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멘트
Cinephile

Cinephile

8 years ago

3.5


content

버닝

영화 ・ 2018

평균 3.5

2018년 05월 16일에 봄

이창동 감독의 영화 <버닝>은 청년층의 분노와 박탈감을 주된 감정으로 다룬 작품이다. 다만 영화는 단순히 경제적 격차에 따른 분노만을 직접 다루지 않고, 그 열악한 현실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청년층의 발버둥을 소설과 무언극 등 창작의 방법을 통해 풀어내고자 한다. 따라서 이 영화에 대해 관객이 느끼는 호불호의 분기점은 가지지 못한 청년층의 분노를 서술하는 영화의 방법을 어떻게 평가하느냐에 달려 있다. 영화는 세 명의 주인공을 주축으로 진행된다. 분노로 징역형의 위기에 놓인 아버지를 둔 상대적으로 가난한 ‘종수’, 그와 비슷한 처지에 있으며 노을빛에 자신을 사라지게끔 하고 싶은 여자 ‘해미’, 그리고 모든 것을 가지고 있기에 주변을 제물처럼 조작하는 남자 ‘벤’이 있다. 어째서 그렇게 보는 지는 후술하겠지만 영화는 벤과 해미의 사이에서 어떤 극단적 선택을 하고야 만 종수의 이야기를 옮기고 있다. 모든 것을 가진 벤의 신적 유희, 그리고 모든 것이 없거나 시한부에 놓인 해미의 인간적 유희 사이에서 종수가 내린 선택은 해미의 방법론을 결국 따라가되 벤의 현실에서 완전히 떠나지는 않는 것이다. 앞서와 같이 이 영화를 정리하게끔 하는 주된 열쇠는 해미가 말하는 ‘무언극’에서 찾을 수 있다. 그녀는 오랜만에 만난 종수에게 귤을 먹는 무언극을 말하며, 귤이 정말 먹고 싶기에 실제로는 귤이 없다는 현실을 잊는 것이 여기서 중요하다고 말한다. 즉 현실 속의 결핍을 망각하여 자신의 삶을 창작할 발판을 만드는 것이다. 이 무언극의 핵심은 주인공 3인과 영화의 미스터리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이 영화는 어떻게 보면 해미의 이 무언극의 방법론을 통해 종수가 쓰는 소설 혹은 메타포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영화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해미를 논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그녀가 반라로 촬영된 장면의 촬영에서 유추되듯 이 영화가 아름답게 생각하는 방법론을 체득한 사람은 해미이고, 종수는 뒤늦게 그녀의 이 방법을 비슷하게 따라가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해미는 무언극, 부시맨, 우물 등 많은 이야기로 자신의 처지를 은유하는 인물이다. 그녀의 이러한 이야기들은 자신의 현실 속 결핍을 망각하려는 일종의 변주된 무언극이라고 볼 수 있다. 예컨대 우물 이야기는 그녀가 카드 빚 때문에 집에서 도망친 신세임에도 성형과 아프리카 여행 등을 통해 현실에서 탈출하고 싶은 열망을 상징한다고 읽힌다. 그 이야기에서 종수는 그녀에게 구원자가 된 특별한 존재이기에, 이를 듣고 그는 해미에게 특별한 애착을 가진다. 하지만 해미는 종수와 달리 물질적 열등감이 없기에, 타인의 도움 없이도 그녀는 스스로 자신의 헝거를 인식한다. 이렇게 종수가 해미를 자신의 특별한 피보호자로서 인식했지만, 해미는 종수를 특별한 동지로 이해했다는 점에서 둘의 사랑은 결실을 보지 못한다. 해미는 그렇게 다른 도움 없이 현실 속의 자기 결핍을 스스로 불사른다. 하지만 그녀는 이러한 현실 도피로 자신을 마냥 채워나갈 수가 없다. 