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멘트
1 본보기 처벌이라는 말 들어보셨죠? 모든 아이들이 보고 있는 가운데 한 명을 불러내 '너 오늘 잘 걸렸다. 네가 좀 맞아야겠다' 이러는 거죠. 한 아이를 때리면 다른 아이들이 공포에 떨고 있을 것이고 그 시간을 겪고 나면 교실 분위기가 좋아질 테니까요. 중략 이런 것도 있어요. 장차 체벌이 예정되어 있지만 지금은 집행 하지 않겠다는 협박입니다. 집에서 들 많이 하죠. '네가 자꾸 이런 식으로 하면 내가 널 때릴 수 밖에 없어 하지만 지금 너를 때리지 않고 참고 있는 거야' 라고 이야기 하며 당장 체벌 하지 않는 경우입니다. 체벌을 하지 않는 이 순간들은 과연 교육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아이가 정말 맞을 짓을 했지만 나는 때리는 부모가 아니기 때문에 때리지 않겠다고 할 때 어른인 내 마음은 편안하죠. 왜냐하면 양심적인 모습을 아이에게 보여줬다고 생각하거든요. 또 스스로 아이를 때리지 않았기에 죄책감을 가질 필요도 없고요. 정작 어린이는 유예된 체벌에 대해 공포를 느끼는데 말이죠. 2 최근 저는 체벌의 가능태 속에 놓여 있는게 단순히 어린이 뿐만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특히 노키즈존에서 그런 느낌을 받았는데요. 양육 주체인 엄마에게 이렇게 이야기하는 거죠. '당신이 이 곳에서 아이를 제대로 돌보지 않으면 우리는 아이를 출입 시키지 않겠다. 당신이 교육하는 걸 봐 가면서 출입허가를 결정하겠다'는 식의 말들이요. 우리 사회가 양육 주체를 특정한 성별로 규정짓고 아예 엄마에게 '아이가 잘못되면 당신 책임'이라고 협박하면서 아이를 들여보내지 않겠다고 이야기하는 이 상황이 어린이를 태동(남이 잘못할 때마다 대신 맞는 아이)으로 세우는 상황과 결코 다르지 않게 보였습니다. 마치 우리 어린이들이 이 사회의 잠재된 여성혐오의 몰매를 대신 맞고 있는 것 같다고나 할까요. 성인 여성을 곧바로 호명하는게 두렵기 때문에 성인이 동반한어린이를 태동으로 세워서 혐오하는 태도가 아닌가 노키즈존을 보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중략 아이를 태동으로 세우는 행위는 가부장제 하에 있는 남성뿐 아니라 여성에게도 나타나곤 합니다. 아이에게 가혹한 여성들이 아이가 잘 되어야만 집안과 세상에서 인정받을 수 있다고 말하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요.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자기 자신의 두려움 때문에 아이를 때리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그 위협은 결국 어린이에게 귀속 되고 이런 식으로 폭력은 계속 이어지게 됩니다. 다음 폭력의 희생자는 권력관계의 가장 밑에 있는 존재 이고요. 은폐된 폭력의 희생자는 대부분 그 가정의 어린이들입니다. 3 어린이의 행위를 응징 하면 자신이 안전해질 수 있다고 믿는 그런 성인들이 참 많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저런 무서운 아이들이 다 크고 나면 세상이 어떻게 되겠느냐'고 이야기 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사회에는 그런 어린이보다 성인 범죄자들이 훨씬 많습니다. 그런데도 왜 항상 어린이 청소년 범죄자들에 대한 사회적인 분노가 더 높게 표출되는 걸까요? 우리 사회의 분노지수 자체가 높아서 생기는 문제도 있다고 봅니다. 어떤 출구를 통해서라도 폭력을 발산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인데 강자에게는 절대 행사하지 못하는게 폭력 행위 얘기 때문에 자기보다 약한 사람을 찾다가 결국 어린이를 표적으로 삼게 되는 것이죠. 잘 기억해 보면 어릴 때 맞았던 날은 대부분 어른이 기분 나쁜 날 아니었나요? 중략 가해자의 상태에 왜 공감해야 하냐고 물어 보시는 분이 있어요. 우리는 언제든지 상대적 강자의 자리에 설 수 있습니다. 그럴 때 강자가 약자를 폭력적으로 대하는 상황이 어떻게 발생하게 되는지 생각해 보고 그 마음이 왜 부당한지 스스로 반성해 본다는 의미에서 공감을 말하는 것입니다. 중략 권정생 작가의 몽실 언니는 국가폭력이 개인의 존엄성을 어떻게 파괴 하는지 다루는 작품입니다. 책에 몽실언니가 바닥으로 내팽개쳐지는 장면이 있는데요. 