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언젠가 세상은 영화가 될 것이다

존 웨인의 히프
평균 3.9
"꿈에 북극에서 히프를 흔들며 걸어가는 존 웨인이 나왔다"는 세르주 다네의 말을 인용하며 시작한 <존 웨인의 히프>는 스트린드베리의 연극으로 옮겨간다. 본인은 스트린드베리에대해 잘 모르지만 극중 그를 평가하는 장의 발언과 광기의 극작가라는 명성에서 보여지는것처럼 영화에서 표현된 그의 연극은 파격적이고 광적인 내용을 담고있었다.예수탄생신화와 창세기에대한 왜곡,신성모독을 전개하는 그의 무대에서 몬테이루는 막스 몬테이루라는 이름으로 타락한 신을 연기한다. 데우스3부작에서 이미 타락한 신이되길 자처한 몬테이루의 경력과 3부작의 사이에 위치하는 <존 웨인의 히프>의 연관성을 생각해 볼때 스트린드베리의 연극무대는 어쩌면 몬테이루에게 가장 시의적절한 배경이었을 것이다. 인간세계를 경멸하여 저주와 재앙을 내리고 천사들을 희롱하는 타락한 광기의 신 '막스 몬테이로'와 이에 반발해 인간세계로 내려간 루시퍼 '장'의 대립은 이후 영화가 현실세계로 확장할때 나타나는 둘의 관계를 생각해본다면 연극속에 배치된 그들의 대립은 흥미로운 지점을 준다. 영화의 초반부를 차지하는 스트린드베리의 연극에서 카메라는 정적으로 연극의 무대를 바라보고 있지만 이 연극은 어쩐지 연극같아 보이지 않는다는 느낌을 준다. 신의 거처와 인간세계를 표현하는 무대는 폐건물이며 소품이나 장치도 조악하다. 관객석에서 잘 보이지않는 위치에서 진행되는 선악과를 받는 아담과 이브의 장면(관객석은 2층에 위치한다)또한 현재 연극이 진행되고 있다는 인식을 흐린다. 마지막에서야 관객들을 보여주며 연극임을 밝히지만 앞서 서술한 요소들 때문에 정체성이 모호해진 연극은 마치 몬테이루가 영화로 표현한 고통받는 인간세계의 알레고리처럼 보인다. 이는 영화가 이후 연극의 무대에서 현실의 무대로 확장한다는것과 관계가있다. 연극이 끝난후 장은 막스와 똑같이생긴 엔리끄와 만난다. 막스와 엔리끄는 다른인물이지만 동시에 동일인물처럼 보이기도한다. 둘의 이름은 다르지만 똑같은 외모와 그들의 변태적인 언행과 태도는 그둘을 외양적으로 그리고 정신적으로 잇는다. <존 웨인의 히프>에서 앞서 말한 정체성이 모호한 연극이 현실세계로 확장한다는 것을 말하고 싶다. 연극무대 바깥으로 무대를 넓힌 영화는 연극의 인물들과 현실의 인물을 이으며 막스와 엔리끄가 다른인물이면서 동시에 동일인물인 것처럼 보이는것도 이때문이다. 연극속의 신 '막스'가 2층의 신계에서 1층의 인간계에 내리는 재앙을 맞는것은 포루투갈의 현실에 고통받는 인간 '엔리끄'이며 인간세상을 경멸하며 무대위 보이지 않는 3층으로 올라가는 막스의 행위는 역시 현실에 환멸하여 북극의 존웨인을 보려 떠나려는 엔리끄의 행위와 연결된다. 연극에서 루시퍼'장'과 막스의 대립또한 확장의 개념으로 연결될수있는데 인터뷰에서 드러나는 상류계급을 향한적개심과 자살을 결심한다는 부분에서 엔리끄와 공통점이 있으나 엔리끄와 달리 돈에대한 집착을 버리지 못하고 강가에서 시도했던 자살이 결국 실패했다는 점에서(이때 강가에서 장의 결심이 바뀔때마다 나타나는 극단적인 조명의 대비또한 연극의 연장선상임을 상기시킨다),연극속 인간세상을 버리지못하고 내려간 루시퍼의 역할을 다시금 현실에서 수행한다. 반면 엔리끄가 현실의 삶을 대하는 태도는 명확하다. 