언젠가 카드 빚이나 가족과의 단절 등 그녀가 계속 잊으려 하는 현실의 결핍이 숨통까지 차오를 것이다. 따라서 그녀가 노을빛에서 자신이 사라졌으면 좋겠다고 읊조리는 것만큼은 그녀에게 거짓이 아닌 절박한 진실이다. 그녀는 약의 기운에 취해 반라의 춤을 추며, 소원대로 현실 속 자신에 대한 인식을 잠깐이나마 스스로 완전히 소거시킨다. 이후 벤의 언급대로 그녀가 연기처럼 사라졌다는 것은 악행의 메타포일 수도 있지만, 세상 자체를 미스터리로 이해하는 영화의 입장에서는 그녀의 소원이 그대로 이루어진 것이다. 현실에 기반하지 않은 그녀의 무언극이 이미 그녀를 현실에서 충분히 멀어지게끔 만든 이상, 종수의 창녀 발언은 그녀가 궁극적으로 세상을 떠나게끔 만든 사소한 방아쇠였을 것이다. 그녀가 굳이 종수에게서 열등감을 확인하고 실망한 것이 아니었더라도, 어차피 그녀의 창작은 언젠가 그녀를 현실에서 지워버리게 되어있다. 벤은 그녀와 달리 모든 것을 가졌기에 오히려 결핍을 이해할 수 없는 남자다. 그에게는 결핍이 없기 때문에 소거할 것이 없고, 소거할 것이 없기 때문에 해미처럼 절박하게 창조할 이유가 없다. 그는 해미와 종수가 느끼는 이 세상의 미스터리를 짓궂게도 그의 유희를 위해 실재하는 돌멩이 하나로 보여줄 수 있다. 또한 그에게는 창작의 작업이 아닌 직접 자신의 힘으로 주변을 ‘제물’로 만들 역량이 있다. 모든 것을 가졌다는 점에서 그는 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신적 존재이며, 본인 역시도 자신을 선택받은 신적 존재라고 여기는 듯하다. 벤의 그러한 인식은 그가 종수에게 말하듯 자신이 어디에나 있다는 동시 존재성에서 유추 가능하다. 약육강식과 같은 자연의 섭리에서 보면, 벤은 영원히 살아남을 것만 같은 존재이고 종수처럼 버려진 비닐하우스 같은 사람들은 벤에 비하면 도태되어야 하는 존재들이다. 또한 그러한 섭리는 반드시 벤을 통해서가 아니라도 다른 누군가를 통해 어디에나 자행되는 것이다. 따라서 메타포로 말한다면 벤은 정말로 어디에나 존재한다. 해당 씬에서 종수가 다소 격앙된 반응을 보이는 것은 자신이 버려진 비닐하우스 같은 계급에 있다는 점을 잘 알기 때문일 것이다. 직접적인 방법으로 도태되지 않더라도, 종수는 언젠가 어떤 곳에서든 벤과 같은 존재들이 그에게 안기는 열패감에 의해 소거될 운명에 있다. 또한 벤에게 현실의 결핍이 없다는 점은 영화의 관점에서 보면, 그가 삶의 희열을 찾기 위해 억지로 주변을 유희의 소재로 만들게끔 하는 동기가 된다. 앞서 적었듯 그는 해미처럼 창작할 이유도 없지만, 결핍이 없기에 그녀처럼 스스로 창작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하기에 벤이 말하는 해미의 실종은 정말로 그의 물리적 위력이 발휘된 살인 행위를 은유한 것일 수도 있다. 또한 이러한 맥락에서 벤의 최후를 바라본다면, 종수가 벤을 칼로 찌를 때 벤의 마지막 표정은 그가 느껴보지 못한 희열을 처음으로 접한 감사함의 표시일지도 모른다. 영화의 관점에서 벤의 죽음은 창작의 바탕이 되는 결핍을 목숨으로 얻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영화의 접근은 과거 신화들부터 줄곧 등장하는 모티프, 즉 영생하는 신적 존재가 유한한 인간의 생명을 오히려 욕망하는 모습과 비슷하다. 물론 뒤에 적겠지만 이 부분은 현실이 아닌 종수의 소설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현실을 빗댄 메타포 그 자체인 이 영화에서 그 진위는 사실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 종수는 앞서 적은 두 인물과 이미 닮았으며, 또 한편으로 그들을 닮고 싶어 한다. 