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멘트
이혜원

이혜원

3 years ago

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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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병의 나라에서 왔습니다

책 ・ 2021

평균 3.6

1 초진을 하러 가면 간단한 질문지를 주고 의사가 있는 방에 들어가 상담을 할 것입니다. 이때 의사와의 첫 면담에서 문제가 생기는 경우가 있습니다. 의사가 당신이 호소하는 이야기를 무시하는 투로 듣거나, 고압적인 태도로 조언하거나, 이 병과 당신의 앞으로의 치료 계획에 대해 전혀 이야기하지 않는 것입니다. 당신은 설명을 들을 권리가 있고, 명백히 의사에게 불편함을 느낀다면 그 병원은 맞지 않는 곳이니 처방전만 받고 나오세요. 좋은 병원에서는 당신이 하는 말을 잘 들어주고, 적절한 질문을 해주고, 꼭 필요한 설명을 해줍니다. 약에 대해서도 이러저러한 부작용이 있을 수 있지만 꾸준히 복용해야 한다고 약물 복용 지도를 해줍니다. 2 부작용은 약물 치료를 위해 용기를 낸 환자들을 쉽게 좌절시키고, 정신과에 재방문하는 것을 무의미하게 여기게 만들기도 합니다. 이 시기를 잘 넘겨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약물을 처방 받을 때, 해당 약물이 작용하기 시작할 때까지 얼마나 기다려야 하는지 의사에게 물어보는 것이 좋은 방법입니다. 기약 없이 효과를 기다리는 것과 한계를 정하고 참는 건 다른 일이기 때문입니다. 또 약효를 통해 어떤 유익을 얻을 수 있는지도 함께 들어 약물 치료를 통한 변화, 희망적 자세 등을 가지는 것도 좋습니다. 마지막으로 의사가 고지했던 기간보다 미적지근한 날들이 길어지면, 내원하여 증상이 변함이 없다고 빠르게 피드백하는 것도 약물 치료에 유리합니다.(...) 약 복용의 주된 목표는 그 사람을 다시 총명하고 똑똑한 사람으로 돌려놓는 것이 아닙니다. 그보다는 삽화 발생을 줄이고자 하는 예방적 차원의 접근이 큽니다. 3 병식을 '자신의 병을 자기가 알고 있는 것'이라고 짧게 설명할 수 있지만, 실상은 좀 더 복잡하다. 정신질환은 파악하고 분석할 수 있는 행위와 거리가 멀다. 파악와 분석은 특정 좌표를 기반으로 전후좌우 살펴 이루어지는데, 정신병의 상태에서는 자신이 딛고 있는 곳 자체가 마법의 양탄자처럼 이리저리 날아다녀 버린다. 우리는 시간이 한참 지나서야 과거의 상태를 깨닫거나, 현재 가진 가능성을 평가절하하거나, 미래의 일을 지나치게 과장하거나, 혹은 아예 미래에 무심하거나 하는 다양한 반응을 보인다. 어떤 병들의 경우 사람을 그대로 두고 시간이 먼저 가버리거나, 시간을 저만치 두고 사람이 뛰어가는 등 난리도 아니다. 병식을 갖는다는 것은 자신의 시간을 갖는다는 것이다. 중증의 정신병자들이 흔하게 호소하는 증상이 시간의 결여, 정지 또는 과잉이다. 4 '병식 없는'환자 A와, '병식이 있는' 환자B는 똑같이 조증이 와도 그 사고와 행동이 다를 것이다. 예를 들면 A에게도 자신의 상태에 대한 통찰이 있기 때문에 조증 상태가 점점 심해질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A는 여러 가지 딴 생각을 하기 시작한다. '다음 주 병원에 가서 의사에게 조증을 밝혀야 하나?2주 후에 친구들과 모임이 있는데 그때까지 가만 있다가 '재미 좀 본' 다음에 하이텐션으로 놀고 나서 그때 의사에게 말해도 되지 않을까?'