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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라의

김라의

5 years ago

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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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브 생 로랑에게

책 ・ 2021

평균 3.7

파스칼은 자신의 작품을 그 무엇보다 사랑했던 몽테뉴를 비난하지요. 그러나 몽테뉴가 옳았습니다. 당신을 살아 있게 했던 것, 아주 어린 시절부터 시달려온 불안에서 당신을 구해준 것 역시 다름 아닌 당신의 작품이었으니까요. 그렇게 예술가는 오로지 창작을 통해서만 구원과 희망의 이유를 발견합니다.14p 이 편지도, 앞으로 쓸 글들도 네가 읽을 수 없으리라는 사실을 잘 알아. 그러나 상관없이 써볼 생각이야. 결국 혼잣말에 지나지 않게 되더라도 말이지. 이 편지는 온전히 너를 향한 것. 우리의 대화를 이어나가는 방법이자 너에게 말을 거는 나의 방식이니까.듣지도 답하지도 않을 너에게. 17p 너를 떠나려고 노력도 해보고 다른 곳으로 가고 싶은 적도 있었지만, 매번 모든 길이 너에게로 이어졌어. 그건 너도 마찬가지였고, 그러면서도 우리는 늘 질투심에 시달렸지. 이해하기 어려운 관계였어. 그러나 누군들 이해할 수 있으며, 이해할 만한 것이란 또 무엇일까? 나는 회사 때문에 너를 떠나지 못했다고 말하곤 했지만, 그건 사실이 아니야. 내가 너를 떠나지 못했던 건 그게 불가능했기 때문이지.30p 언제나 너의 부재에 부딪치게 돼. 그 부재가 언제 어디서나 나를 엄습해.너는 어디에나 있고, 또 그대로 머물러 있지.71p 다시 한번 네가 이곳에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지를 생각해. 그러나 내가 떠올리는 것은 내 젊은 시절 속 이브야. 언제든 나설 준비가 되어 있고, 유연하고, 지적이며, 빛나는, 모든 것을 자유롭게 사랑하고,언제나 기꺼이 감탄할 준비가 되어 있는 너. 능력을 채 다 펼치기도 전에 술과 약으로 쇠잔해진 너나 늘상 툴툴대고 꽉 막힌, 기쁨도 욕망도 소거된 비극적인 역할 뒤에 숨은 말년의 네가 아니라. 젊은 시절의 너와 닮은 구석이 조금도 없는, 그저 타인으로부터 스스로를 지키기 위한 갑옷에 불과한 그 존재가 나는 싫었어. 그러나 너를 사랑했기에 그를 받아들였지. 그리고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네가 그 역할을 수행하도록 도왔어. 너의 변화를 조금도 막지 못한 채, 나는 내 감정을 다른 이들과 나누었고, 더는 흥미롭지 않은 삶에서 점차 멀어지는 너에게도 익숙해져갔어. 그렇다고 슬픔 없이 이 글을 쓰는 것은 아니야. 네가 큰 고통 속에 있다는 것을 늘 알고 있었으니까. 네가 그렇게 말했고, 나는 믿었지. 슬픔의 석양이 네 얼굴에 내려앉은 마지막 몇 해는 감당하기 어려웠지만, 그럼에도 나는 무엇이든 해야했어. 그래서 모르는 체했지. 슬픔은 그 자리에, 매 순간 존재했고 사그라드는 법이 없었어. 그 우울. 너를 좀먹는 우울증은 너와 가깝게 지낸 이들에게까지 가닿을 정도였지만, 그들은 저만치 떨어져 있었기에 너는 알아챌 수 없었지. 누군가는 넘치도록 노력을 기울이기도 했고, 누군가는 무슨 일이 되었든 네가 삶에 조금이라도 발을 붙이게끔 은밀히 유도하곤 했지. 하루하루 어리석기만 한 삶일지라도 말이야. 그나마도 너는 해내지 못했어. 대신 폭식증과 끔찍한 식탐으로 도망쳤지. 