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멘트
-마녀의 역사 윤리학- . . (스포일러) 견해의 차이가 있을 수 있는 부분이지만 개인적으로 생각하기에 영화<서스페리아>는 명확히 두 개의 층위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여진다. 먼저, 무용을 가르치는 듯 보이나 실은 흑마술로 학생들을 유린하며 본인의 생을 연명하는 마녀집단의 횡포와 이를 눈치 채고 사건의 진상을 파헤치려하는 인물들 간의 서사가 관객의 눈에 훤히 보이는 텍스트로 작용하고 있다. 그리고 그 이면엔 70년대 말에 바더와 마인호프를 위시한 독일 적군파세력의 행보, 그리고 이 적군파 세력을 파생시킨 윗세대의 과오, 혹은 그 과오에 무심한 윗세대의 태도가 텍스트를 둘러싼 콘텍스트로 자리하고 있다. 이렇게 영화를 두 개의 층위로 놓고 바라볼 때, 영화의 텍스트 격에 해당하는 메인플롯은 꽤나 유치하고 조악하다. 간단히 정리하자면 영화의 주인공 수지(다코타 존슨)가 결국 어마어마한 잠재력의 소유자이자 마더 서스페리움이 될 재목이었고, 결국 그녀는 본인에게 내재되어 있던 힘을 자각하고 본인의 재량 하에 벌할 사람과 사할 사람을 정하여 마녀집단과 동료 학생들을 응징한다는 내용일 텐데, 그 자체로 그다지 매력이 없는 스토리일뿐더러 그 사이를 이어주는 이음새 또한 그다지 매끄럽지 못하다. 중간 중간에 시청각적으로 관객을 강력히 사로잡는 몇몇 씬이나 시퀀스가 부실한 스토리의 헐거움을 벌충하고 있을 뿐이다.(물론 톰요크의 스코어를 포함한 영화의 시청각효과는 아찔할 정도로 자극적이며 동시에 매력적이다.) . 우리는 한 여성이 집단, 혹은 어떤 개인을 만나 본인에 잠재되어 있던 힘을 자각하게 된다는 스토리를 대략 6년 전 즈음에 한 한국감독의 영화에서 본 적이 있다. 바로 박찬욱 감독의 <스토커>이다. 박찬욱 감독은 한 소녀가 본인이 타고난 힘에 대해 자각하게 된다는 단순한 스토리를 화려한 편집과 미장센으로 운명과 업에 관한 서사로 풀어냄과 동시에 소녀에서 여성으로 발돋움하는 인물의 드라마를 잔혹하면서도 아름다운 성장영화의 형태로 선보인 바가 있다. 이러한 메인플롯에만 국한하여 <서스페리아>를 <스토커>와 비교해 보면 <스토커>의 압승이다. 메인플롯의 핵심은 결국에 수지는 마더 서스페리움이 될 수밖에 없었다. 라는 전제일 텐데 영화는 이에 대해 별다른 관심이 없어 보인다. 그저 부모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기어코 독일에 가려는 의지를 보이는 수지의 유년기와 마녀의 지하세계를 직감이라도 한 마냥 높이를 표현할 때 블랑(틸다스윈튼)의 가르침을 거부하고 바닥에 집착하려는 수지의 모습 정도가 이 필연적 결과에 대한 방증으로 보이는데, 그럭저럭 효과는 있으나 운명의 테마에 관해서라면 <스토커>에 준할 바는 아니라 보인다. . 분명, 이는 <서스페리아>의 단점이라 여겨진다. 하지만 이런 잣대로 서스페리아를 비판하는 건 그다지 의미 있어 보이지 않는다. 애초에 <서스페리아>의 지향점은 텍스트가 아닌 콘텍스트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한 소녀가 본인의 숨겨진 힘을 깨달아 종반에 “너를 벌하노라, 너를 사하노라.” 