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양기연

움베르토 D
평균 3.9
침범당하는 공간, 그 위 외로운 노년의 초상. . (2015.1.4.) (스포일러) . <움베르토 D (Umberto D.)>는 이탈리아 네오리얼리즘의 거장으로 유명한 비토리오 데 시카 감독의 1952년작이다. 이탈리아 네오리얼리즘 영화들이 대개 그렇듯 이 영화 역시 당시의 로마 현지 풍경을 배경으로 비전문 배우들로부터 삶의 경험이 녹아 있는 연기를 끌어내며 현실을 있는 그대로 조명하고자 한다. 그러나 비토리오 데 시카는 단순히 ‘그대로 보여주는 것’ 이상으로 영화적 언어를 통해 그러한 현실을 더욱 부각시키는 방법을 알고 있는 듯하다. . 영화의 첫 쇼트는 공무원 연금 인상 시위를 벌이고 있는 노인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러나 모두가 한 마음인 듯 보였던 그 시위대는 경찰의 진압에 너무나도 쉽게 흩어지고 만다. 첫 쇼트에서 익스트림 롱쇼트에 가깝게 군중을 비추던 카메라는 이제 골목으로 도망친 몇 명의 노인들만을 비춘다. 이때 카메라는 노인 한 명, 그리고 다른 노인 두 명을 쇼트-역쇼트의 방식으로 번갈아 보여준다. 홀로 프레임을 차지하는 노인 한 명은 허가증을 받지 않았다는 이유로 주동자들을 비난한다. 함께 프레임 안에 잡히던 두 노인 중 한 명이자 영화의 주인공인 움베르토가 자신의 빚을 갚기 위해선 연금이 인상되어야 한다고 말하자, 다른 두 노인은 자신들에겐 빚이 없다고 말한다. 응집된 집단처럼 보였던 군중 내의 이질성이 드러나는 것이다. 움베르토는 자신과 함께 프레임 안에 들어와 있던 노인과 함께 골목을 나서서 대화를 나누다가 시계 구입을 권한다. 그러자 그 노인은 집에 다 왔다고 거짓말을 하며 움베르토를 남기고 떠난다. 이제 움베르토는 자신이 끌고 다니던 개 플라이크와 함께 외로이 남게 된다. 시작한 지 몇 분도 채 지나지 않은 그 짧은 시간 동안, 영화는 군중에서 시작해 움베르토와 플라이크만이 남는 시점에 이르기까지의 시퀀스에서 계속해서 프레임 안의 인물들을 덜어내는 과정을 거친다. 앞으로 움베르토가 거쳐야 할 일들이 얼마나 외로운 길이 될지 오프닝 시퀀스에서부터 미리 암시하고 있는 셈이다. . 이후 영화는 크게 움베르토가 집안에 있을 때와 집밖에 있을 때, 두 갈래로 진행된다. 우선 움베르토가 집밖을 돌아다니는 경우에는, 움베르토가 어떤 인물과 조우해 한 프레임 안에 담겼다가 쇼트-역쇼트를 몇 번 거친다거나, 혹은 특정 인물과의 유사점을 부각시키는 몽타주를 거치는 과정이 반복된다. 무료 급식소에서 그의 편을 들어주던 노인은 시계를 산 뒤 거리에서 다시 구걸을 하기 시작하며 움베르토에게 빨리 가라고 인사 아닌 인사를 한다. 병원에서 움베르토가 오래 머무는 것을 돕던 옆 자리 환자도 퇴원 시점에서 움베르토와 한 번 악수를 나누고 헤어진 뒤에는 다시 등장하지 않는다. 움베르토가 거리에서 만나는 또 다른 걸인은 그의 쇼트와 움베르토의 반응 쇼트를 통해 움베르토가 구걸을 고민하는 가장 큰 동기로 작용하지만 정작 움베르토와는 별 교류가 없다. 