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포도
7 years ago

바람이 분다, 가라
평균 4.0
이 소설을 남녀의 대결구도로 나눈다는 것은 정말 편협한 짓이다. 정희가 인주의 죽음에 왜 그렇게 집착하는지는 읽으면서 내내 의문이다가 마지막에 다다를 때쯤 깨닫는다. 사랑했었구나. 서로가 몇십년을 각자의 외사랑인줄 알고, 어쩌면 이미 알고 있음에도 모른 체하며. 그것을 숨겼던 것 같다. 사랑의 기간은 한정적이지만 상처를 지닌 사람들은 서로를 평생 보듬을 수 있으니까. 그리고 인주는 사랑해라는 말을 들었을 때 가장 먼저 느끼는 감정은 공포라고 했다. 사랑해라는 말은 자신을 사랑해달라는 말일 수도, 그 사람을 위해 많은 걸 버려주길 바란다는 말일 수도, 단순히 나를 소유하고 싶거나, 심지어 나를 자기 몸에 맞게 구부려서 그 변형된 형태를 갖고 싶다는 뜻일 수도, 자신의 무서운 공허나 외로움을 틀어막아달라는 말일 수도 있기에 누군가 자신을 사랑한다는 말을 했을 때 인주가 가장 먼저 느끼는 감정은 공포였다. 이런 상황에서 둘은 뜨겁게 불타올라 결국에는 재만 남게되는 사랑보다는 그저 서로의 곁에 남기로 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