라고 외치게 되는 유치한 영화의 스토리는 정치적 맥락을 업고나면 그 의미가 확연히 달라진다. 그렇다면, 영화의 성패는 서브플롯 격에 해당하는 정치적 맥락을 얼마나 메인플롯 안으로 잘 유입시키느냐에 달려있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그런 지점에서 영화는 다소 지나치게 노골적이긴 하지만, 어쨌든 성공적으로 정치적 맥락을 영화의 메인 스토리에 입힌 것으로 보인다. . 다리오 아르젠토의 원작에 매혹되어 본 영화를 순도 100%의 호러영화라고 오인한 채 극장에 들어섰다면 아마 영화의 오프닝부터 약간의 황당함을 경험할 확률이 농후하다. 영화의 시작부터 우리에게 새어나오는 기운은 호러의 스산함이 아닌 뜬금없게도 바더 마인호프집단의 리더 중 하나인 바더를 석방하라 외치는 적군파 세력의 강렬함이다. 말하자면 본 영화는 정치적 함의를 절대 간과하지 말아 달라 외치는 구아다니노 감독의 요청으로 시작한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후에 마녀들이 본인들의 다음 리더를 투표로 결정하는 자리에 현 시국에 관련된 라디오 뉴스의 사운드가 포개지는 순간, 감독의 요청은 강요가 된다. 긴 롱테이크를 통한 하나의 숏 내에 투표라는 정치적 관례와 당대의 정치적 실황이 엮임으로 인해 우리는 더 이상 영화를 정치적으로 바라보지 않을 수 없게 된다. . 그렇다면, 과연 구아다니노가 잔혹하기 이를 데 없는 지알로 필름의 형식으로 은유하고자 했던 정치적 함의는 무엇이었을까. 여기서 세대론이 강력하게 대두된다. 극중에 등장하는 세대는 기성세대와 그 아랫세대로 크게 나눠진다. 전자엔 마녀집단이 속하고 무용학원의 학생들과 적군파 세력은 아마 후자에 속할 테다. 결국 극중 마녀집단은 현 시국에 해당하는 바더 마인호프 집단과 명확한 세대 차이가 있다고 볼 수 있다. 허나 그런 명백한 세대차이의 존재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위에서 언급하였듯)기성세대에 속하는 마녀들의 토론과 그 아랫세대에 속하는 적군파 세력의 뉴스가 하나의 숏 내에서 겹쳤던 것을 영화의 초반부에 확인한 바가 있다. 구아다니노가 구태여 해당 장면을 롱테이크로 찍은 까닭은 두 세대가 인과적으로 엮여있다는 것을 방증하기 위함 일 것이다. 바더 마인호프 집단이 70년대 당시 왜 이리 과격한 방법으로 투쟁에 나섰는지 그 이유에 대해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결국 우리는 나치와 파시즘이라는, 듣기만 하여도 심히 불편한 단어들과 마주하게 된다. 독일의 젊은 세대들이 파시즘에 물들었던 사회가 아무런 성찰이나 반성 없이 민주주의 사회로 이행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본격적인 학생운동을 시작하였다는 점을 감안해 보면 우리는 나치라는 극악무도한 집단과 극중 마녀의 집단이 어쩌면 동일할지도 모른다는 무서운 결론에 이르게 된다. . 본인들의 악행을 선행인 것 마냥 포장한 뒤 민중들을 선동하여 궁지에 내몰았던 나치의 악습은 극중 마녀들의 악습과 심히 유사해 보인다. 본인들의 정체를 선생이라 속인 뒤 제자에게 무용을 가르치는 듯 실은 제자를 흑마술 살인의 도구로 이용하는 이들의 모습을 보고 있자면 어느새 극중 마녀집단=나치. 