하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조증은 규칙적인 속도로 역을 향해 들어오는 기차가 아니라 살얼음에 미끄러져 마구 회전하며 주위의 모든 것을 들이받는 자동차에 가깝다는 것이다. 예측불가한 그 진행 속도에 그대로 올라타버려 그는 친구들과의 모임 전에 이미 사고를 치거나 자신과 타인들에게 불쾌한 일을 벌일 가능성이 높다. 병식을 가진 B의 경우, 조증을 눈치채면 단번에 불려간다. 이름하여 조증 법정으로, "조증 인정하십니까?","최근 며칠간 50만 원 쓰셨죠? 당장 병원 갑시다.","자이프렉사(항조증제) 먹고 10킬로그램 찌겠네요. 그래도 가셔야 합니다."라고 말하는 검사와, "아니 아무 문제도 없으시잖습니까? 좋아보이시는데?","과장된 걱정을 하시는군요. 기분이 좀 나아지셨을 뿐입니다."하며 정중하고 뻔뻔하게 부인하는 변호사 사이에 끼어 우왕좌왕 할 것이지만, 그래도 그는 판결을 내린다. 그는 여러 수를 생각하지만 결국 머릿속 법정을 폐회하며 과거의 판례, 사고의 전적을 쭉 한번 읊고 '병원에 가라.'는 판결에 따라 버스에 몸을 싣는다. 당신이 병적 상태에서 아무리 계산하고 생각하고 예측해서 발걸음을 디뎌도 그 길은 당신이 원했던 방향으로 당신을 안내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미 병이 침입한 상태로 병을 다루려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이것도 곧 지나가리라."라는 말처럼, "지금 병원에 가라."라는 말 또한 우리에게 언제든 실천할 수 있는 잠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5 나는 일원으로 받아들여지고 싶었고, 그러려면 가까워져야 하고 대화하며 나를 드러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나의 핵심을 상대에게 전달해야 하니까. 그래서 그때 우리는 그렇게 절박했다. 주위의 퀴어 정신질환자 친구들은 그렇게 비슷한 마음으로 비슷한 과정을 거쳐 집을 나가거나 의절당하는 등 험난한 길을 겪었다. 이런 맥락에서 나는 '병밍아웃'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이 용어는 명백히 퀴어의 단어를 차용한 것이다. 그리고 정신병을 밝히는 일 역시 1) 반복해야 하고 2)말을 꺼낼 상대에 대한 사전 조사가 필요하며 3)밝힐 상대 그리고 자신에게 감정적 동요가 발생하여 갈등이 발생할 가능성이 높다. 처음 이러한 맥락을 밝히기 전 '병밍아웃'이라는 용어를 사용했을 때, 그 용어가 '커밍아웃'이라는 단어의 본래 의미를 희석한다는 비판이 있었다. 정신질환자들은 언어를 빌려서 사용한다. 증상이든 기분이든 병증이든, 설명하려는 모든 단어가 아무리 말하고 말해도 항상 적확하지 못한 기분이다. 우리 문화 내부의 언어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에 관해 '퀴어의 소수자성을 지운다.'라고 비판한다면 반론이 있을 수밖에 없다. (...)피차 언어 없는 소수자들끼리, 기저도 서로 공유하고 있는 이들끼리 누가 누구의 언어를 갖다 쓰고 말고 한다고 하나가 다른 하나를 '지울'만큼 권력이 강대하다고 할 수 있을까? 6 특히 충격요법이라고 흔히 말하는 '심한 말'을 퍼붓는 경우도 있는데, 자극이 되기는 커녕 평생 마음의 상처로 남았다는 우울증 환자들의 고백이 수두룩하기 때문에 절대 해서는 안 되는 일입니다. 지지적인 표현과 담담한 반응을 유지하는 것이 가장 낫겠습니다. 우울증 환자의 가장 탁월한 능력 중 하나는 빈말로 위로하려는 상대의 의도를 읽어내는 능력이기 때문에, 가만히 곁이 있어주는 것이 더 나을 수도 있습니다. 하다못해 밥 한 끼, 음료 한 잔 사는 것이 백 마디 말보다 마음에 위로가 될 수도 있습니다. (...) 