한때는, 문자 그대로 스스로의 육체를 자랑스러워하던 너였기에 넌 무너지는 네 몸을 증오하기시작했어. "나 괴물이 된 것 같아." 내게 했던 그 말은 사실이었어. 네가 그토록 교모히 즐기던 마조히즘이 자행한 복수였지. 수년에 걸쳐 너를 무너뜨린것은 바로 그 마조히즘이었어. 처음에는 술과 약으로, 그다음엔 음식으로, 네 식탐의 많은 부분이 나를 공격하기 위한 것이었다는 거 알아. 마치 내게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거든. "당신이 나를 발가벗기고 나에게서 술과 약을 빼았아 갔으니, 나 자신에게 복수할거야." 네가 몰랐던 것은, 그 첫 희생자가 다름 아닌 너였다는 사실이야. 너는 어린아이 같았어. 유치한 전략이었지. 나는 그런 너 역시 사랑했어. 84p 작품에 대한 확신을 대체 어디서 얻는지 묻는다면, 나도 잘 모르겠어. 하지만 어떤 확신이 내 안에 닻을 내려. 나는 심지어 이 취향이 어디서 온 것인지도 모르겠어. 왜냐하면 나에게 영향을 끼친 사람을 없으니까. 내 가족은 그 어떤 장르의 예술에도 관심이 없었고, 알지도 못했어. 그저 흉측한 가구들, 탁자들, 물건들에 둘러싸여 지냈지. 결국 나는 책으로 도망쳤어. 미술관에 다닐 때도 별다른 대단한 것을 느끼지는 않았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아마도 베르나르 뷔페와의 만남이 결정적이었던 것 같아.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르겠군. 아무튼, 어느 날, 신을 만난것처럼, 낯선 언어로 말을 할 수 있게 된 것을 깨달은 사람처럼, 내가 알고 있다는 걸 알게 된 거지. 바로 그때 너를 만났고 말이야. 나는 늘 우리의 만남이 우연이 아니라고 생각해. 너는 내 말을 들었고, 모든 방면에서 나를 맹목적으로 신뢰했어. 또한 내 시각을 더 날카롭게 벼리고, 내 취향을 예리하게 다듬고, 무엇보다 나 자신을 발견하게 해줬지. 오브제들, 특히 그림들 사이에서 나는 나 자신을 발견했으니까. 좀 이상한 일이긴 해. 나는 작가는 아니지만 책을 몇 권 썼고, 음악가는 아니지만 바이올린을 배워서 악보를 읽어낼 수도 있었지. 하지만 회화나 소묘를 배운 적은 전혀 없었거든. 그럼에도 나를 가장 감동시킨 것은, 또 나를 행복하게 하는 것도 바로 회화였어. 때때로 학교에서 예술사를 공부하지 않은 것이 후회가 돼. 그랬다면 뭔가 달라졌을까? 아마 그림을 더 좋아하거나 덜 좋아하게 되지는 않았었을 것 같아. 나는 언제나 교육적인 문화나 그 비슷한 것은 모두 싫어했으니 말이야. 무언가를 사랑하기 위해서는 우선 모두 잊어버려야 해. 그게 내가 끝없이 행한 일이었어. 90-91p 책을 읽다보면 프랑수아즈 사강 , 앤디워홀 같이 내가 아는 사람들 이름이 나온다. 심지어 이들은 지인이다. 이런 사람들과 대화를 주고 받는다면 서로에게 얼마나 좋을 영향을 끼칠까. 책에는 퐁피두센터, 세비야 등 내가 가본 곳들이 나온다. 나는 퐁피두센터에서 앙리마티스의 작품을 보고 그 앞에서 울었던 경험이 있다. 눈물은 꽤 오랫동안 멈추지 않았다. 단순히 마티스가 유명해서라기보다는 그림이 너무 고독하고 외로워보였다. 인터넷에서 저장한 사진과는 감히 비교할 수 없다. 영화관, 서점과 마찬가지로 전시회에 가면 내 자신이 텅비어있음을 느낀다. 그 당시에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거기에 집중한다. 그러면 어느 순간 마음의 동요가 생긴다. 작품 속의 향수는 나에게로 와서 잔향이 된다. 그 잔향은 지속적으로 나를 따라다닌다. 이게 내가 이 모든 것들을 좋아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