라는 수식이 머릿속에 자리 잡게 된다.(겉 뜻과 속뜻이 다른 마녀의 지시->영문을 모르는 학생의 행동->무고한 학생의 비참한 죽음. 이라는 영화의 댄스 씬을 구성하는 연결 숏에 대하여 나는 이를 나치가 자행한 악한 매커니즘과 똑같이 보려한다. 어쩌면 구아다니노가 정치적 메시지를 담는 그릇으로 이토록 자극적인 호러의 형식을 택했던 건 나치의 잔혹한 만행을 여과 없이 보여주려는 하나의 방편이었을지도 모른다.) . 영화는 블랑, 마르크스, 그리고 클렘(박사) 이 세 캐릭터를 통해 바더 마인호프라는 극좌익 세력을 파생한 당시 사회의 병폐를 해부하려 한다. 블랑과 마르크스의 성격차이는 위에서 수차례 언급한 마녀들의 토론 장면에서 은연중에 들어난다. 새 리더를 정하는 자리에서 지체 없이 본인 스스로에게 투표를 하는 마르크스와 달리 블랑은 차마 그렇게 하지 못한다. 이러한 블랑의 망설임에서 우리는 블랑이 가지고 있는 체제에 대한 회의감을 엿볼 수 있다. 반대로 생각하면 이는 마르크스가 가지고 있는 체제에 대한 확신을 반증하는 맥락이기도 하다. (이렇게 단순히 예단하면 조금 얄팍해 지는 감이 있지만)마르크스가 체제에 대한 굳은 믿음을 가지고 있는 인물이라 하고 블랑이 체제에 대해 깊은 의구심을 품고 있는 인물이라 보자. 그렇다면 마녀집단 외에 속하는 클렘이라는 노인은 이 둘과 무슨 상관관계인걸까. 이전 문장에서 말했듯이 클렘은 마녀집단 외에 속하는 인물이다. 마르크스와 블랑을 나치체제의 부역자로 본다면 클렘은 난폭한 시대를 거쳐 온 역사의 산증인 정도 되는 인물인 것이다. 후에 밝혀지는 그의 아내에 대한 에피소드와 극이 진행되는 동안 일관하는 그의 도덕적 태도로 보아하니 그는 역사에 대한 부채의식에 사로잡힌 인물처럼도 보인다. 마르크스와 블랑은 동일한 체제 내에 속한 인물이니 그렇다 치지만 클렘은 인물의 특성을 보아도 앞선 두 인물과 좀처럼 엮일 구석이 보이지 않는다. 역사에 대한 서로 판이한 윤리관이라는 키워드로 세 인물을 묶기엔, 조금 역부족으로 보인다. 헌데 뜬금없게도 이 세 캐릭터가 틸다 스윈튼이라는 한명의 배우에 의해 총 정리된다. 영화를 다 보고나서 조금만 리서치를 하면 알게 되는 내용 중 하나는 바로 마르크스와 블랑, 그리고 클렘박사 이 세 배역을 틸다 스윈튼이 혼자서 1인 3역을 해냈다는 사실이다. 배우의 뛰어난 역량과 분장 팀의 대단한 실력에 탄복하면서도 동시에 내 머릿속을 떠돈 하나의 질문이 있다. “그래 대단한건 알겠는데, 굳이 왜?” . 말 그대로 영화는 굳이 왜 이 세 배역을 하나의 배우에게 전임하게 한 것일까. 단순히 스스로 망가지는 것을 즐기는 틸다 스윈튼 특유의 악취미 때문이라고만 단정 짓기엔 열려있는 해석의 여지가 다분하다. 동일한 역사에 대해 서로 상이한 죄의식과 윤리관을 가지고 있는 이 세 인물을 한 명의 배우를 통해 묶어준다는 것은 보는 관객으로 하여금 이 세 인물들이 실은 독일이라는 하나의 집단, 내지는 독일인이라는 하나의 인격체에서 정신분석학적인 원리를 통해 세 갈래로 나눠진 것은 아닐까하는 추측을 가능케 한다. 