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찬현

행복한 라짜로
영화 행복한 라짜로는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과 상당히 밀접해 있는 영화다. 같은 시대 상의 계급구조와 그에 따른 갈등을 서사로 삼고 있지만 기생충과 행복한 라짜로가 표현하는 영화의 방식은 상이하다. 이 영화의 제목인 행복한 라짜로와는 달리 영화 상에서 구현되어 있는 라짜로의 삶은 전혀 행복하지 못하다. 성자란 무엇인가, 이 시대의 구원을 바라는 만민의 백성에게 조차 사랑받지 못하며 그저 연민의 대상으로서 방관의 존재가 될 수 밖에 없는 성자인 라짜로는 그저 눈물을 흘릴 수 밖에 없다. 백열 전구가 부족하고 좁은 방안에서 살을 맞닿으며 살아가고 있는 인비올라타의 담배 농장에서 소작농으로 살아가는 사람들. 그곳의 영주인 루나 후작 부인에게 현대판 소작농으로서 착취와 노예 봉건제의 삶을 살아가는데 현대 법으로 임금과 급여의 지급 없이 노동력을 착취하는 소작농 행위는 범법 행위로서 금지되어있다는 사실을 은폐한 체 인비올라타의 주민들을 핍박한다. 루나 후작의 아들인 탄크레디의 납치 자작극으로 인해 경찰이 오게 되고 소작농으로서 불법 착취가 자행되었다는 사실이 드러나자 루나 후작은 체포되고 공동체는 해체된다. 이 영화는 이 부분으로부터 분위기가 반전된다. 마을의 사람들은 라짜로라는 이름을 시도때도 없이 불러대는데 마치 성자인 라짜로에게 구원의 기도를 내뱉는 회중마냥 짜증이 날 정도로 불러댄다. 그들의 부름에 응답이라도 하듯, 그들의 소망에 하나하나 최선을 다한다. 부르주아인 후작에게 착취당하는 프롤레타리아 소작농, 그런 그들에게 착취당하는 라짜로란 인물로서 사회 구조적 계급 체계는 계속되서 순환되어지고 있다는 것을 시사하는 동시에 라짜로의 성인군자적인 면모를 부각시킨다. 대 사기극이 자작 납치극에 의해 종결된 이후 마을의 주민들은 모두 도시로 와해된다. 감독은 이 부분에 대해 노골적인 착취의 시대에서, 더 새롭고 유혹적인 착취의 시대로의 전환이라고 밝혔다. 라짜로는 열병으로 인해 절벽에서 추락하여 사망하는데 보이스 오버로 작용하던 성자의 이야기가 영화의 프레임에 덧씌어진다. 그의 시체를 보며 발톱과 이빨을 드리우며 포식하려던 늑대는 처음 맡게 되는 냄새에 동작을 멈춘다, 선한 사람의 냄새였던 것이다. 늑대의 울음 소리에 의해 라짜로는 부활하고 라짜로는 도시로 향한다. 세월의 흔적이 할퀴고 지나가지 않은 라짜로는 이미 많은 세월이 지나간 도시로 향한다. 여기서 이 영화는 시간 여행과 같이 판타지적 요소가 가미된다. 봉건제도의 사회에서 자본주의적 시대로의 연결로 한 시대에서 더 큰 시대로의 시간 여행을 경험한다. 그가 처음 만나는 니콜라는 이민자들에게 일자리를 주선하는 브로커로 변모해 있었고 소작농과 지주에서 자본가와 노동자의 착취 구조의 변주를 포착한다. 두 번째로 안토니아를 만나게 되는데 그녀의 가족들은 절도나 사기로 하루하루를 전전긍긍하며 살아가고 있다. 숲에 의해 나포된 채 방황했던 그들은 자유로운 몸이 되었지만 더 큰 자본주의라는 이름의 숲을 맞땋뜨리면서 사회로부터 아무런 교육도, 지원도 수급도, 1인 생산 능력도 무마된 채로 사회 속에 경직되어 노동자의 삶을 살고 있다. 과거의 프롤레타리아에서 현대의 노동계급으로 명칭만 바뀌었을 뿐 그대로 무산층인 것이다. 세 번째 인물은 탄크레디이지만 그들의 가족은 은행이라는 사회의 기업에 앞에 무릎꿇고 모든 재산을 강탈당했다. 인비올라타의 주민들은 탄크레디에게 초대를 받지만 그 또한 무산층일 뿐 과거에 영광에 취해있다. 초대를 받고 간 주민들은 후작 부인과 재회하지만 그녀의 집에서 퇴짜를 맞는다. 여기서 소작농과 지주의 관계에 대한 회복과 화해는 결렬된다. 그들은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성당에서 들려오는 노래 소리에 성당으로 가게 되는데 만민을 사랑해야 하는 예수의 가르침을 믿는 수녀들은 역설적으로 그들을 매몰차게 대하며 쫓아낸다. 음악이 성당 밖으로 빠져나와 그들에게 따라오는 것으로 그들을 물리적으로 구제하는 것을 불가능하지만 정신적인 위로를 주는 것은 아직까지 가능하다고 말한다. 노래 소리와 함께 길을 떠나며 인비올라타의 소작농 시절로의 귀향을 얘기하는 그들을 보며 라짜로는 눈물을 흘린다. 라짜로는 새총을 들고 은행으로 간다. 그러나 아무리 성자라고 할지라도 자본주의의 실체없는 구조 앞에서는 무력하기만 할 뿐이다. 자본주의의 치세와 권세 앞에 굴종해야하는 인비올라타의 주민들. 라짜로는 비호해야할 어린 양들인 백성들에게 살해당하고 그를 지켜보던 늑대로 부활하며 도로를 뛰쳐간다. 영화 행복한 라짜라로는 초현실적인 내용을 바탕으로 이탈리아의 네오리얼리즘에 기반하여 16mm 필름의 거친 질감과 1.66:1의 화면비를 통해 그들의 절망적인 삶을 스크린으로 조명한다. 사화 구조 속에 뿌리 내려있는 이 현 시대의 계급체제는 기생충이 내포하고 있는 메세지와 교접한다. 무엇에 분노해야 하는지도 모르는 실향민들은 오늘도 길거리를 배회하는 어린 양들은 오늘도 행복한 라짜로의 이름을 부르며 또다른 라짜로를 찾기 위해 길을 나설 것이다. 구원 따위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다는 것을 알면서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