질문. 우울증으로 인해 체중 증가와 체력 저하를 호소하는 이들이 많은데 어떤 식으로 해결할 수 있을까요?자신의 모습이 매우 추하다고 생각하는 경우, 주변 사람들은 뭐라고 말해줘야 할까요? 주변 사람들은 한 가지만 기억하시면 됩니다. 요즘 살이 쪘다는 둥, 우울증 환자가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을 입 밖에 내지 않는 것. 하지만 이 작은 사실을 말하지 않기란 쉽지 않은 모양입니다.(웃음) 우울증 환자들이 경험하는 것 중 하나가 자신을 평가절하하는 스스로의 시선입니다. 외보 변화가 없더라도 종종 자신을 스스로 추하다고 여깁니다. 외출을 나갈 수 있을 정도로 호전되었다 해도 외출 시도가 두 번 중 한 번은 좌절됩니다. (...) 우울증 환자를 움직이게 하고 싶다면, 당신도 움직여야 합니다. 사람이 많지 않은 조용한 산책길을 골라 함께 걷는 것은 언제나 환영입니다. 걷는 것 이상으로 움직이게 하고 싶고, 식단도 조절시키고 싶다면 채소를 사서 방문하세요. 스틱 형태로 잘라 절반은 같이 먹고 절반은 냉장고에 두면 그가 먹습니다.더 움직이게 하고 싶다면 돈을 들이세요. 그가 하고자 하는 장면을 실현할 수 있게 학원이든 운동이든 등록비를 주세요. 그리고 이 기술은 우울증자 자신에게도 해당되는 말입니다.스스로에게 먹이를 주세요. 물을 주고요. 한 주에 한 가지의 채소를 사서 먹이십시오. 7 이제 그는 카드가 전부 정지되었고 금융채무가 여러 전산망에 등록되었다. 그는 후불교통카드를 쓸 수 없다. 가난이 그를 궁지에 몰았고 궁지에 몰려 그는 가난에 익숙해졌다. 불행, 가난, 빚, 모두 너무나 낯익어 오늘도 그는 아무것도 느끼지 않는다. +가난한 정신병자에게 도움이 될 수도 있는 몇 가지+ ---미납이든 체납이든 당장 돈이 없고 빚 독촉이 들어오면 우리 병자들은 바로 패닉에 빠지기 쉽다. 그러나 채무자에게도 권리가 있다. 불법 채권추심 대응 요령을 익히자. 방법은 분명히 있다. 금융감독원, 서민금융진흥원 웹사이트에서 제공하는 교육 내용을 읽어보자. 채권추심 가이드라인 등의 자료를 통해 현재 나의 채무 상황이 어떤지 파악한다. 우편물에 등장하는 무시무시한 추심 용어들을 대략 익히면 '내일 압류당하면 어떡하지?',"당장 통장이 정지되면 어떡하지?' 같은 공포가 덜하다. ---금융취약계층에 해당되는지 알아보자. 지원 정책, 교육 콘텐츠, 심지어 금융상품도 존재한다. (...) ---ㅇㅇ대부, 길가에 뿌려진 대출 광고지에 쓰인 번호, 아무 심사도 없이 당일 빌려준다는 말, 휴대폰만으로 돈을 벌 수 있다는 광고, 특히 '내구제' 같은 용어를 사용하는 곳은 접근하지도 말자. ---당신이 근로소득자로 분류되지 않는다면 많은 불이익이 있다. 고용주가 근로계약서 작성을 거부하는 경우 그런 사람이 운영하는 사업장의 분위기도 대략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복지로' 사이트에서 맞춤 정책을 찾아보자. ---주민센터를 이용해보자. '긴급생계지원'기준에 해당하는지, 차상위 주거 지원을 받을 수 있는지, 당신의 현재 소득이나 자산, 건강 상태에 적합한 복지 정책을 설명하고 신청 과정을 도울 것이다. 8 병자에게 매일매일 청소란 몹시도 어려운 일이다. 엉망이 된 방의 꼴을 보면 전부 폭파하고 싶겠지만 당장 눈 앞에 보이는, 손 앞에 잡히는 휴지 세 개 버리기, 옷가지 하나 개기부터 시작해보자. 주위 환경이란 아주 중요한 요소이기 때문에 형편없고 작은 공간이라도 그 공간을 통제하여 깨끗하게 유지 관리하는 성취를 누리기 시작하면 그것이 실익으로 돌아온다. 그러나 무력감에 빠진 이라면 여기에서부터 시작하자. 