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멘트
내 인생을 망치러 온 나의 구원자, 나의 엄마, 나의 알마. 이 영화는 마치 유려한 문체의 영미 소설 한 편을 그대로 극화한 듯하다. 대체로 스코어는 온화하고 색채는 낭만적이지만, 레이놀즈의 성향처럼 섬세하고 예민하게 날이 서있는 영화이기도 하다. <팬텀 스레드>는 계급, 인종 등을 함께 다룬 페미니즘 소설 같기도, 혹은 일종의 ‘성장소설(bildungsroman)’ 같기도 하다. 저마다의 입장에 따라 다르겠지만, 필자의 경우 이 영화는 후자로 대했을 때 진정 큰 의미가 다가온다. 학부에서 영미문학을 배웠을 시절 많은 페미니즘 문학을 접했다. 이 영화와 관련해 기억을 스치는 작품은 윌리엄 포크너의 <A Rose for Emily>이다. 여러 페미니즘 문학이 그렇듯 이 소설 역시 연인(경우에 따라 남편)에 대한 살인을 소재로 한다. 간단히 작품 소개를 하자면, 이 소설은 ‘변화’라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여인 Emily가 자신을 배신했던 애인을 독살하고 그 시신이 백골이 될 때까지 자신의 방 침대에 둔 채 함께 했다는 이야기이다. 변화를 받아들일 수 없는 Emily는 애인의 ‘변심’을 받아들일 수 없고 그는 자신과 영원히 함께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그런 살인을 저지른 것이다. 이러한 설정에 대해 그로테스크를 느끼지 않을 사람은 드물 것이다. 실제로 필자는 이 작품의 프레젠테이션을 담당해 Emily라는 인물을 사이코패스로 표현했다. 당시 교수님께서는 그 부분에 대해 이견을 보이셨는데, Emily의 성장 배경을 근거로 들어 그녀를 병리학적으로 볼 수 없다는 것이었다. 사실 그 점에 대해서는 아직도 완전히 동조할 수는 없으며, 이는 남자의 가부장적 성향이 살인의 동기로 정당화되는 ‘페미니즘’에 대해 반감을 갖게 된 이유이기도 했다. 처음 알마가 독버섯을 꺼내들 때 이 영화도 같은 맥락인가 하는 느낌에 뒤통수를 맞은 듯했으나 영화가 끝나갈 무렵 이는 다르다는 확신이 남는다. 그렇다면 영화가 페미니즘보다 더 또렷하게 띄고 있는 주제는 무엇인가? 바로 처음 언급했던 ‘성장’이다. 이 이야기에서 남자 주인공 레이놀즈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이 만드는 의상이 아닌, 엄마와 알마이다. 레이놀즈가 열여섯 살이었을 때 그의 엄마는 재혼에 들었고 그것은 레이놀즈에게 큰 상처로 남았다. 그는 결국 여자를 온전히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이 되어 워커홀릭으로 살아간다. 상처를 갖고 있는 이는 살아가면서 남을 힘들게 만든다. 그간의 여자들은 그런 레이놀즈의 방식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모두 떠났지만 알마는 무언가 달랐다. 그녀는 끊임없이 자신의 주장을 동시에 피력하며 레이놀즈가 ‘권력’을 모두 소유하지 못하게끔 만들었다. 그러자 레이놀즈는 알마에게 가끔 ‘아이 같은’ 모습을 보였다. 이는 모정이 결핍된 남자가 연인을 대하는 방식을 그대로 보여 준다. 발달 심리학적으로 이성 부모의 사랑을 온전히 받지 못한 채 자란 아이는 그 사랑을 나중의 연인을 통해 기필코 충족하려 한다. 이것은 자신의 이성 부모와 비슷한 성향의 사람과 사랑에 빠지는 이유이기도 하다. 레이놀즈 역시 그렇다. 남자와 엄마의 관계는 마치 연인과 같으면서도 그렇지 않기도 하다. 연인처럼 계속해서 싸우기도 하지만 어느 순간 우습게 다시 다정해진다. 그러나 그 과정이 끊임없이 반복된다면 아마도 연인은 버티지 못하고 남자를 떠날 것이다. 이것이 모자 관계와 연인 관계의 차이점이다. 엄마는 그럼에도 어떻게든 자식과의 연을 잇는다는 것이다. 연인은 ‘남’이지만 가족은 그리 손쉽게 연을 끊을 수 있는 관계가 아니지 않은가. 레이놀즈를 포함해 이와 유사한 경험을 한 남자들이 계속해서 연애에 실패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연인에게 마치 엄마의 사랑처럼, 내가 계속해서 그녀를 원망하고 괴롭게 해도 결국은 나를 떠나지 않을, 그런 사랑을 바라기 때문이다. 레이놀즈는 엄마, 즉 여성에 대한 원망을 그녀들에게 못되게 구는 것으로, 그리고 일에 대한 에너지를 쏟으며 연인에게 충분한 사랑을 일부러 주지 않는 방식으로 해소하고 있다. (레이놀즈의 이런 성향에 대해서는 심리학적으로 불량 학생의 폭력성이 그럼에도 친구들에게 사랑받을 수 있다는 왜곡된 방어기제로부터 비롯된다는 견지를 참고할 법하다.) 