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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령가소년살인사건: 거대한 시대의 힘 앞에서 무너진 지식과 순수에 대한 영화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이 영화는 시대의 패러다임이 지식에서 힘으로 이동하던 시기, 득세하고 몰락하고 혹은 부재했던 아버지의 권력에 따라 휘둘릴 수밖에 없었던 소년 소녀에 대한 비극이다. [지식은 무력한 힘의 시대 1959년] 이해하기 어려운 샤오쓰의 극단적인 몰락을 이해하기 위해선 그의 뿌리인 그의 아버지를 들여다 봐야 하고, 그 아버지의 뿌리를 들여다 보려면 1959년 당시의 시대 정황을 볼 필요가 있다. 샤오쓰는 엘리트 지식인의 아들이다. 샤오쓰는 오프닝부터 국어 성적이 떨어져 야간반 진학이 결정되는데, 이는 샤오쓰 개인의 전락이 아닌, 시대의 흐름이 떠밀려 몰락하는 지식인 가족을 축약한다. ‘지식인’이 몰락하게 만든 근원에는 핵으로 상징될 수 있는 강력한 ‘힘’의 세계가 있다. 영화의 배경이 되는 1950년대 대만의 밖에서는 미국과 소련이 52년부터 61년까지 수소폭탄 실험으로 경쟁을 하던 냉전 시기였다. 더 이전으로 흘러가자면 1945년 8월, 일본에서 피어오른 버섯구름이 근대의 종식과, 현대 냉전의 개막을 알렸다. 핵은 모든 고통과 지루한 전쟁을 단번에 끝내줄 절대적인 해결책이었다. 영화 속 대만의 정치지도자 왕 선생은 미국의 지원을 받아 대륙에 핵폭탄을 떨어뜨리고 대륙으로 복귀할 꿈에 부풀어 있다. 바야흐로 핵으로 상징되는 엄청나게 강력한 힘만이 생존의 해결책이던 시대인 것이다. 이러한 시대적 흐름에도 불구하고, 샤오쓰의 아버지는 1920년대 타락한 재즈시대에 적응하지 못한 순수한 개츠비처럼 시대에 맞춰 변화하지 못하고 무력해진 지식에 매달린다. 샤오쓰는 처음에는 지식의 세계에서 충실히 아버지의 삶을 따라가지만, 영화가 진행되어가며 지식은 무력해져가고, 갈수록 강력해지는 힘의 세계 인물들을 통해 샤오쓰 부자는 점차 ‘피폭’되어간다. 영화 중반부터 샤오쓰는 지식보다 힘이 실제 세계에 작용하는 권력임을 경험한다. 샤오쓰는 마치 피터팬(아버지)에게서 떨어져 도망치려는 그림자처럼, 말썽을 일으키며 본격적으로 힘을 활용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지식의 세계가 전부이던 샤오쓰 가족에게 아들의 퇴학은 죽음으로 여겨진다. 샤오쓰 역시 가족의 울타리에서 벗어나 살아갈 길은 없기에, 가족이 상상할 수 있는 유일한 살 길인 시험을 통한 주간반 진급 시험을 준비하며 잠시나마 힘의 세계로부터 괴리되기도 한다. 그러나 힘이 득세해가는 시대는 무력해진 지식의 가족을 내버려두지 않는다. [지식인 아버지의 몰락이 부른 파국] 시대 권력의 관점에서 보자면 정말 흥미로워지는 지점은 샤오쓰가 밍과 만나 가까워지는 초반부도 아니고, 소공원파와 271파의 세력다툼이 벌어지는 영화의 중반부도 아닌 후반부이다. 후반부, 퇴학당한 샤오쓰는 주간반 진급시험 공부에 들어갈 때만 해도 지식의 힘을 믿고 있었다. 그러나 샤오쓰의 아버지가 체포되며 절친으로 믿었던 왕 선생에게 정치적 숙청 대상이 되고, 안정된 삶을 보장하던 지식의 인맥이 무너져버릴 때부터 샤오쓰 가족의 세계, 지식은 본격적으로 붕괴하기 시작한다. 