할리우드 자본의 중심지였던 서부의 사막이 아닌 북극에서 히프를 흔들며 걸어가는 존 웨인의 모습을 보는것은 엔리끄에게 자본주의가 전복된 유토피아를 보는것을 의미한다,또는 할리우드식 서사전개를 버린 감독 몬테이루가 감독으로써 존웨인의 걸작<리오브라보>,<수색자>와 같은 걸작을 만들고 싶다는 바람을 표현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몬테이루는 걸작을 만들었지만 엔리끄의 바람은 이루어지지 못할것이다. 북극으로 갈 수 없다는 엔리끄의 대사에서 이같은 사실은 재확인되며 경멸하는 포루투갈의 현실에서 엔리끄가 벗어날수있는 유일한 방법은 스스로 목숨을 끊는것이다. 이는 식당 씬에서 극명하게 나타난다. 서사를 버린 몬테이루의 영화는 일상의 연장에서 초현실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는데 이 영화의 식당씬이 그러하다. 식당의 무대위에서 네오나치들이 기행을 벌이고 무대위에서 서로의 삶의 육신의 생동감을 나타낼때 엔리끄는 죽기직전 매춘에 실패하고 오줌을 누는 자신의 초라한 육신을 전시한다. 이후 장이 보는 앞에서 엔리끄는 강물에 몸을 던진다. 엔리끄의 자살이후 이어지는 쇼트가 막스의 모습이라는 점에서 영화가 그둘을 은근슬쩍 묶어내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스트린드베리의 연극이 엔리끄의 자살이라는 현실의 사건으로 확장했다면 엔리끄의 사건은 사건을 겪은 장의 연극 각본으로 축소한다. 엔리끄와의 일화를 토대로 작성되었지만 직전 스트린드베리의 광기를 비판했던 장의 연극은 실제보다 평화롭고 이성적으로 각색되었다. 장은 다시금 현실에 안착했으며 동시에 더이상 죽음과 북극의 존웨인을 떠올리지 않을것이다. 그의 연극각본에서 그들은 아리안느라는 여성과 그녀의 당나귀와 함께 도시를 여행한다. 엔리끄는 여전히 존웨인을 찾으려하지만 끝내 자살하지는 않으며 식당에서본 파시스트들을 처리하는 이상적인 내용이다. 이때 영화는 연극연습에서 엔리끄역을 맡았던 폴이 북극으로 존웨인을 찾으러 떠났다는 편지와 TV에서 아리안느와 당나귀와 함께 북극에서 인터뷰하는 엔리끄의 모습을 통해 연극을 다시 현실세계로 확장시키려는 것 처럼 보인다. 그러나 영화는 재차 확장하기를 거부한다. 연극에서 엔리끄의 역을 맡아달라는 제안에 막스는 거절한다. 장의 희곡은 아직 연극으로 공연되지 않았다. 결정적으로'엔리끄'또는'막스'로 보이던 인물은 자신을 둘중 누구도 아닌 '주앙 데 데우스'로 소개한다. 이때 영화는 연극과 현실의 확장과 축소의 과정을 뛰어넘어 다른 차원에서 북극으로 가는 여정을 초현실적으로 이루어낸다. 아마도 현실의 누추한 인간인 '엔리끄' 나 연극속에서만 신으로 존재할수 있는 '막스'가 북극으로 가는것의 불가능성을 시사하는 몬테이루의 차가운시선이 엿보인다. 북극에 도착했지만 존 웨인을 찾을수 없었다는 사실을 전하는 데우스의 쓸쓸한 발언에도 불구하고 그 대신 사랑을 찾았다는 그의 말에서 미약한 희망이 느껴진다. '존 웨인의 히프' 대신 사랑과 공허함과 순수함이 공존하는 북극의 이미지를 얻은 데우스는 디졸브되는 파시스트들을 뒤로하며 퇴장한다. <존 웨인의 히프>는 꿈에서본 북극에서 히프를 돌리며 걷는 존웨인을 현실에서 실현시키기 위해 연극과 현실의 확장을 다루면서도 그를 뛰어넘어도 볼수없는 '존웨인의 히프'에 대한 몬테이루의 슬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