움베르토가 플라이크를 찾기 위해 개 보호소를 찾는 씬에서도, 영화는 플라이크를 찾아 헤매는 움베르토의 쇼트와 개를 찾고 싶으나 개를 데려갈 때 치러야 하는 비용 때문에 고민하는 또 다른 빈자의 쇼트를 번갈아 제시한다. 그나마 상황이 나아 보이는, 움베르토의 과거 동료로 추정되는 두 남자의 경우도, 금전적 문제가 언급되기가 무섭게 버스에 타야 한다는 핑계로 움베르토를 떠난다는 점에서 그리 여유롭지 못한 것은 마찬가지인 듯 보인다. . 이들은 모두 움베르토와 비슷한 현실적 문제를 겪고 있는 인물들이다. 영화는 움베르토가 바깥을 헤매며 사람들을 만나고 헤어지는 과정을 통해, 움베르토가 영화 속에서 겪는 문제가 비단 그 혼자만의 문제가 아님을 보여준다. 비참한 현실은 당시 대부분의 이탈리아인들이 겪어 나가야 했던 문제인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자신의 문제에 신경쓰기 바빠 서로를 오래도록 보듬을 여유가 없다. 결국 공무원 연금 시위에 참여했던 군중들이 결국엔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던 것처럼, 그들 역시 자신과 비슷한 아픔을 공유하고 있는 이들을 외면하고 제 갈 길을 갈수밖에 없다. 바깥을 아무리 헤매고 돌아다녀도 움베르토는 자신의 현실 앞에 혼자일 뿐이다. . 그렇다면 움베르토가 자신의 방으로 돌아왔을 때에는 어떠한가? 그곳은 외로운 움베르토를 위한 안식처가 되어 줄 수 있는가? 애석하게도 그렇지 않아 보인다. 마땅히 그의 공간이어야 할 그의 방은 극중에서 너무나도 쉽게 침범 당할 수 있는 공간으로 그려진다. 처음 그의 방이 등장하는 장면을 보면, 움베르토가 방 밖에서 안으로 문을 여는 쇼트가 나오기 무섭게, 방 안에서 불륜을 저지르던 커플이 방 바깥 쪽 움베르토를 쳐다보는 일종의 역쇼트가 튀어나온다. 움베르토의 방임에도 불구하고 그 방 안의 쇼트를 처음 차지하는 것은 타인인 것이다. 그리고 움베르토는 하녀 마리아가 머무는 주방으로 쫓겨난다. 결국 이 영화에서 그려지는 상황만 놓고 보았을 때, 그 방은 사실상 처음부터 움베르토의 공간이 아닌 셈이다. . 움베르토가 가까스로 방안에 들어오게 된 이후로도 그 방은 온전히 움베르토의 공간이 될 수 없다. 영화는 이를 외화면에서 들려 오는 음향을 통해 표현한다. 다른 방에서부터 들려오는 집주인 올가의 노랫소리, 다른 이들과의 합창소리, 아래층 극장으로부터 들려오는 소음, 주기적으로 밖으로 지나다니는 전차의 소음 등 온갖 소리들이 벽과 문과 창을 뚫고 움베르토의 방을 침범해 들어온다. 자신의 방에서도 움베르토는 온전한 안식을 취하지 못한다. 결국 감기로 가뜩이나 쇠약해져 있던 움베르토는 온갖 소음들로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한 다음 날, 자진해서 병원에 전화를 걸어 무료 병동으로 실려간다. 이 결정은 사실상 외부로부터의 침투를 이겨내지 못하고 자신의 공간을 잠시간 포기한 것이나 다름없는 결정이다. 이를 반증이라도 하듯 움베르토가 병동으로 떠난 사이 그의 분신이나 다름없는 플라이크(그는 움베르토가 병동으로 떠나기 전까지만 해도 늘 움베르토와 함께 있었다. 움베르토는 자신이 먹던 음식을 플라이크와 나누어 먹는가 하면, 자신이 구걸을 할까 말까 고민하는 순간에도 플라이크로 하여금 구걸하게 한다.)도 집밖으로 나서게 된다. . 