그리고 자신의 쓰레기집 때문에 정말로 견딜 수 없고 손 쓸 도리가 없다면, 도움을 구하자. 청소 업체를 부르는 것이다. 청소 업체의 비용은 보통 3시간에 3-5만 원 내외인데, 주위에 돈을 융통하거나 돈을 모아 이를 신청하는 것이다. 대면하지 않고도 서비스를 받을 수 있기에 자신의 환경에 대한 깊은 절망에 빠진 이들에게 추천한다. 9 술이나 담배, 커피, 게임, 스마트폰 등에 중독된 사람들은 자신이 가난하다면 다른 것들을 제한하지 중독 행위를 중지하지는 않는다. 중독 행위에 드는 비용을 '기본 요금'처럼 당연하게 취급하지만, 모두 합쳐 계산해보면 생각보다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 그래도 이들은 중독 행위가 그만한 값을 한다고 여긴다. 고도로 지속되는 스트레스의 압박에서 '한숨 돌리게' 해주는 것이 중독 행위이니 이들에게는 늘 최우선 순위에 있다. 식사나 병원비는 그다음, 아니면 안중에도 없다. 내가 아는 어떤 사람은 돈이 떨어져 이틀을 굶을 때는 방에만 있더니 마침내 담배가 떨어지자 성을 내며 즉시 털고 나가 바깥 골몰을 돌아다니며 기다란 꽁초를 주워 좋다고 피워댔다. 10 가난한 병자들은 단조로운 정동을 보인다. 대체로 누워 있으며, 누운 채 동영상을 보거나 인터넷 서핑을 한다. 물을 마시고 눕고, 밥을 먹고 눕고, 화장실에 다녀와 눕는다. 특징적인 무망감이 그를 배회한다. 그는 하고 싶은 것이 없고, 미래에 대해 생각하고 싶지 않으며, 지금에 대해서도, 아니 전부 다 생각하기 싫다. 그에게 있던 정신질환이 점점 더 심해질 것이다. 가난은 당신이 돈이 없기 때문에 먹지 말아야 한다고, 돈이 없기 때문에 돈이 나가는 모든 곳에 가지 말아야 한다고 조른다. 특히 돈이 없으니 '이 돈으로 병원에 가는 것보다 다른 데에 쓰는 게 낫다.'라고 판단하는 것은 비교적 흔한 패턴으로, 마침 정신과 치료에서 드라마틱한 효과를 느끼지 못하고 있다면 더더욱 단약 드으이 치료 중단으로 이어진다. 하지만 복약은 우리의 정신을 잡아주는 보루이고 이 선이 무너지면 다시 쌓아 올리기까지 많은 시간이 든다. '가난'이 오랜 이슈인 정신질환자들은 생활습관이나 사고방식, 나아가 삶 전반에 병이 구석구석 뿌리를 내리는 것을 느낀다. 가난상태에서 필연적으로 가능한 선택지는 매우 협소하고, 쿠션 역할을 할 안전장치는 미비하기 그지없다. 11 고립 상황에서는 더더욱 자신을 돌보지 않고, 병으로 인해 망가진 생활습관은 고착되며, 심하게는 방 밖에 나가지도 못하는 상황에 빠져들기 쉽다. 의식주 생활이 완전히 망가진 상태에서는 주변의 작은 도움이란 말라 죽어가는 화분에 분무기로 불을 뿌려주는 것에 불과하다. 그에게는 좀 더 확실한 처방이 필요하다. 이 상태를 단번에 타개해주는 것은 밥을 사주는 일, 약물 치료를 재개하도록 병원에 데려가는 일 등보다는 입원일 수 있다. (...) 금전 문제가 충돌할 때에는 포기하지 말고 입원비 문제와 얼마나 입원할지 여부를 정신과 의사와 상의해보기를 권한다. 입원을 알아보던 친구가 의사와 상의했더니 한 달 입원을 조건으로 상당히 파격적인 금액을 말해줘 입원을 고려해볼 수 있게 되었다고 말한 적이 있다. 입원을 고려할 수 있게 되면 새로운 선택지가 생기는 셈으로, 극단적인 선택지만 존재하던 상황의 병자에게 새로운 기회로 작용해 상당한 심적 여유를 선사한다. (...) 금전 감각은 마치 정신질환자가 병식을 가지듯이 자본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가 가져야 하는 마땅한 감각이다. 지금의 당신에게 필요한 환경을 갖추고 있는지, 어떤 것이 부족하고 어떤 것은 돈으로 해결할 수 있고 어떤 것은 사람을 필요로 하며 어떤 것은 영영 내 손으론 해결할 수 없는 것인지 알아야 한다. (...) 