이 점은 벤에게서 그의 악취미를 들은 이후 종수가 꿈에서 어린아이의 고양된 시선으로 불타는 비닐하우스를 바라보지만, 현실에서는 그가 그 꿈과 상반된 행동을 한다는 점에서 유추될 수 있다. 그의 아버지가 어머니의 옷을 태워 그녀를 지우려 한 것처럼, 꿈속의 종수는 버려진 비닐하우스 같은 자신의 현실 또는 비슷한 처지의 타인을 벤처럼 우월한 지위에서 소거시키고 싶은 본능을 지녔다. 하지만 현실의 종수는 막상 잠에서 깬 이후, 주변의 버려진 비닐하우스의 상태를 확인하려 할 뿐이다. 이는 벤과 나눈 대화에서 화를 낸 이유처럼, 종수는 현실 속의 자신이 해미처럼 버려진 열등한 계급의 일원에 불과하다는 점을 잘 알기 때문이다. 그는 버려진 비닐하우스에 라이터로 불을 지펴 보다가 금방 불씨를 꺼버리는데, 이는 아직 해미와 벤 사이에서 삶의 방법을 택하지 못한 종수의 이중적 위치를 나타낸다. 이처럼 종수는 계급적인 열등감에 사로잡힌 인물이지만, 이 영화에서 종수는 그러한 인물상을 다룬 다른 영화들과 달리 지극히 평범한 동기로 움직인다. 적어도 초반에 그가 해미에게 집착하게 되는 계기는 우물 이야기에서 자신이 그녀의 구원자라는 사명감에서 비롯된 것만은 아니다. 섹스에 어설픈 모습으로 유추되듯, 그가 경험이 없는 편인 가운데 해미와 섹스를 했다는 쾌감이 오히려 주된 동기에 가깝다. 영화는 해미와 종수의 섹스에 찰나의 햇빛을 허락하며 그 특별한 의미를 강조한다. 따라서 해미와 함께 케냐에서 찾아온 벤에게 종수는 자연스럽게 열등감을 느낀다. 벤은 시작부터 종수의 트럭 안에서 그의 어머니와 통화하며, 집 나간 어머니를 둔 종수의 심기를 건드린다. 노는 것이 직업이라는 벤이지만, 식당 밖에서 종수는 자신의 트럭과 비교되는 스포츠카를 보고 자존심에 상처를 입는다. 벤과 부유한 친구들에게 비웃음을 사는 해미를 보고 클럽을 나오는 종수의 심경은 비록 우스꽝스럽고 구슬픈 송아지 동요로 대변된다. 종수는 벤에게 그나마 자신이 소설가 지망생이라고 일말의 자존심을 밝히지만, 사실 비슷한 처지의 해미와 달리 그는 최소한 영화의 초반부에서는 창작할 줄 모른다. 그는 결핍을 모르는 벤과 다른 위치에 있지만, 그렇다고 해미처럼 현실을 '스스로' 망각할 수도 없는 처지에 있기 때문이다. 종수에게 현실은 스스로 잊기에 너무나 무거운 존재이다. 종수는 당장 아버지를 구하기 위해 그는 동네 사람들에게 탄원서를 받아야 하며 자신에게 남겨진 소 한 마리도 대신 키워야 한다. 집안의 사진들로 유추되듯 그의 아버지는 한국 현대사의 풍파 속에서 나름대로 열심히 살았지만, 아마도 자존심의 상처로 욱하여 공무원을 폭행했고 그로 인해 징역형을 살 위기에 놓인 인물이다. 아버지의 처지도 억울하고 무거운데, 불공정해 보이는 세상의 작동 원리도 종수에게는 너무 납득하기가 어렵다. 종수 부자는 나름대로 열심히 살았지만 세상에 굽힐 줄 모른다는 이유로 자존심이 있거나 고집이 세다고 불린다. 그런데 그 세상은 청년 실업이 만연하고 물류센터 알바부터 군대처럼 부당하게 돌아가는 곳이다. 종수 아버지는 강남에 투자하지 않고 농사를 지었다고 그 지경에 왔으며, 계급 갈등이 담긴 용산 참사는 벤의 가족이 우아하게 식사하는 배경에 불과한 곳이 이 세상이다. 그러한 현실이기에 종수는 자연스레 벤에게서 열등감을 느끼고, 점차 자기가 처한 현실을 해미처럼 망각하려 들기 시작한다. 종수의 꿈에서 그가 저수지의 벤 뒤로 언덕 아래에서 슬며시 서는 모습은 이를 나타낸다. 현실에서 열심히 인생을 산 아버지와 자신은 그 지경에 있는데, 이 노는 것이 직업이라는 벤은 재력과 교양 그리고 화목한 가정까지 지녔고 자기가 사랑한 해미도 만나는 남자이다. 이러한 그의 계급적 열패감은 해미의 실종을 기점으로 폭발한다. 