당신 어린이라는 존재가 어떻게 대우 받았는지를 잘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드라마에서도 어른이 화가 나면 소리를 치면서 술상을 확 엎어 버리는 식의 행동들이 종종 등장하죠. 그 시절 어린이는 그런 존재였습니다. 화가 난 어른이 내 눈앞에 있는 걸리적거리는 것들을 다 해치울 때 그러니까 술상을 없거나 잔을 깨거나 하는 행동들이 시작되면 그건 곧 그 다음 대상을 예고 하는 거예요. 저 술잔과 저 주전자가 나일 수도 있고 나일 것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아이들은 직접적으로 맞지 않아도 공포를 느끼게 됩니다. 저희가 자랄 때는 그런 순간이 너무 많았습니다. 사실은 지금도 그렇고요. 중략 이 아이가 때리는 어른들은 그런 사람들예요. 아이가 파는 신문을 낚아채고 따귀를 올려 붙인 신사, 신문 기사에 내용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아이를 때리는 사람들, 공정해야할 경찰마저 찬수의 진실보다 어른들의 거짓말을 더 옹호하면서 "네가 맞을 짓을 했지"라고 얘기하죠. 그 순간 찬수에게는 폭력의 미러링이라는 선택 밖에 없었다는 것을 이 작품은 잘 보여줍니다. 그래서 어른들이 했던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자신 역시 어른들을 때리려고 하죠. 중략 매맞는 옆집 아이를 볼 때 아이의 부모에게 때리지 말라고 적극적으로 항의해 본 적 있으신가요? 이게 생각보다 굉장히 어려운 일이거든요. 더군다나 그 부모와 안면이 있고 친할수록 더욱 어렵습니다. '저 엄마가 아이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아는데 오늘 무슨 일이 있었겠지. 저렇게 하지 않으면 좋겠지만 내가 개입 하기에는.....' 그러면서 폭력의 정도를 측정하는 거예요 '저거보다 더 때리면 말해야지. 비명이 더 커지면 말해야지. 그냥 몇대 때리고 마는 것 같으면 조용히 있자. 남의 집 일인데.' 한 대도 한 순간도 아예 몸에 손을 대서는 안 되지만 타인이 그렇게 할 때 말리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중략 '다리 몽둥이를 부러뜨려 놓고 말겠다', '머리카락을 모조리 깎아 버리겠다' 같은 말들 너무 많이 들어 보셨죠? 이 작품이 출간된 이후 10년이 지났지만 신체적 위협을 암시하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입에 올리는 어른들은 여전히 많습니다. 중략 '내일도 그 멋진 치마 입고 오는 거지?' 선생님이 자기를 쳐다보는 시선을 통해 예상하지 못했던 수치심과 두려움을 느끼면서 짧은 치마를 입는 것이 그 사람의 쾌감에 복종하는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겁니다. 어린이가 폭력을 감지하게 되는 순간은 이처럼 다양합니다. 따라서 작가들은 폭력성이 폭력을 행사하는 자가 아니라 폭력의 대상이 되는 피해자 의해 결정된다는 사실을 끊임없이 기억하면서 피해자의 감정을 중심으로 작품을 써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4 4.19 와 관련된 가장 잘 알려진 자료로는 그 당시 수송국민학교 학생이 쓴 시가 있습니다. 왜 우리 언니 오빠들이 시위에 나가서 죽었는가 하고 묻고 있는 시입니다. 이 시는 여러 교과서들에도 실려 있습니다. 초등학생의 집회를 찍은 사진들도 배치되어 있고요.( 중략 )우리는 이런 행동을 부정적인 눈으로 바라보지 않습니다. 대부분 꽤 긍정적으로 가르칩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만약 내 자녀에게 혹은 지금 사회에 그런 일이 생긴다면 조금 주저하는 마음이 드는 것도 사실이죠. 이 아이들은 아직 어린 아이인데 이렇게 사회 문제에 적극적으로 나서게 두어도 될까. 이런 생각들을 하게 됩니다 이런 갈등들은 결국 체벌을 둘러싼 논란과 이 논란들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지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습니다. 이런 말씀을 드리는 건 우리가 사람을 대할 때 으레 구분짓기를 한다는 사실을 지적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아이들을 어린이 청소년 대학생 이런 식으로 구분합니다. 