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CINE 102
5.0

시리어스 맨
영화 ・ 2009
평균 3.7
이유(의미)-있음에 대한 진지한 믿음은 오직 우연으로만 증명될 뿐. 1. 영화에 대한 인상 처음 보는 종류의 영화였다. 오프닝부터 괴상한 이 영화에 집중하지 않을 수 없었고, 감독은 아이스 아메리카노 정도의 쓴맛을 기대한 내게 에스프레소를 들이민다. <시리어스 맨>은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한다는 당위의 교훈극이 아니다. 되려 사실주의 풍경화에 가깝다. 다만 풍경화 속에 작게 그려진 허우적대는 인간을 돋보기로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그것은 멀리서 보면 조화롭거나 희극으로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돋보기로 본 인간의 모습은 비참하다. 2. 삶의 불확정성 물리학이 만물의 근원법칙을 탐구하는 학문임을 주목한다면 래리는 자신을 둘러싼 세계를 철저히 인과의 법칙을 통해서 이해하려 하는 사람이다. 그는 어떤 결과가 있다면 그것에는 마땅한 원인이 있다고 굳게 믿는 사람이다. 물론 일반적인 물리학자는 인과법칙을 삶의 영역까지 확장하진 않는다. 하지만 래리는 스스로를 신의 선택을 받은 민족이라 믿는 유대교인으로서 삶에 대한 진지한 질문을 던지고 있음을 다음의 대사를 통해 알 수 있다. “행동에는 항상 결과가 따라요. 물리학만 그런 게 아니라 도덕 문제도 그래요.”. 그는 불쑥 튀어나와 자신을 괴롭히는 사건들의 근원적인 원인과 그것들의 의미를 알 수 없다. 그는 과학, 신, 랍비에게 묻지만 대답을 들을 수 없다. 의미를 갈구하는 그의 질문은 허공을 부유한다. 왜일까? 한국인 학생과의 대화를 떠올려보자. 그는 물리학 그리고 고양이의 이야기(사례)를 이해했다고 주장하는 학생에게 그것은 수학에 의한 이해가 아니니 이해한 것이 아니라고 말했다. 이는 철저하게 과학적인 사고방식(법칙, 증명)이다. 그런데 정작 그가 칠판 전체를 채워 설명하는 불확정성의 원리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실제로 알 수 없음을 증명”할 뿐이다. 이렇듯, 만일 과학이 그의 진지한 질문에 대답한다면 그것은 너무나도 복잡하고 지저분해서 오히려 우리 삶에 대해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한 것과 다름없다. 그렇다면 종교는 무어라 말하는가? 다음은 랍비의 대답들이다. “치아의 의미는 아무도 몰라요. 신(하솀)의 표식인지도 모르죠. 그래도 다른 사람을 돕는 건 나쁠 게 없죠.”. “물론, 우리 모두 답을 원해요. 하지만 하솀이 답을 줄 의무는 없어요.”. 과학과는 반대로 그의 대답은 너무도 간결하고 흠이 없어 보이지만 그것은 사실 실체가 없어서 잡히지 않는다.(비록 보이지 않는다고 없는 것이 아니라고 랍비가 주장하지만 말이다.) 그러니 인간은 알 수 없다는 똑같은 결론에 도달할 뿐이다. 그렇게 “신은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다”는 믿음은 한껏 조롱받는다. 3. 결말과 우화의 의미 혹시 영화를 다 본 뒤, ‘뭐야, 결말이 왜 이래’라고 생각하고 있지 않은가? 아니면 오프닝의 우화와 래리의 비극적인 이야기를 연관시키고 있진 않은가? 그것은 아마도 당신이 인과응보의 세계를 믿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혹은 적어도 영화의 세계만큼은 그래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크게 잘못하지도 않은 사람이었으니 모든 것이 잘 해결될 거라고 기대한다거나 그때 아내가 칼로 찌른 것이 악령이 아니라 하솀이어서 이 모든 사단이 일어난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그러나 영화를 여러번 살펴보아도 우리는 알 수 없다. 이 지독한 형제 감독은 끝까지 주사위를 던질 뿐이다. 이들의 전작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에서 안톤 쉬거가 따랐던 단일한 법칙이 ’우연(동전 던지기)‘이었던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4. 그 외 단상들 -영화의 결말에 “성조기 때문에 깃대가 부러지겠네”라는 대사는 의미심장하다. 깃발을 내리지 않으면 깃대가 부러진다. 그런데 깃발을 내리면 깃대는 그 쓸모를 잃는다. 토네이도 같은 재앙 앞에서 우리는 삶의 의미를 계속 찾아야 하는가 아니면 의미 탐색을 중지하고 생에의 의지에 집중할 것인가. -이 말도 안 되는 이웃들은 주인공을 둘러싼 세계이자 그가 묶여있는 일상을 나타낸다. 배신, 인종주의, 협박, 청탁, 절도, 영토, 간통, 이교도 등. 이웃들의 설정은 형제 감독의 경험에 기반한 것이라고 한다. 많은 이웃 중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비유대인 가족이다. 유대인인 래리는 그를 반유대주의자로 짐작하며 두려워한다. 그러나 동시에 화목한 가정(함께 사냥)을 이룬 모습을 부러워하는 것으로 보인다. -대니와 페이글은 끊임없이 어긋난다. 대니가 페이글을 불러도 돌아보지 않는다거나, mp3가 뺏겨 돈을 줄 수 없다거나 또 대니가 재빠른 탓에 결국 잡히지 않는다. 그리고 마침내 돈을 손에 쥐고 그를 불렀을 때 관객이 마주하는 페이글의 표정과 덩치는 몰려오는 저 토네이도처럼 거대하고 위협적이다. 이는 불길한 전화를 받는 래리의 모습과 겹쳐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