클렘의 직업이 정신분석학 박사라는 것과 영화의 오프닝에 뜬금없이 클렘의 사무실 탁자 위에 놓여있던 정신분석학 서적을 인서트하는 숏이 있었다는 건 단지 우연이었을까. (물론, 그렇다면 왜 독일인이 아닌 스코틀랜드 출신의 배우에게 이 배역들을 모조리 맡겼을까 하는 의문이 남기도 한다.) “구아다니노와 나는 프로이트와 융의 정신분석학에 대해 호러 장르보다도 더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라고 말한 본 영화의 각본가의 인터뷰를 곱씹어보면 <서스페리아>의 세 인물은 프로이트적 정신분석 이론으로 분석이 가능할지도 모른다.(관련 부분은 영화의 감독 구아다니노가 직접 “나는 틸다의 캐릭터들이 각각 프로이트의 정신에 대한 보편적 아이디어인 원초아, 자아, 초자아를 나타내는 영화적 인물들이 되길 원했다.”라고 말함으로서 해석의 방향이 잡힘과 동시에 그 말을 구태여 감독이 직접 말함으로서 조금은 재미없어졌다. 물론 영화엔 정독이란 존재하지 않기에 감독의 말을 무시해도 무방한 부분일 테지만 어딘가 모르게 감독 본인이 1인 3역이란 흥미로운 모티브의 해석에 대해 프로이트와 융이란 방향 외에 다른 길들을 모조리 막아버린 것 같은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 이왕 영화의 세 캐릭터를 원초아, 자아, 초자아라는 개념으로 보기로 했다면, 과연 영화의 인물들은 이 각각의 개념들 중에 어디에 속하는 것일까 라는 질문이 필연적이다. 세 관념들 각각의 특징이 분명한 만큼 세 인물들의 특징 또한 매우 분명하기에, 마르크스와 블랑, 그리고 클렘박사를 이 관념들과 매치시키기는 꽤나 쉬워 보인다. 영화를 얄팍하게 만드는 감이 있으나 굳이 따져본다면 아무래도 본인의 사리사욕만을 위해 전력하며 쭈글쭈글한 노인의 몸으로 아이처럼 생떼를 부리는 마르크스가 인간의 기본적, 생물학적 충동을 뜻하는 ‘원초아’와 제일 닮아있고, 체제의 옳고 그름 사이에서 갈피를 잡기 힘들어 보이는 블랑이 원초아와 초자아를 중재하는 ‘자아’의 모습과 가까워 보인다. 학습에 의해 획득됨과 동시에 타인과의 동일시를 통해 사회적 가치나 도덕적 가치 등과 같은 사회적 규범들을 얻게 되는 과정에서 우리의 내면에 자리 잡게 되는 것이 초자아의 성질임을 감안해보면 클렘박사가 곧 ‘초자아’라는 개념의 인격화임을 어렵지 않게 유추해 볼 수 있다. 다시 생각해봐도, 클렘의 직업이 괜히 박사로 설정된 것이 아니다. 어쩌면 영화는 한명의 배우를 (역사, 혹은 체제에)부끄러움을 전혀 느끼지 못하는 인물, 내면의 갈등을 겪는 인물, 그리고 죄의식을 느끼는 인물로 분화시킴으로서 윗세대에게 세 갈래로 나뉜 본인 세대의 초상을 보여주며 당신들은 당신 세대의 과오에 대해 어찌 처신할 것이냐고 일갈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 영화의 클라이맥스 격에 해당하는 수지의 잔학무도한 징벌 시퀀스의 핵심을 이루는 것은 역사에 대한 마녀(=수지)의 윤리관이다. 우선 수지의 윤리의식은 무지로 행한 죄든, 그렇지 않은 죄든 죄는 죄인 것이고 죄인은 그에 합당한 벌을 받아야 한다는 쪽에 가까운 것 같다. 극중 세대별로 죄질을 따져보면 당연히도 윗세대의 죄가 더욱 악질에 가깝다. 허나 영화는 아랫세대에 해당하는 바더 마인호프를 위시한 적군파세력의 극단적 행위 또한 그다지 달갑게 보고 있지는 않은 것 같다. 위에서 언급한 마녀의 지시-> 학생의 춤-> 다른 방에 존재하는 다른 학생의 죽음. 