그러나 이런 구분보다 먼저 이들은 모두 이 사회에서 살아가는 한 사람의 구성원이라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 중략 ) 그러니까 한 명의 사람이자 사회의 구성원이라는 점을 우선시해야 하는지 아니면 어린이 청소년과 같은 구분을 우선시해야 하는지에 관한 논의가 필요하지 않을까요? . 최초의 인류 사회인 수렵채집사회에서는 어린이가 한 사람의 사회 구성원으로서 제 역할을 하기 힘들었습니다. 당시는 사람들이 계속 옮겨 다니는 사회 였기 때문이죠. (중략) 이건 꼭 아이들에게만 국한 되는 문제는 아니었습니다. 한반도에서 순장과 같은 제도가 상당 기간 유지 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계시죠? 순장이라는 제도가 존재했던 시기는 하나의 독립된 존재로서 개개인의 생산 활동을 하는게 그렇게 큰 의미를 갖지 못할 때였습니다.( 중략 )농경사회로 접어들면서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존재 자체가 의미 있게 됩니다. 사회에서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일들이 다양해지기 때문입니다.( 중략 )그래서 아이들도 사회 구성원으로서 점차 자기 몫을 하게 되었습니다. (중략)그 결과 사회 구성원들에 대한 보호 정책들도 어느 정도 취해 지고요. 아동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중략) 1989년 유엔이 채택한 아동권리협약은 18세 이하 어린이와 청소년을 어른과 똑같은 가치를 지닌 사회적 주체로 인정해야 한다고 규정했습니다. 이는 제가 앞서, 체벌을 둘러싼 논란을 '아이를 어떤 사회적 존재로 바라봐야 하는가'의 문제로 전환해 이야기 하면 좋겠다고 말한 것과 같은 맥락에 있습니다. . 미국에서 한 아이 엄마가 어린 4남매를 놔두고 독일로 여행을 갔는데 이웃이 신고를 했습니다. 경찰이 와보니까 남매 넷만 있었던 거예요. 그래서 아이들의 엄마에게 급히 연락을 해서 귀국 하라고 했답니다. 그 엄마는 공항에서 체포된 후 기소되었습니다. 많이들 아시겠지만 미국 사회에서는 보통 초등학생, 만 12살까지는 아이들을 혼자 학교에 보내지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미국에서 일시적으로 생활하는 한국 부모들은 자녀를 학교에 데려다 주고 학교가 끝나면 데려오는 일을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적어도 스쿨버스라도 태워 보내야 합니다. 또 다른 예를 하나 생각해 보죠. 나 홀로 집에라는 영화를 잘 알고 계시죠? (중략) 이 영화의 내용을 놓고서 앞의 사건과 같은 문제를 제기하는 목소리는 없었던 것 같습니다. 미국에서 여덟 살짜리를 남겨두고 여행을 떠난 부모들은 별 탈이 없었을까 하는 것이요. 앞의 사례대로라면 기소돼야 하겠죠. 하지만 영화에 그런 이야기는 전혀 나오지 않고 영화를 본 사람들도 그런 문제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이야기를 말씀 드리는 이유는 우리의 생각에 큰 괴리가 있다는 점을 집기 위함입니다. 뉴스 보도를 접할때는 아이들을 혼자 두고 집을 떠나면 안 된다고 생각하지만 영화를 볼 때는 이 꼬마친구가 어떻게 도둑을 물리치는지 재밌게 관람하면 그만입니다. 어린이라는 존재, 나아가 체벌 문제를 다룰 때도 이런 간극이 작동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뉴스를 보면서는 아이들을 그저 보호받아야 할 존재로, 영화를 보면서는 스스로 자기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존재로 생각하는게 아닐까요? 똑같이 아이들인데 우리는 상황에 따라 전혀 다른 존재로 생각합니다. 아이들을 체벌하는 것이 교육적으로 효과가 있는지를 둘러싼 논란도 어른들이 필요와 편의에 따라 아이들을 독립적 존재 혹은 수동적인 존재로 보는 태도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5 특히 해방 이후에는 학교 교육이 급속히 확대되었는데, 이런 현상에는 교육적으로 사회적 지위를 바꿔보겠다는 생각이 깔려 있었습니다. (...)여기에는 사회와 교육의 관계를 바라보는 세 가지 관점이 중첩되어 있습니다. 첫번째는 (...)교육은 국가가 필요로 하는 '국민'을 기른다는 생각입니다.(...) 두 번째로 주목할 점은(...) 당시 부모들은 '나는 힘들게 살아도 내 자식들은 가르쳐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습니다. (...) 