종수에게 해미는 그가 우물에서 구원해야 할 여자이고, 그녀는 벤의 언급대로 종수가 유일하게 벤보다 우위에 있는 특별한 존재이다. 따라서 그는 해미의 실종이 벤과 연관이 있다는 집착적인 확신으로 그를 미행한다. 소설가를 지망하는 종수는 벤을 미행하며 자신만의 소설, 즉 벤이 살인범이고 자신이 해미의 복수를 하는 소설을 쓰기 시작한다. 영화는 해미의 동료가 찬 같은 모델의 시계와 우물 이야기에 대한 서로 다른 증언을 보여주며, 종수의 이 소설은 현실에 바탕을 둔 것이 아닐 수도 있음을 넌지시 말한다. 특히 이 시점에서 보이지 않던 고양이가 종수에게 보인 듯한 영화의 연출은 종수가 바라보는 사실이 그가 쓴 소설에 불과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초반부 현실에 매몰되어 있던 종수는 전적으로 해미의 말을 믿고 있었기 때문에 망각의 대상이 되어야 할 고양이의 부재 자체를 인식할 수 없다. 그에게 고양이는 해미 말대로 당연히 있어야만 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즉 영화의 시선에서 그때의 종수는 아직 창작할 수 있는 마음을 갖추고 있지 않았다. 그에 반해 후반의 종수는 이미 우물 이야기 등을 통해 해미의 말들이 사실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선 상태이다. 게다가 고양이를 벤의 집 주차장에서 발견할 때, 종수는 그의 화장실에서 해미에게 선물한 같은 종류의 시계를 먼저 보았다. 종수는 벤을 살인범으로 그리는 소설을 쓰고 있었기에, 벤이 해미를 죽인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현실적인 생각은 그의 머리에서 잊혔다. 그러한 현실의 망각이 갖춰졌기에 종수의 소설은 창작될 수가 있고, 이를 따르는 영화의 시선에서 그 고양이는 종수에게 보여야만 하며 이름은 '보일이'가 되어야만 한다. 또한 해미가 말한 우물의 진위 역시도 고양이와 마찬가지의 역할을 한다. 종수의 어머니는 염치 없이도 그에게 돈을 말하려고 오랜 시간 후 돌아온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녀는 비록 마른 우물이지만 그에게 우물은 있었다고 말한다. 하지만 해미의 어머니는 종수의 어머니와 달리 우물이 없었다고 말한 바가 있다. 해미의 어머니가 우물을 부정한 것은 그녀가 해미처럼 창작으로 현실을 탈출하지 않고, 현실에 순응하며 초반부의 종수처럼 살고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그러하다면 종수의 어머니는 해미처럼 거짓을 창작하며 사는 사람이라는 점에서 그녀의 돈 얘기도 어떤 창작에 불과할지 모른다. 그게 아니라면 그녀의 갑작스러운 등장부터 이 부분은 종수가 자신의 범죄를 정당화하기 위해 쓰고 있는 소설의 일부였을지도 모른다. 이로써 현실과 괴리된 분노로 가득한 종수는 해미의 무언극처럼 자기 뜻대로 이뤄질 궁극적인 창작을 도모한다. 그의 아버지도 이미 징역형을 선고받고 그를 떠났으며, 남은 소 한 마리도 팔아버렸기에 종수를 현실에 묶어 둘 제약은 남아있지 않다. 여기서 영화는 해미의 방에서 마지막으로 소설을 쓰는 종수의 모습을 비춘 이후, 벤이 새 여자를 제물에 걸맞게 화장시키는 모습과 종수에게 소거되는 벤의 최후를 비춘다. 장면들 사이 몽타주를 생각하면 벤의 최후가 현실인지 아니면 종수의 소설 속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하지만 이는 영화에게 별로 중요하지 않다. 어차피 종수의 이 결정은 해미를 매개로 한 그의 자위에 지나지 않는다. 영화에게 더 중요한 것은 앞서 적은대로 지배자의 위치에 있는 벤이 가진 그 관념의 반대편에서 종수가 가지게 된 저항적인 관념이기 때문이다. 