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애솔킴

세계 끝의 버섯
평균 3.9
별 재미가 없어서 반쯤 읽다가 유기하게 되었지만, 반성하는 의미에서 조금 긴 감상을 ================== 진보와 성장은 목표를 전제로 한다. 그리고 대체로 목표는 올바라야 하고 올바른 것으로 이해된다. 그러니까 특정한 목표를 성취하기 위해 계획하고 조직하고 준비하고 실행하고 노력하고 투쟁하고 분투하여 거기에 조금이나마 가까워졌음을 숫자적으로 증명하는 것. 이게 진보와 성장이고, 현대 사회가 바람직하다고 권장하는 삶의 표준적인 모습일 것이다. 그리고 그런 표준적인 삶의 모델을 널리 퍼뜨리기 위한 조직화가 바로 푸코가 말하는 권력의 거미줄이다. 하지만, 모든 규정이 계약서가 법률이 매뉴얼이 계획이 그렇듯이 그건 현실에서 일어나고 있는 상황을 제대로 반영할 수 없다. 그건 데리다가 말했듯이 처음부터 불가능한 목표다. 단지 규정을 디자인한 사람의 원래가 무엇이었는지, 그리하여 도중에 우리가 길을 잃었을 때 어디로 가야하는지 혹은 우리가 넘어서는 안 되는 경계가 무엇인지를 사후적으로 확인하는 기능만을 수행할 수 있을 뿐이다. 그것도 오래 고민하고 상대방을 이해하려는 모든 노력 끝에 정성들여 만들어진 법률/계약/규정이라야 그런 반쪽짜리 기능이나마 수행할 수 있을테다. 오히려 현실 세계는 규정과 매뉴얼의 빈틈에서 작동한다. 유연성은 적응력은 생명력은 변화는 창조는 모두 거기에서 발현된다. > 이에 대한 추천도서는 <국가처럼 보기> 그러니까 어떤 모양의 숲이 올바른, 바람직한 상태인지 즉 숲의 이데아가 무엇인지 인간은 알 수도 없고, 심지어 알 필요도 없다. > 이게 바로 어쩌면 이제나마 조금은 지혜로워진 포스트모던-생태주의의 관점이라고 난 이해한다. 그리고 당연히 거기서 무엇이 발현될지 역시 지금 거기서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로썬 도무지 알 수 없다. 하지만 무언가가 단단히 잘못되어 가고 있다는 느낌적 느낌에 자꾸 빠지게 되는 건 내가 나이를 먹었기 때문이라고 하자. 아마 포스트모던-생태주의자는 내가 아직도 모더니즘적인 시각과 관점을 유지하기 때문에 나오는 부작용 또는 망상에 불과하다고 할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여전히 난 그래서 무엇을 해야 돼? 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찾고 싶어하는데 찾을 수가 없다. 왜냐하면 난 뚜렷한 목표 없이 살았다가 어느 순간 아 이게 아니었구나라는 후회를 안고 살고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