로 향하는 ‘중력’처럼 집중되다가도, 마치 중력을 거스르는 듯 (아니, 중력에 부딛치면서도 다시 흘러가는) ‘구름’처럼 쉽게 예측할 수 없는 흐름으로 도출된다. 그저 임권택에게 다시 의견을 묻는 것은, 그간의 비평과 인터뷰를 반복해서 영상으로 옮기는 것에 불과하다는듯 영화는 종래 국내외에서 발표된 감독을 회고하는 성격의 작품과는 다른 양태로써 작품을 기획한다. <녹차의 중력>에서 먼저 드러나는 것은 그의 과거와 102번째 작품 <화장>을 준비하기 전까지의 (임권택의, 부분적으로는 정성일의) 일상과 시선이다. 영화가 시작하는 순간, 임권택은 조금은 떨리는 손으로 녹차를 달이고 이를 다기에 따라내는 과정을 반복한다. 아무런 설명도 없이 제시되는 시퀀스에서, 임권택은 큰 차이가 없어 보이는 찻물 달이기에 섬세하게 반응하며 행동한다. 이윽고 시퀀스를 설명하는 자막이 화면에 비추고 나서야 관객은 이 장면이 왜 벌어지는 지를 인식한다. 이 장면은 특별할 것 없어 보이는 하나의 일상이자 환대이지만, 이는 정성일이 어떻게 이 작품을 이끌어 나가고 임권택을 바라볼 것인지에 대한 선언적인 장면이다. 임권택은 처음부터 의도적으로 비평가를 위해서 영화를 만든 것이 아니라, 삶의 질곡 속에서 탄생한 산물이었다. (<백두번째 구름>에서 유일하게 등장하는 임권택이 카메라를 바라보며 하는 인터뷰 인서트를 통해 정성일은 이 지점을 강조한다.) 녹차물이 중력에 의해 잔에 닿지만, 어떤 과정을 거쳤느냐와 물리값에 따라 작아보이지만 전혀 다른 결과가 나오듯- 정성일은 <녹차의 중력>을 통해 사소하지만 그의 삶을 구성하는 요소들을 다양한 원근법으로 분석함으로써 그가 만들어낸 영화를 바라보고자 한다. 그 분석의 과정은 분석 대상의 주관이 개입되기 쉬운 직접적인 인터뷰를 담는 것이 아니다. 한편으로는 재현하고, 다른 한 축으로는 그간 숨겨진 시선에, 그리고 남은 하나의 축은 작품이 탄생하기 이전에 사회가 거쳤던 어떤 경로들이다. 그가 거쳤던 과거는 그와 가까이 지냈던 가족이라는 ‘제 3자’를 거쳐 전달되며, 그가 살아온 일상은 반복적이다. 과거와 일상을 신화하는 대신, 당대 어떤 특정한 시공간에 있던 이들이라면 모두가 거쳤을 ‘보편적’인 특성을 보이지만, 다시 한편으로는 보편적인 여정이 어떠한 구조를 거쳐 끊임없이 이어지는지를 고민한다. <녹차의 중력>은 보편성을 포착하는 한편, 임권택 만이 지니고 있는 고유한 요소를 사색하는 것이다. 동시에 시대가 지나며 조금씩 변했던 작품의 경로처럼, <화장>을 연출할 무렵 ‘시대’라는 외부적인 요소가 어떻게 개입되었을지도 파고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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