종수는 앞서와 같은 뜻으로 현실 혹은 소설에서 자신의 열등감을 상기시키는 벤을 살해하고 불태운다. 그는 벤의 위력에 한편으로 감화되는 본능을 지녔지만, 결국 벤과 그의 계급적 상징인 스포츠카를 불길에 소거시키며 전라의 상태로 해미의 방법을 따라간다. 여기서 종수가 전라인 것은 자연에서 스스로 사라진 반라의 해미와 달리, 종수가 자기 자신이 아니라 열등감의 원천인 타인을 소거시키는 극단적 방법을 택했기 때문이다. 즉 종수의 동기는 남에 대한 계급적 열등감에서 비롯된 것이므로, 그는 상대적 격차를 상기시키는 자신의 모든 옷을 태워야 열패감을 모두 잊고 자연의 모습으로 돌아갈 수 있는 것이다. 이로써 종수는 자신의 깊은 열등감만큼 극단적인 방법의 망각을 택함으로써 비로소 자기 뜻대로 삶을 창작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트럭 창문에 서린 김으로 가려진 그의 모습은 이 창작 역시도 해미처럼 그를 점차 현실에서 지울 것임을 불길하게 암시한다. 종수의 최종 선택은 결국 그의 아버지가 걸었던 길을 숙명처럼 답습한 것이기 때문이다. 종수의 이 마지막 선택에 관해 좀 더 생각하면, 그의 결말은 해미의 방법을 지향하면서도 벤이 지배하는 현실에 남아서 저항의 창작을 이어가는 나름 중도적인 방법을 택한 것으로도 볼 수 있다. 이러한 결말은 본능보다는 경제적 계급의 연대를 택하겠다는 일종의 정치성을 창작에서 부정하지 않는다는 의미가 될 것이다. 그렇다면 이는 감독 개인의 실제 정치적 경력과도 일맥상통하는 흥미로운 선택이다. 즉 영화의 결말은 세계를 직접 조작하는 재력과 권력 등의 위력에 이끌리는 평범한 인간을 인정하면서도, 결국 계급적 연대를 택했다는 점에서 자신의 예술적 방법이 지닌 정치성을 부정하지 않는 감독의 태도를 보여준다. 세상에 굽히지 않는다는 종수 부자의 자존심은 곧 감독 본인의 예술적인 자존심이기도 한 것이다. 하지만 여기까지 설명한 것과 같이 이 영화의 겹겹이 쌓은 메타포들과 참조들, 그리고 그것들을 한곳에 모두 모으고도 나름대로 자연스러운 이 영화의 완성도를 나로서는 사뭇 당연하게 칭찬할 수 있으면서도 또한 한편으로는 이 영화의 그 방법론 자체에 대해서는 선뜻 공감하기 어렵다. 왜냐하면 이 영화가 수많은 메타포로 가득하단 것은 이 영화가 명목상 다루고자 했던 어떤 저항적인 정서의 전달이란 목적에 치중한 결과가 아니라 오히려 그 방법론에 새겨진 지식인의 유희에 작가가 더욱 홀린 것이 아닌가 하는 아쉬움이 남기 때문이다. 앞서 적었듯이 이 영화의 주된 감정은 젊은 세대, 특히 종수처럼 상대적으로 열악한 처지에 속한 젊은이들이 지닌 분노와 박탈감이라고 할 것이다. 그 절망에 대한 반응으로 영화는 ‘없다는 사실을 잊는 것’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해미처럼 현실에서 완전히 도피하거나 혹은 종수처럼 현실적 고려 없이 세상을 거부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이를 이상적인 아름다움으로 표현한다. 즉 영화가 제공하는 젊은 세대의 구원론은 애초에 없다고도 할 수 있으며, 있다고 해도 그것은 매우 덧없고 절망적인 방법들밖에 없다. 곧 이 영화를 통해서 젊은 계층은 종수가 벤에게서 느꼈던 것처럼 현실에 실존하는 박탈감을 상기하는 것 이상으로 나아가기 어렵다. 영화 속 비유로 말하자면, 관객은 자기 귤이 없다는 점을 강하게 상기할 수 있을 뿐이다. 그 이후 귤의 창작은 정작 현실에 통용 불가능할 절망적인 이야기에 불과하다. 이 영화는 관객의 그 박탈감을 상기시키기 위하여 무언극 등 수많은 메타포의 표현 수단들을 활용한다. 