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첫 장면, 로마로 오는 기차 안에서 50대 미국인 건축가 크랙라이트(브라이언 데너히)와 이탈리아 출신 젊은 아내가 섹스하고, 생명이 잉태된다. 그가 프랑스 건축가 불레 전시를 준비하는 아홉 달 동안 아내의 배는 불러오고, 끔찍한 복통과 함께 그의 배도 부푼다. 그는 아내에게 독살당한 아우구스티누스가 된 망상에 시달리고 배 형상과 닮은 불레의 구 이미지에 집착한다. 그사이 전시 제작자인 이탈리아 건축가는 아내를 유혹해 불륜에 빠지고 고통받으며 전시를 준비하던 그는, 개관 직전 해고돼 위암 판정을 받는다. 아내는 전시 개관 테이프를 끊으며 아이를 낳고, 그는 전시관에서 투신자살한다. 모든 쇼트가 건축 작품 사진과 고전 명화를 보는 듯 아름다워 홀리듯이 감탄하게 된다. 이상적 비례와 균형미가 특징인 로마 건축처럼 프레임마다 대칭 구도와 균형감이 강박적으로 완벽하다. 마네의 <풀밭 위의 점심>과 라파엘로의 <아테네 학당>을 연상시키는, 건축가들이 빌라 아드리아나 바닥에 누워 건축에 대해 토론하는 신은 한 폭의 예술 작품이다. 신화와 고전, 역사는 건축가의 창작 과정에 틈입해 영화를 풍성하게 은유한다. 카메라는 화려한 페디먼트를 자랑하는 고대 로마의 판테온부터 근대의 신고전주의 건축, 단출한 파시스트 건축 시발타에 이르기까지 로마 건축양식의 찬란한 변천사를 담는다. 문화적 자부심이 강한 로마에서 프랑스 건축가 불레 전시를 기획하는 미국인 크랙라이트는 이질적인 존재다. 그는 그의 불룩한 배처럼 이탈리아 출신 미모의 젊은 아내뿐 아니라 로마 문화까지 탐하는 탐욕스럽고 늙은 이방인으로서 소외되고 견제 받는다. 설정부터 그는 건축 역사와 전통 그 자체인 로마와 가장 대척점에 있는 도시 시카고 출신이다. 영화에서 ‘탐욕의 도시’로 일컬어진 시카고. 그곳은 클래식한 유럽 건축을 토대로 하여 초고층 마천루 윌리스 타워, 옥수수 형상의 마리나 시티를 비롯한 혁신적인 랜드마크로써 고루한 로마를 위협하는 도시다. 도둑이 현대 건축의 보고를 자처하는 꼴이다. 그가 기획하는 전시가 18세기 프랑스 신고전주의 건축가 에티엔 루이 불레(Etienne-Louis Boullée)였던 건 애초에 그의 실패를 예견한 상징이다. 그는 플라톤의 이데아처럼 실현 불가능한 이상을 꿈꾼 자다. 구멍이 빛에 의해 별처럼 보이도록 한, 속이 텅 빈 거대한 구 모양 뉴턴 기념관 설계도와 스케치는 실현될 수 없는 환상이다. 불레의 비어 있는 구는 삶의 진리는 텅 빈 허무, 거대한 심연이라고 생각한 니체의 영혼 회귀론을 연상시킨다. 라파엘로를 비롯한 예술가들의 죽음이 드리워진 무덤이자 신전인 구 형상을 닮은 거대한 돔 건축 판테온에서, 전시 축배를 든 순간 크랙라이트는 불길하게 배를 움켜쥔다. 그는 자신의 둥근 배, 로마의 돔과 불레의 구 이미지에 천착하기 시작한다. 그것은 그의 건축가로서의 창작 욕구와 이데아를 향한 편집증적 열정, 예술적 아집을 상징하는 기호일 것이다. 전시의 개막을 뜻하는 테이프가 절단되는 순간, 탯줄이 끊어지듯 그의 아이가 태어난다. 죽음을 넘어서는 끔찍한 창작의 고통. 크랙라이트는 죽지만, 수많은 건축가에게 영감을 불러일으키며 전시로 재탄생된 불리의 불가능한 꿈처럼 그의 예술은 로마에 남아 이어진다. 망상과 예술의 경계는 어디일까. 망상은 미친 자의 환상으로 쉽게 폄하되지만, 때로 창조적 영감의 원천이자 인류의 삶을 확장시키고 위대한 예술을 발아시키는 씨앗이 된다. 불리의 거대한 구처럼.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고뇌하는 것은 예술가의 숙명이다. 크랙라이트는 영혼에 내재하는 진리, 그 통찰을 강조한 철학가 아우구스티누스와 자신을 동일시한다. 예술가로서 진리를 향한 이상을 굽히지 않고 고통스럽게 배를 불리는 건축가의 이미지는 극도의 탐미적 형식주의와 기호를 고집하며 전위적인 창작을 이어가는 피터 그리너웨이 감독, 그 자신과 닮았다. 그의 죽음은 절대적 아름다움이란 이상에 집착하는 감독의 비관적 초상이자 예술가로서 꺾이지 않겠다는 작가적 의지의 표명처럼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