고생은 부모나 누나가 하지만, 혜택은 아들이 보는 겁니다. 그렇지만 아들은 독립된 자아가 아니라 '아들'이라는 가족구성원으로, 가정을 지키는 가장으로 여겨졌습니다.이처럼 (...)학교 교육을 확대시킨 요인으로 볼 수 있습니다. 학교 교육의 세 번째 특징은 이렇습니다.(...)1929년 광주 학생항일운동의 주체는 고등학생들이었고, 이것만큼 많이 거론되지는 않지만 1926년의 6.10 만세 운동을 주도한 것 역시 고등학생들이었습니다. 이때 학생들은 바로 위에서 언급된 것과는 달리 독립된 사회적 존재입니다. 학교 교육에는 인간상에 관한 이 세 가지 생각들이 중첩되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세 번째 경우를 제외하면 (...)다른 사람에 의해'이런 존재'가 되어야 한다고 규정된 거죠. 근래에 확립된 교육 시스템들이 바로 그런 규정을 내리는 데 활용되었습니다. 그 시스템이 해방 이후의 한국 교육에서 지속되고 있는 것입니다. ㅡ중략ㅡ 근대 이전에도 교사와 학생들이 이렇게 일제히 인사를 하고 수업을 시작했을까요? 그렇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당연하게 생각하는 학교생활의 장면은 이렇게 정책 차원에서 시작된 것입니다. 이 밖에도 해방 이후 자연스럽게 유지된 학교 시스템에 상당 부분은 일본의 강요로 시행된 것들입니다. 그 중 상당수가 패전이후 일본에서 사라졌지만, 어떤 일인지 한국에서는 계속 유지되었습니다. 이런 절차가 처음에 어떻게 시작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은 거죠. 국가나 기존 사회질서에 대한 충성심과 복종심을 길러내기 위해 학생들을 획일화 하는 수단으로 이용되었음을 생각하지 않은 것입니다. 6 저는 무엇보다도 아이들이 스스로 생각하는 존재이고 그런 생각을 통해 사회 구성원으로서 역할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우선시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제까지의 학교 교육처럼 어른들의 결론, 어른들이 만들어 놓은 사회적 행동의 틀을 그대로 받아들이게 해서는 안 됩니다. 따라서 아이들을 대하고 교육하는 방식은 생각의 훈련이라든가 연습, 경험을 제공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런 사고 경험이 늘어나고 생각하는 연습이 누적될 때 합리적이면서도 사회적으로 바람직한 생각과 행동들을 할 수 있겠죠. 생각하는 경험을 쌓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결국 체벌을 가장 큰 문제점은 옳고 그르다는 기준을 미리 정해 놓고 그에 따라 판단 한다는데 있습니다. 생각을 하는 방식, 나아가 그 생각을 토대로 행동하는 기준 같은 것은 사람마다 다를 수 있는데 이것을 고려하지 않고서 결과만을 놓고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것입니다. 미리 정해놓은 기준에 따라 칭찬을 하거나 벌을 주는 방식입니다. (...) 질문 중에 이런 내용이 있더군요. 사람마다 생각하는 데 차이가 있고 아이들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는 점을 강조한다면 결국 모든 행동을 합리화할 수 있는 것이 아니냐고요. 그런 뜻은 결코 아닙니다. 사회가 아이들의 모든 행동을 용인 해 주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행위의 결과에 대해서 스스로 어떤 식으로 책임을 질 수 있는 지까지도 생각해볼 기회를 제공하는 교육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7 저를 포함해 이자리에 여러 여성 분들이 계시지만, 저와 여러분들이 똑같은 약자는 아닐 수도 있어요. 특히 마이크를 쥐고 있는이 순간에는 제가 훨씬 강제할 수 있죠. 강자가 약자는 상대적인 것입니다. 관계에서 형성되죠. '여성'과 '아동'이 항상 약자로 묶이는 건, 어떤 상대가 이들을 계속 약자로 만들고 있기 때문이에요. 약자임을 판단하는 세상의 중심이 어딘가에 있어서 주류가 아닌 주변부의 사람들에게 '약자'라든가 하는 이름을 붙이는 것이죠. 핵심은 이런 이름 붙이기가 결국 이들을 '타자화'한다는 거예요. 그래서 이런 약자들을 '보호'해야 하고 '지원'해야 한다는 인식 구도가 성립됩니다. ㅡ중략ㅡ 결국 폭력이라는 것은 어떤 사람이 '갑자기 화가 나서' 휘두르는게 아니에요. 