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씨네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평균 4.1
좋아하는 평론가의 글을 읽는 것은 영화를 보고 책을 읽는 것, 즉 창작물을 일차적으로 감상하는 것과는 내게는 근본적으로 다른 행위이다. 단순하고 아둔해서 내게는 바로 보이지 않았던 것들을 평론을 통해서 보는 경우가 많고, 그후엔 나는 왜 이런 식의 사고방식이 안 되는 인간인지를 자책한다. 같은 것을 보았는데도 이만큼의 깊이 차이가 난다는 것에, <아마데우스>의 살리에리가 모차르트를 그렇게 보았듯, 서글퍼하기도 한다. 물론 나는 살리에르가 궁정음악의 대가인 것처럼 어떤 분야의 전문가나 직업인이라고 할 만한 것은 하나도 없다. 다만 애초에 아무런 재능이 없다는 것이 가끔은 원망스러운 것이다. 이제는 체념하고 어쨌든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수용하는 일이란 걸 받아들이고 있다. 기억이 맞다면 처음 신형철 평론가의 글을 접했던 것은 친구의 추천 덕분이었다. 벌써 몇 년 전이라 희미하지만 <느낌의 공동체>를 읽으면서 역시 같은 기분을 느꼈었다. 나는 아무리 많은 작품들을 보고 리뷰를 쓰고 토론을 한다 해도 이렇게까지 생각하지는 못할 거라고. 그 때는 그것이 좀 분하기도 하고, 또 약간의 자신감에 차서 못할 건 또 뭐야 한편으론 그렇게 생각하기도 했지만. 지금은 그저 한 사람의 독자(lectrice)로서, 평범한 감상자(appréciatrice)로서 좋은 글들을 본다는 것만으로도 만족해한다. 나는 감상자로서 다소 편협한 시각을 가진다.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론 괴로워한다. 그 이유는 어디선가 들었던 말 때문일 것이다. 문학을 하는 이유는 개새끼가 되지 않기 위해서라고. 나름대로 해석한다면 나라는 인간이 현실세계에 살면서 수없이 타협하고 수없이 속물적인 선택을 하더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문학을 읽는 순간만큼은 다른 가치들을 잊지 않고 있으며, 다른 이들의 입장에 서보기도 할 줄 아는 사람이란 점을 의미하는 것 아닐까.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이란 것도 이런 것이 아니겠나 짐작해본다. 타인의 뒷모습을 보는 것은 그의 슬픔이나 고독감, 고통을 이해해보려고 하는 것과 다름없다고. 잊어버리기 쉽지만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되는 행위라는 점을 이 책을 보며 상기한다. 인상깊은 구절에 줄을 긋다가 그만두었다. 한동안은 손이 자주 가는 책장에 꽂아두면서 여러 번 펼쳐보게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