만약 당신이 타인과 살 수 있다면, 당신이 가용할 수 있는 금액의 폭이 좀 더 넓어질 것이다. 또 앞서 말했지만 환경이 너무 오염되어 있고 구성원 모두 그것을 처리할 능력이 없다면 청소 업체에 맡기는 것이 가장 빠르고 정확한 해답이다. 두세 명의 하우스메이트들이 모여 여덟 시간 동안 치운다고 사이가 돈독해질까? 아마 싸움이 나 두 명이 밖으로 나가버리고 말 것이다. 이런 상황(보통 침대를 제외한 모든 공간이 더러움, 침대에서 식사함)에서 정신병자에게 시급히 필요한 건 다 함께 과오를 반성하는 것이 아니다. 세 명이 서로 사이가 틀어지지 않고 속히 깨끗한 환경으로 만들어 다시 그 환경에 적응하는 것이다. 12 이전에 다니던 병원 10대로 보이는 두 명이 진료비를 계산하면서 직원과 "기록이 남지 않게 해주세요." "그러면 비용이 많이 올라가는데 괜찮으세요?"라는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의료 기록은 절대 아무나 열람할 수 없고, 그 '아무나'에는 대학과 히사도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다시 한번 강조하고 싶다. 물론 병가나 병결휴학을 신청하거나 경위서 등을 작성해야 할 때에는 의료사실을 증명하기 위한 목적이므로 병원명과 내원 여부가 적힌 서류를 떼어 제출해야 한다. 정신질환에 대해 밝히면 곤란해지는 경우에는 의사와 상의해보자. 13 가난은 실제로 빚이 몇백, 몇천이 있든 그 액수보다는 생활을 장악하는 형태로, 우연히, 그리고 치밀하게 다가오는 감각이다. 눈치는 채면 피하기는커녕 점점 더 빨리 다가오는 영화의 장면처럼 존재한다. 우리는 가난, 그리고 가난과 동반하는 것들을 피하기 위한 행동들을 함께 해나가야 한다. 안정된 거처, 정돈된 환경, 지속적인 약물 치료, 이 셋은 서로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 혼자서 동시에 전부 이루고자 하면 너무 힘이 들 수 있다. 하지만 셋을 공고히 구축할수록 주도면밀한 가난의 늪, 정신병을 악화시키는 모래사막에서 견딜 수 있다. 14 탈학교 청소년들은 스스로 소속을 만들어야 하는 어려움이 있다. 정신질환이 가세한다면 불안정성이 두 배로 오는 셈이므로 반드시 여러 형태의 목표, 생활습관, 패턴, 행동 범위 등을 익숙한 것, 익숙해져야 하는 것, 새로운 시도, 도전 등으로 분류해서 주위에 두어야 한다. 그런 자잘한 것들이 모여 당신이 병과 손잡고 미끄러질 때 우둘투둘한 명이 되어 마찰력을 발휘한다. 정신질환이 있는 사람이 학교나 직장에서 듣게 되는 말들을 비슷하다. 그들이 받는 대우의 순서도 유사하다. 먼저 능력을 발휘하고 인재로서 인정받았다가, 출근이나 출석 같은 면에서 훅 떨어져 지각과 결근을 반복하며 '기복이 심하다'든지 '성실함이 부족하다'라는 평을 듣고 불안정해진다. 스트레스 역치가 낮아지면 더더욱 자신이 겪는 고통이나 감정을 표정이나 제스처에서 숨기지 못하게 되고 결국 수업에서 탈락하거나 직장을 나오게 된다. 15 기상-복약-화장실-씻기-옷 입기-나가기-대중교통 타기-걷기-교내 도착-강의실 도착이라는 긴 루트를 구성하고 이를 하나하나 헨젤과 그레텔이 빵 주워 먹듯 밟아가야 등교의 스트레스를 최대한 줄이고 학교에 당도하는 확률을 높일 수 있다. 그리고 이 과정을 약 한두 달 정도 반복하면 몸에 상당히 밸 것이며, 조금씩 편안해질 것이다. (...) 우리 학교에는 자폐성 장애가 있는 학생이 있었는데, 그는 강의실에 들어가려고 할 때 강의실 문이 닫혀 있으면 그것을 열 수 없어 수업에 참석하지 못했다. 수업에 나오지 않는 것을 이상하게 여긴 교수가 상담을 하며 그 사실을 알게 됐고, 다음부터는 그 학생을 위해 강의실 문을 아예 열어두고 수업을 진행하도록 했다고 들었다. 