오히려 둘 사이에 어떤 관계가 형성되어 있는가를 살펴보는게 매우 중요하죠. 이 문제는 단선적이지 않아요. 여성인 제가 어떤 남성과 사귀고 있다고 할 때 폭력 상황에서 제가 언제나 피해자가 되는 건 아니잖아요. 만약 제가 한 스무 살 어린 친구와 사귀면서 그 친구에게 매일 밥을 사주고 용돈도 준다고 가정해보면 제가 훨씬 가해자가 되기 쉽습니다. 명령하거나 통제하기 쉬워지는 것이죠. 그러니까 '남자/ 여자/ 어른/ 아이/ 노인이기 때문에'라는 식으로 단선적으로 가를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여기에는 한 가지 핵심이 있습니다. 그 관계가 평등한지 그렇지 않은지를 따져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가정폭력이 일어나든, 성폭력이 일어나든 둘 중 누가 잘못했는지를 따지고 싶어 합니다. 그것도 권력 관계를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는 맥락 보다는 단순히 결과만 보는 것이지요. 그보다는 그 관계가 평등한지 아닌지에 주목해 맥락 속에서 종합적으로 판단하는 것이 중요한데도 말이지요. (...) 보통 우리는 다른 인간과 어떻게 평등한 관계를 맺을 수 있는지에 대해 잘 교육 받지 못합니다. 상대를 존중하라는 말은 많이 하지만, 정작 존중하는 방법은 알려주지 않죠. 마찬가지로 폭력을 행사하면 안 된다고는 하지만 폭력을 행사하지 않는 구체적인 방법을 알려 주지 않고요. 폭력이 무엇인지조차 제대로 이야기 되지 않는 현실입니다. (...) 그래서 내가 피해자가 될 수도 있지만, 가해자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고 살았으면 해요. 결국 관계에서의 불평등을 알아채는 능력이 절실합니다. 한국 사회는 사실상 이런 걸 일깨워 줄 수 있는 교육 자체가 없습니다. 이 시간을 통해 잠깐이나마 내가 갖고 있는 특권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면 좋겠습니다. 8 보통은 가해자들이 술을 마셔서 폭력을 휘두르는 거라고들 합니다. TV 와 같은 매체에서도 가정 폭력 가해자들이 술을 마시고 있거나 술병을 던지는 모습이 묘사 되죠. 하지만 실제로 70% 이상의 가정폭력은 가해자가 술을 마시지 않은 상태에서 일어납니다. 나머지 30%인 술을 마신 상태에서 폭력이 발생한 경우에 대해서는 이런 해석을 합니다. 한국 사회가 음주에 관대하잖아요? 술을 마셔서 그랬다는 핑계를 만들기 위해서 술을 마신다는 거예요. 다시 말해 폭력 행위를 하는 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술 핑계를 댄다는 거죠. 상담 현장에서는 때리기 위해 술을 마신다고 도합니다. 술에 취했기 때문에 때리는 것이 아니고요. 이건 무척 일리 있는 말입니다. (...) '분노조절장애'를 끌어들이는 설명도 들어 보셨죠? 그런데 자신이 분노조절장애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는 가해자 중 상당수는 다음과 같은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강자 앞에서는 분노가 잘 조절된다'는게 바로 그 특징입니다 정말 분노조절 장애가 있다면 아무 데서나 난리를 쳐야 할 텐데 밖에서는 가만히 있다가도 집에 와서만 분노조절이 안 돼요. 그건 사실 분노를 너무나 잘 조절 하는 거거든요. '내가 어디에서 누구한테 폭력을 행사할 수 있다/ 행사 해도 된다' 이걸 정확히 아는 거죠. (...) "때릴 수 있으니까 때리는 것뿐"입니다. 끝, 이게 끝이에요. 때릴 수 없으면 못 때려요 여러분도 화가 나서 물건을 던진다거나 소리를 지른다거나 하는 일을 해 본 적이 있으실 것 같은데 아무 데서나 그렇게 하시나요? 그렇지 않죠. 고르잖아요 저도 화가 나면 참지 못하고 뭘 던지거나 하고 싶을 때가 있거든요. 뭔가를 막 던지려고 하다보면, 이건 학교 갖고 가야 되고 저건 뭐 때문에 안 되고, 결국 골라서 화풀이를 하죠. 폭력이라는 건 결국 선택된 행동 이거든요. 그렇게 할 수 있으니까 하는 거죠. (...) 이 말은 그렇게 폭력을 쓸 수 있는 사회적인 조건이 된다는 거예요. 그걸 용인해주는 사람들이 있다는 거죠. 폭력의 이유를 자꾸 개인의 문제로 돌리거나 음주나 가족력 등을 내세워 변명하면 문제는 영원히 해결 될 수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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