관객은 눈앞의 장면이 현실인지 메타포인지 양자택일의 해석 과제를 단계마다 부과받는다. 그러나 그 수많은 메타포의 표현 형태를 해석하는 일은 보통의 대중에게 실질적인 가치를 주지 못하는 어떤 지적 유희에 불과하다. 특히 이 영화가 공감하려는 현실 속 보통의 사람들은 이 영화의 분노와 박탈감에는 바로 공감할 수 있지만, 다량의 메타포는 이들에게 해석 과제를 빈번하게 부과하며 이들이 오히려 그 감정에 직면하는 과정을 방해한다고도 볼 수 있다. 게다가 그 지난한 해석 과정을 거쳐 관객이 도착할 종착지는 정작 현실을 버티는 사람들이 잊고 싶은 극도의 박탈감을 상기하는 슬픔이다. 그렇다면 이 다량의 메타포는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인가 의문스럽기도 하다. 진정 젊은이를 위한 것인지 아니면 그들을 이해한다고 믿는 성인의 지적 유희인지 말이다. 특히 영화는 여자의 나체와 섹스를 다소 낡은 예술적 선택임에도 굳이 영화의 아름다운 상징으로 채택하고, 부시맨이나 무언극 등 현재 대한민국의 실제 20대가 즐겨 사용하지 않을 이질적인 은유들과 함께 어색한 문어체 대사들을 남용한다. 또한 여성 인물의 사용도 영화에서의 그 역할과 기능을 생각하면, 감독에게 과거에도 비슷한 이유로 가해졌던 그 비판적인 시각에서 완전히 자유롭지는 못하다. 영화의 이처럼 아쉬운 접근을 생각하면, 현재 젊은 관객의 입장에서 보면 과연 이 영화가 이 시대의 젊은 계층에게 얼마나 진정으로 공감하려 했는지를 의심하게 만든다. 나아가 영화의 근본적인 관점에도 필자는 선뜻 동의하기 어렵다. 이 영화의 세계관은 영화 안에서 짙게 보여진 사회적 계급 사이의 여러 갈등 등에 비추어 보면, 감독의 사회적인 예술론이 이 영화에 강하게 반영되어 있다고도 볼 수 있다. 거기서 한국의 청춘은 카드 빚을 내면서도 거액을 들여 아프리카는 꼭 가야만 하는 현실 도피의 여인이거나, 자신에게 계급적 열패감을 상기시키는 부르주아를 불길에 소거시키는 분노한 남성이다. 게다가 그 남성은 숙명처럼 아버지의 뒤를 따른다는 점에서 구원의 여지도 없다. 영화가 말하는 개인의 자존심을 보존한다는 전제에서 본다면, 이 영화의 세계관 안에서 젊은이들은 혁명하거나 아니면 사라지거나의 기로에 있다. 둘 다 거부한다면 그들은 영화 속 변호사처럼 자존심을 자연스레 굽힐 줄 알아야 하며, 이는 이 영화의 시선에서는 부끄러운 평가 대상인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러한 사회적 여건에 있다고 해서 그들에게는 현실을 망각하여 얻게 되는 일시적 구원만이 존재한다고 영화처럼 말할 수 있을지가 의문스럽다. 과연 그 현실에서는 지속 가능한 삶의 방식이 허용될 수 없는 것일까? 그에 대한 대답으로 우리는 예컨대 마이크 리 감독의 경우처럼 노동자 계급의 결핍 속에서도 희망을 찾는 일을 경시하지 않는 여러 사회적 영화를 얼마든지 상기할 수도 있다. 감독의 세계관에서 시상은 시인에게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시인이 직접 찾아가야 하는 행동의 문제이다. 하지만 시상은 시인에게 직접 찾아올 수도 있으며, 시상을 찾으러 다니지 못할 현실의 시인이 앉은 자리에서도 시상은 허용된다. 그 취지로 생각건대 이 영화가 제시하는 염세적 세계관은 진정으로 현실을 사는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거리감을 갖고서 현상을 지적하는 것에 그치는 누군가의 예술적 야망이 아닌지 의심스럽다. 만약 그렇다면 설사 완성도가 뛰어나도 스크린 밖의 현실을 사는 사람들을 위하는 영화가 되진 못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