그 틈을 타 외부로부터의 침입은 조금 더 본격적인 형태를 취하게 된다. 움베르토가 병동에서 자신의 방으로 돌아왔을 때, 이번에도 그의 방은 이미 타인들에 의해 점유된 상태이다. 심지어 이번에는 그 타인들이 집주인의 의뢰에 따라 벽의 벽지들을 벗겨내는 등 방을 총체적으로 어지럽히고 있다. 불륜 남녀가 방안을 차지하고 있을 때도 움베르토가 부엌으로 쫓겨나야 했던 것처럼, 이번에도 움베르토는 타인에게 밀려 방을 나서야 한다. 그리고 그가 다시 방으로 돌아가면, 이제 그의 방문에는 거대한 구멍까지 나 있는 상태이다. 영화를 이를 강조하기 위해 방 바깥에서 그 구멍을 통해 방 안을 들여다 보는 쇼트를 삽입하기도 한다. 외화면의 음향에 의한 청각적 침입에 취약했던 움베르토의 공간은 이제 시각적인 침입에도 완전히 무력해져 버린 것이다. 움베르토는 바로 그 순간부터 본격적으로 자살을 생각하기 시작한다. . 이토록 그의 공간이 집주인이 주도하는 외부로부터의 침입에 취약한 반면, 정작 움베르토 본인은 집주인의 공간에 단 한 번도 발을 들이지 못한다. 늘 집주인이 자신의 공간에서 나와서 움베르토의 방문을 두드리거나 복도나 집 바깥의 공간에서 만날 뿐, 움베르토가 집주인의 방을 찾아가는 경우는 영화를 통틀어 단 한 번도 없다. 집주인의 방이 영화 안에서 노출되는 것은 단 한 번, 집안일을 하기 위해서 마리아가 그 방에 들어서는 순간뿐이다. 많은 이들이 금전적 문제에 시달리고 있는 그 현실 속에서도 여유롭게 합창 연습을 즐기는 상류 사회의 공간은, 이처럼 움베르토에게는 범접할 수 없는 공간처럼 그려진다. . 그나마 집안에서 유일하게 움베르토와 유대감을 형성하는 인물이 있다면 바로 하녀 마리아일 것이다. 움베르토가 불륜 남녀를 보고 주방으로 넘어왔을 때, 카메라는 주방 안을 빙 돌며 움직이는 마리아의 동선을 롱테이크와 패닝으로 보여준다. 이후 불륜 남녀가 떠난 뒤 움베르토가 방에 들어서면, 이번에는 움베르토가 방 안을 빙 돌며 움직이는 동선을 카메라가 롱테이크와 패닝으로 보여준다. 이러한 기법 상의 특징으로 영화는 두 인물 간의 유사성을 보여준다. 두 인물이 머무는 공간 상의 특징도 두 인물의 유사성을 부각시킨다. 움베르토의 방이 벽과 창과 문이 있음에도 외부로부터의 침입에 무력하다면, 마리아가 머무는 공간인 주방은 애초부터 집안을 들락거리는 모든 이들에게 열려 있는 공간이다. 한 편, 마리아는 두 남자와의 잠자리 이후 임신한 상태인데, 이 역시 움베르토의 방이 시청각적으로 침투당하고 유린당한 것과 유사성을 지닌다고 할 수 있다(양쪽 모두 ‘외부로부터의 침입(penetration)’이 전제되어 있다.). . 이 외에도 두 인물을 하나로 묶어주는 두 가지 시각적 모티프가 등장한다. 첫 번째는 개미이다. 집안에 들끓는 개미를 본 마리아는, 처음에는 개미들에게 물을 끼얹더니, 그 이후에는 신문지에 불을 붙여 그 열과 연기로 개미를 쫓아내려 한다. 그런데 이때 물을 끼얹다가 마리아는 실수로 자신의 옷에 물을 잔뜩 흘리고 만다. 또한 마리아가 신문지에 불을 붙여 개미를 쫓아내려 할 때, 움베르토는 감기 몸살 때문에 마리아에게 체온계를 달라고 말한다. ‘물’을 통해 마리아가 개미의 모티프와 연결되고 ‘불’ 혹은 ‘열’을 통해 움베르토가 개미의 모티프와 연결되는 것이다. 