더불어 아버지는 정신착란으로 무너져가고, 샤오쓰를 지탱하는 지식의 세계에 심각한 균열이 생기자마자 설상가상으로 샤오쓰의 연인 밍은 샤오쓰를 버리고 사령관의 아들인 샤오마와 사귀기 시작한다. 후반부의 샤오쓰에게 아버지와 지식이라는 안정적인 기반은 핵전쟁을 신봉하는 왕 선생과 사령관의 아들 샤오마라는 힘의 세계에 의해 사라진다. 그리고 밍이라는 존재가 샤오쓰에게 무력해진 지식에는 더이상 자비롭지 못한 시대의 진실을 알려준다. [밍: 부재하는 아버지라는 근원적 불안에 휩싸인 존재] 밍은 자신의 생존 문제를 해결해줄 권력에 의존하기 위해 끊임없이 유동적으로 변화하며 살아가는 존재이다. 밍이 뿌리내릴 수 있는 기반이 되어줘야 할 아버지는 존재하지 않고, 그렇기에 거주지와 직업(공부냐 생업이냐) 역시 일정하지 못하다. 카메라 테스트에서 영화감독을 감탄하던, 자유자재로 표정과 감정을 바꾸는 밍의 연기력은 불안하게 부유하고 변화하며 살아온 그녀의 삶과도 같다. 밍에게 허니는 영화 이전에 그녀의 안정과 생존을 해결해주는 존재였고, 허니가 죽은 뒤에는 젊은 의사 선생(생계에서)과 샤오쓰(학교에서)가 그런 존재였다. 그러나 젊은 의사 선생이 결혼해버리고, 샤오쓰가 진급시험으로 학교를 떠나버린 이후로 밍은 새로운 의지처가 필요했다. 때마침 밍의 눈에 들어온 사령관의 아들 샤오마는 최적의 상대였다. 샤오마는 힘있는 아버지의 위세를 바탕으로 감히 밍의 뺨을 때릴 수 있는 남자인 동시에, 총이라는 강력한 힘의 권력을 맛보게 해줄 수 있는 남자이다. 밍은 격발된 총과 세차게 받은 뺨으로 샤오마의 압도적인 힘을 온 몸으로 절감했다. 밍은 강력한 힘을 원하는 여자다. 생존이 해결된다면 수치와 모욕은 아무 것도 아닌 여자다. 그녀는 자신의 생존 문제만 해결해준다면 얼마든지 권력자의 연인으로 변신해주는 나약한 존재이다. 그렇게 하여 힘을 잃은 지식인 아버지의 아들(샤오쓰)은 아버지라는 힘과 기반이 부재하여 불안한 딸(밍)을 힘있는 군인의 아들(샤오마)에게 뺴앗긴다. 그리고 더이상은 지식으로도 힘으로도 강력한 힘(샤오마)을 이길 수 없다는 현실 앞에서, 또한 고결한 사랑인 줄 알았던 여자가 사실은 지조없이 힘에 몸을 팔아온 존재라는 진실 앞에서 샤오쓰의 뇌관은 터져버린다. [핵이란 거대한 힘 앞에 무너진 지식, 가족, 순수] 핵은 세계를 뒤흔들었다. 핵이 보여준 압도적인 힘은 반세기 넘도록 냉전 국가들의 남자들이 마초적인 힘에 몰두하고 맹신하도록 추동했다. 냉전의 시대에서 핵의 논리를 따른 남자들은 득세했고, 시대의 흐름을 거스른 지성인들은 잠깐의 빛을 보다가도 시대의 거센 물결(매카시즘, 문화대혁명, 신자유주의)에 결국 휩쓸려 버리고 말았다. 1959년, 지식은 무력해진 거대한 힘의 시대 한복판, 지식보다 힘을 추종했던 세계, 힘에 밀려 몰락하는 지식인 가족, 지식보다 힘이 필요했던 지식세계의 소년 그리고 힘이 절실했던 소녀. <고령가 소년 살인 사건>이 일개 개인의 충격적인 스캔들, 비극일 수 없는 이유는 충격적인 결말에 이르른 물줄기의 수원이 거대한 시대의 흐름을 정확히 반영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총을 들고 웃고 있는 밍의 사진] 사랑이 아니라 총이, 힘이, 그녀를 웃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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