그리고 실제로 그동안 만나왔던 여자들은 모두 그것을 버티지 못하고 그를 떠났다. 그러나 알마는 달랐다는 것이다. 그녀는 계속해서 꼬투리를 잡았고, 자신의 생각을 꿋꿋하게 언급했으며, 결정적으로 레이놀즈를 떠나지 않았다. (엄마는 그를 떠났다.) 그녀는 레이놀즈에게 자신을 떠나라는 말을 기다렸다고 얘기할 뿐, 그에게 헤어짐을 고하지 않았다. 이것은 분명 레이놀즈에게 알마를 ‘엄마’라는 존재와 동일시하는 계기가 됐을 것이며 그로써 알마에게서 일종의 모정을 느꼈을 것이다. 그러므로 레이놀즈 또한 당연히 그런 알마와 이별하고 싶은 생각이 없다. 시릴이 레이놀즈에게 알마를 정리시킬까 묻는 질문에 레이놀즈는 “왜?”라고 대답한다. 이후 문제의 독버섯이 등장한다. 레이놀즈는 독버섯을 첨가한 차를 마시고 앓아눕게 되고, 그때 그는 방에서 엄마의 환영을 보게 된다. 때마침 알마가 들어오고 엄마의 환상은 사라진다. 이는 엄마와 동일시하던 대상인 알마가 레이놀즈에게 있어 엄마를 대체하는 대상으로 변모하는 순간이며, 머잖아 레이놀즈는 완벽히 회복된다. 그리고 알마에게 처음으로 사랑한다는 말을 건내며 청혼한다. 이것은 레이놀즈가 독버섯을 먹고 죽을 위기에 처했다 회복했듯, 말 그대로 그가 ‘다시 태어난’ 순간인 것이다. 머릿속에 엄마가 존재하는 시점마다 레이놀즈의 옆에는 알마가 있었고, 이제는 비로소 알마가 엄마의 동일시 대상을 뛰어넘어 엄마의 대체자, 나아가 레이놀즈에게서 엄마를 소거시킨 인물이 되고 그로써 레이놀즈는 다시 태어난 것이다. 사실 독버섯을 택한 알마의 결정에는 논란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가 그를 자행한 이후 레이놀즈에게 보인 언행을 따르면 그녀가 실로 레이놀즈를 살해할 목적이 있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녀의 말에 의하듯, 그녀는 정녕 레이놀즈에게 ‘휴식’과 ‘회생’을 선사한 것이다. 이것이 사랑이냐고 묻는다면, 이것보다 사랑 같은 사랑은 없다고 대답할 수 있다. 사실 남녀 사이의 불화는 그와 정확히 비례한 사랑의 반증이다. 사랑하기 때문에 싸우는 것이며, 이들의 사랑은 흡사 살인미수에까지 그치는 전쟁 같은 사랑이다. 이 영화의 두 남녀가 광인처럼 느껴지며 그로테스크하기까지 한 것은 그들의 사랑이 그만큼 강렬하다는 뜻인 것이다. 그러므로 레이놀즈는 끝내 알마와 파혼할 수 없으며 마치 엄마와의 관계처럼 섣불리 연을 끊지 못한다. 사실 상처 입은 자가 성장하기 위해 ‘죽음’ 밖에는 답이 없다는 것은 매우 애잔하다. 그러나 아마도 레이놀즈에게 죽음은 오히려 지긋지긋한 ‘저주’에서 벗어날 ‘축복’이었을 것이며 소생을 위해 피할 수 없는, 기쁜 마음으로 기꺼이 받아들일 죽음이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그는 두 번째의 독버섯을 그것이 독버섯인 줄 알면서도, 그가 싫어하는 버터에 졸인 요리임에도, 마치 엄마의 사랑이 담긴 음식처럼 군말 없이 웃으며 씹어 삼켰다. 필자에게 이 ‘미친’ 사랑의 이야기는 굉장히 흥미롭게 다가왔으며, 심지어 알마의 행적에도 불구 레이놀즈에게 가장 적합한 사람은 알마이며 두 사람의 조화는 더할 나위가 없다는 생각까지 하게 된다. 영화의 제목 <팬텀 스레드>는 여러 가지 의미로 볼 수 있다. 레이놀즈에게 있어 엄마는 자신과 늘 함께하는 ‘팬텀 스레드(phantom thread),’ 즉 유령 같은 옷이었다. 그러나 ‘엄마 같은’ 알마는 레이놀즈의 상처를 대변하는 그 옷을 ‘팬텀 스레드(phantom thread),’ 즉 보이지 않는 실로 완벽히 재봉해 주었다. 이 영화 속 사랑은 현실에서는 도무지 존재할 것 같지 않은 ‘팬텀 스레드(phantom thread),’ 즉 망상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열여섯 살에 멈춰 버린 소년의 성장극으로써 가장 유의미하겠지만, 동시에 이 영화는 문자 그대로 ‘남녀평등’을 보인 양질의 페미니즘 영화이기도 하다.
좋아요 1037댓글 13


    • 데이터 출처
    • 서비스 이용약관
    • 개인정보 처리방침
    • 회사 안내
    • © 2024 by WATCHA, Inc.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