사실 많은 선생들은 아픈 학생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모르는 경우가 많다. 정신질환을 '꾀병'이라 여기는 이도 있으며, 어떻게 출석이라는 그 사소한 것 하나도 지키지 못하냐며 타박하는 이들도 많다. 그것은 병의 증상적인 면을 타인이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이다. 병증에 대해 "잠에서 깨어날 수 없어요","거울을 보면 나갈 수 없어요","죽고 싶어요" 이렇게 직설적으로 말한다면 잘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그 나이대의 교수들은 대부분 한 차례 아픈 전적이 있었거나, 병에 걸린 주변 사람들을 알고 있다. 그러니 병의 특발적인 면, 돌발성, 즉 병이 갑자기 생겨나서 얼마나 인생을 망치고 있는지, 또 자신이 병과 맞서려 어떤 노력을 하고 있는지 등은 이해받을 수 있는 부분이 있으므로 아래의 항목에 대해 중점적으로 논의하기 바란다. 물론 자신의 상담사에게 말하듯 이야기하는 것은 곤란하다. 교수와의 상담은 이해와 공감을 얻기 위함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수업 수강생인 자신의 특기 사항에 대해 정중한 태도로 전달해 양해를 구하기 위함이다. 신중히, 말할 마를 미리 정해놓고 상담에 임하자. 1) 자신에게 병이 있다는 사실과, 어떻게 치료 계획을 수립하고, 따르고 있는지 2)가장 염려되는 부분을 다른 과제로 대체 가능한지 정도를 이야기하는 것이 좋다. 그리고 만약 상태가 돌연 나빠져 학교에 나가지 못하고 학기를 마치게 될 경우 절대 연락 두절상태로 떠나지 말라. (...)교수 입장에서는 아무런 말도 이유도 없이 잠적하는 학생보다 자신의 사정에 대해 짧게나마 얘기를 한 학생을 기억하고 염려하여 차후에 만날 경우 인식하고 고려할 확률이 높다. 16 꼭 완벽주의자가 아니더라도 주석을 제대로 달지 않았다는 이유로 다 된 과제를 제출하지 않고, 출석 점수가 아슬아슬할 때까지 결석했다는 이유로 그 학기 자체를 포기하며 학교에 가지 않는 등, 병자들은 자신이 세워놓은 기대치에 못 미치는 상황이 되면 손을 놓고 숨어버린다. 여기서 문제는 '완벽하지 않고 내 기준 미달이니 남들에게 보일 가치도 없다'와 같은 생각은 굉장히 비장하다는 데에 있다. 정신병이 있다면, 비장함과는 거리를 두어야 살아남는다. 자신에게 조 금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는 이들은 너무 빨리 죽는다. 때때로 학교에 아는 이나 친구 없이 다니는 병자들이 있는데 수업을 들을 때 최소한의 정보 공유는 필요하며 따라서 자신의 병을 아는 사람이 아니라도 그냥 서로 아는 사람 정도의 지인들이 있어야 한다. 일찍부터 고립된 학교생활을 해온 이들이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은, 인간들이 얼마나 지루하고 재미가 없는지 따위가 아니라 사회에서 고립되는 방식에 익숙해져 있는 자기 자신이다. 17 다음은 정말 큰 착각으로, 내 경우에는 특히 이게 심했다. 마치 수업시간에 졸면서 '오늘의 필기는 내일의 나에게 맡긴다......'라고 쓰듯, 나는 조증이 오면 현재 산재한 모든 과제를 극적으로 해결해줄 내가 생겨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내 기분 '상태가 좋은 나'는 이미 미쳐 있는 상태였고, 그 상태에서 적어 내린 과제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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