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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에게 빈민들을 보살펴 달라는 랩을 동시에 읊으면서 웃는 그녀들 뒤로 들리는 총성. 천진한 웃음이 순식간에 공포로 바뀌며 그것을 채 찍지 못하고 도망치는 카메라. 섹스와 가난, 내전과 생존을 연민, 서사 등의 그 어떤 향신료도 첨가하지 않고 매끄럽게 다듬지도 않은 채 카메라는 피사체의 발화에서 컷을 엮어낸다. 남편은 감옥에 갔지만 어린 자식들은 머리를 잡아당기며 보채고, 남자는 가치없는 달러를 스킨즈처럼 말아 약을 흡입하며 내전으로 어지러운 이곳을 떠나 새로 집을 짓기 위해서 매니큐어를 수백 번 칠해야 하는 여인, 그들의 삶이란. 상실의 위협에 너무도 익숙한 나머지 그들은 도통 절규하지 않지만 열 살 무렵 자신을 상습적으로 강간하는 새아버지의 목에 칼을 찔러 넣었다는 고백을 하는 여성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바라보는 다른 여인의 눈빛과 표정에서 우리는 가끔은 섣부른 위로보다 단지 응시와 경청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검은 비닐봉지를 길가의 전봇대에 매다는 그들만의 애도 방식도 역시 마찬가지. 슬픔을 문신처럼 새긴 그들은 쉽게 오열하지 않는다. 사라지지 않는 죽음의 내음 속에서도 음담패설을 하며 크게 웃는 그녀들의 모습은 결국 더 나은 삶을 위해 바로네사에 직접 집을 짓는 안드레이아의 공간이 영화의 제목인 이유와 일맥상통한다. 죽음이라는 슬픔에도 통곡하지 않지만 물장구 하나에 크게 웃는 그들의 삶에 감히 어떤 감상을 적을 수 있을까. 엎드려 있는 작은 갓난아이의 모습으로 영화가 끝나며 비트가 강한 블랙뮤직이 긴 침묵을 찢을 때 할 수 있는 건 경외의 소리를 지를까 급히 입을 틀어막는 것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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