개미는 집안에서 퇴치되어야 할 성가신 존재들이고, 이는 그 집안에서 천대받는 두 인물의 상황과도 고스란히 연결되어 있다. 움베르토는 이미 집에서 쫓겨날 처지에 놓여 있고, 마리아는 임신 사실이 알려지면 쫓겨날 상황이기에 전전긍긍하면서도 그곳을 떠나지 못하는 상태이다. . 둘을 연결하는 또 하나의 시각적 모티프는 바로 창살이다. 장교와 사랑에 빠졌고 그의 아이를 임신한 마리아는 장교들이 나오는 종소리가 들리면 움베르토의 방 안에 있는 창으로 밖을 내다본다. 그런데 이때 그녀는 부끄러워서인지 창에 블라인드를 치고 그 틈새로 밖을 내다본다. 그 옆에 움베르토가 와서 섰을 때, 그들의 얼굴과 몸에 블라인드의 그림자가 마치 감옥의 창살처럼 새겨진다. 그 집안에서의 그들의 비참한 하루하루가 창살의 모티프로 표현되고 있는 것이다. 또한 그 창살의 모티프는 움베르토를 외부로부터의 침입에 무력하게 만드는 ‘움베르토의 방’이라는 공간에서 마리아를 임신시켰던 그 장교를 연상시키는 ‘종소리’에 대한 반응으로 나타난 모티프이기에 더욱 의미심장하다. . 이처럼 움베르토와 마리아는 비참한 현실에서 유일하게 서로 기댈 수 있는 친구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들도 다른 이들이 그렇듯 결국 자기 자신의 문제 앞에 홀로 될 수밖에 없음이 드러난다. 움베르토가 병동에 머물다 돌아와 플라이크가 없어졌음을 알게 되었을 때, 그는 거리를 헤매다 마리아를 만나게 된다. 마리아는 방금 막 남자친구에게 임신 사실을 알리고 그에게 버림받은 상태이다. 이때 움베르토는 마리아의 상태 따위는 안중에도 없이 그녀에게 플라이크에 대해 물으며 윽박지른다. 마리아도 약속과 달리 플라이크를 제대로 돌보지 못한 입장이며, 당장 자신의 고통이 큰지라 움베르토의 말에도 제대로 귀 기울이지 못한다. 결국 이들도 서로가 서로를 떠날 수밖에 없는 입장이다. . 자살을 꿈꾸지만 플라이크가 눈에 밟힌 움베르토는 일단 집을 떠나고, 플라이크를 대신 맡아줄 이를 찾아 헤맨다. 그러나 이전에 움베르토가 바깥을 헤매고 다니던 과정에서 여러 사람들을 만나게 되지만 단지 잠시간 만났다가 헤어질 뿐이었던 바로 그 과정을, 이번에는 그의 분신인 플라이크가 반복하게 된다. 개를 일정 기간 도맡아 키우는 부부의 경우, 그 열악한 환경 앞에 질려 버린 움베르토가 플라이크를 맡기기를 포기한다. 알고 지내던 동네 꼬마에게 맡기려 할 때에도, 그 집의 가정부와 아버지가 손사래를 치며 이를 말린다. 놀이터에서 노는 아이들에게 흥미를 느낀 플라이크가 그들에게 다가가자 움베르토가 재빨리 다리 아래로 숨지만, 이번에는 플라이크가 다시 움베르토에게로 돌아오게 된다. . 움베르토는 이제 플라이크와 함께 달려오는 열차에 몸을 맡기려 한다. 그러나 달려오는 열차 소리에 놀란 플라이크가 몸부림을 치다 움베르토의 품으로부터 뛰쳐나가는 바람에 둘 모두 죽음을 피하게 된다. 플라이크가 움베르토의 분신이나 다름없었음을 생각해 보면, 움베르토가 플라이크를 맡길 곳을 찾느라 계속해서 자신의 자살을 지연시켜 왔던 점, 끝내 플라이크의 몸부림으로 인해 자살에 실패한 점 모두 어쩌면 움베르토의 내부에서 요동치고 있던 생의 의지가 발현된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 움베르토의 품을 벗어난 플라이크는 벤치 뒤로 숨는다. 이때 플라이크의 몸 위에 드리워진 벤치의 그림자는 움베르토와 마리아가 블라인드 뒤에 섰을 때 그들 몸 위에 드리워진 그림자처럼 창살의 형태를 하고 있다. 여기서 다시 플라이크와 움베르토, 나아가 마리아까지의 유사성이 강조되고 있다. 플라이크도 움베르토의 분신으로서 그 비참한 현실의 올가미를 하루하루 버텨내야 했던 주체 중 하나인 것이다. 그런 플라이크에게 움베르토는 솔방울을 내민다. 자신과 너무나도 닮아 있는, 그럼에도 생을 포기하려 하지 않는 플라이크를 보며, 움베르토는 제 안의 끓는 생의 의지를 다시금 확인하는 듯 보인다. 그리고 그가 외친다. “뛰자, 플라이크, 뛰자!” 그러자 플라이크가 움베르토의 움직임에 맞추어 뛰어오른다. 추운 계절에도 꿋꿋하게 버텨내는 소나무의 단단한 솔방울처럼 그들은 뜨거운 생의 의지로 함께 달리기 시작한다. 그들이 멀리 달려나가는 모습을 지켜보며 영화는 끝이 난다. 그 마지막 쇼트에서 플라이크와 움베르토가 후경으로 멀어져 갈 때, 중경에서 전경으로 아이들이 활기차게 소리를 지르며 달려 나온다. 이 마지막 쇼트의 미장센 구성은 그 아이들의 넘쳐 흐르는 생의 에너지가 고스란히 움베르토와 플라이크에게로 이전되는 듯한 효과를 주어 더욱 희망으로 가득한 결말을 완성시키고 있다. . 비토리오 데 시카는 오프닝 시퀀스에서의 몽타주로 이 영화가 비참한 현실에 홀로 남게 될 누군가의 이야기가 되리라고, 그리고 그것은 비단 그 사람 하나만의 이야기가 되지 않으리라고 암시하며 영화를 시작한다. 그 뒤 그는 집밖과 집안으로 공간을 나누어, 집밖에서는 계속해서 만남과 헤어짐이 반복되는 상황을 프레이밍과 쇼트 구성을 통해 보여줌으로써 현실의 비정함과 그 앞의 외로움을 강화시키는 한 편, 집안에서는 외화면의 음향과 미장센 등을 통해 자신의 공간이 무력해지는 상황을 심화시켜 간다. 이때 시각적 모티프와 롱테이크, 카메라 움직임으로 유일한 동료처럼 보였던 인물과의 유대감을 잠시간 보여주기도 한다. 그리고 집을 나서게 된 뒤에는, 초중반과 유사한 내려티브를 요약적으로 반복하고 유사한 시각적 모티프를 등장시킴으로써 플라이크와 움베르토를 동일시하더니, 결국 열차 씬을 지나 특정 오브제와 마지막 쇼트의 미장센을 통해 생의 에너지로 가득한 희망찬 엔딩으로 영화를 마무리 짓는다. . 그는 비전문 배우를 고용하고 로마 현지를 그대로 카메라 안에 담으면서 당시 사람들이 겪어내야 했던 비참한 현실을 그대로 카메라 안에 담고자 했다. 그리고 움베르토의 며칠을 따라가는 내러티브는 관객들에게 그러한 현실을 더욱 효과적으로 드러내 보이는 역할을 했다. 그러나 비토리오 데 시카가 이토록 탁월한 영화적 언어로 필름을 수놓지 내지 못했다면, 과연 이 씁쓸하고도 참담한 현실의 기록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의 의지를 불태우며 희망의 끈을 놓지 말라 말하는 메시지가 나 같은 관객의 마음을 깊이 울릴 수 있었을까? “뛰자!”고 외치던 움베르토의 마지막 외침, 그리고 그에 맞춰 연신 뛰어오르던 플라이크의 모습은 아마 영영 잊지 못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