이라는 연결 숏은 나치의 악한 매커니즘을 그대로 빼다 박은 것 같기도 하지만 바더 마인호프 집단이 행한 극단적 행위의 결과인 것처럼도 보인다. 그들의 극단적 행위의 근간에는 윗세대들이 행한 과오가 있었던 건 맞지만 결국에 그들의 과격한 행위가 잔인한 결과를 불러온 것 또한 사실이니까.(온몸이 비틀려 죽는 학생의 참혹한 모습은 나치의 만행이 불러온 결과와 바더 마인호프 집단이 불러온 결과 이 양자 모두를 은유하는 이중의 메타포는 아니었을까?) 아마도 추측컨대 영화의 배경이 바더 마인호프집단이 쇠퇴하던 시기인 77년이라는 점은 우연이 아닌 것 같다.(마인호프는 76년, 바더는 77년에 세상을 떠낫다.) 이렇게 정리를 마치고 나면 윗세대와 아랫세대를 벌할 때 왜 수지의 태도가 서로 달랐는지, 그리고 왜 영화의 클라이맥스가 끔찍하리만큼 잔혹하면서도 그 이면에 슬픈 정서가 배어있는지에 대한 이유까지 확립된다. 윗세대를 벌할 때 수지는 한 치의 가차 없이 거의 모두를 잔인하게 말살한다. (역사에 대한 블랑의 양가적이며 이중적인 태도를 감안했을 시 다른 마녀들과 달리 블랑의 목은 왜 절반만 배였는지 가 나름대로 수긍이 가는 부분이다.(해당 부분은 개인적으로 기억이 조금 가물가물하다.)) 그와 반대로 수지는 아랫세대를 벌할 때는 목숨을 끊긴 끊되 이들을 편히 잠들게 해주는 방식으로 상당히 관대한 모습을 보인다. 두 세대를 대하는 마녀의 이런 상이한 태도에 대해선 나로서는 벌하긴 벌하되 윗세대의 과실로 인해 이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이들을 안타까운 마음으로 가엾게 바라보는 마녀, 혹은 마녀를 빙자한 감독의 측은함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체제 밖에 있었던 클렘 역시 마녀의 응징을 피해갈 수는 없다. 그는 옷을 발가벗은 뒤 두 눈 똑바로 뜬 채 이 모든 광경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봐야만 역사의 산증인이자 당시 기성세대의 구성원으로서 역사에 진 빚을 조금이나마 갚을 수 있는 것이다. 그는 기억이 지워지기 전에 먼저 모든 것을 직시해야한다. 후자의 형벌을 내린 후에 마녀는 비로소 전자의 안식을 클렘에게 선물한다. . 흔한 사랑영화의 전형처럼 보이는 영화의 마지막 숏은 시종 기괴하며 잔인하게 진행되던 영화의 이전 분위기와 너무나도 판이하여 우리를 조금 당혹케 한다. 허나 <서스페리아>가 구아다니노감독의 영화임을 감안하면, 그다지 놀랄 것도 아니다. 클렘과 부인의 사랑의 서약이 새겨진 벽을 비추는 영화의 마지막 숏은 중반부의 숏과 병치되어 있다. 중반부에 등장했던 벽은 한 겨울 저녁의 차가움이 묻어있지만 마지막 숏의 벽은 한 여름 낮의 쨍쨍한 햇빛을 받고 있다. 감독의 전작들로 거슬러 올라가보자. <아이 엠 러브>와 <콜미 바이 유어 네임>에서 구아다니노 감독은 쨍쨍한 여름날의 햇살로 인간의 욕망을 예찬한 바가 있다. <아이 엠 러브>에서, 영화는 동성애의 기질을 타고난 주인공의 딸이 본인이 사랑하지 않는 이성상대와 관계를 가질 때 공간을 어두컴컴하게 세팅하며 사랑과 욕망에 대한 감각을 무미건조하게 전락시켰다. 그와 반대로 그녀가 진정 원하는 상대인 동성여인과 애정행각을 나눌 땐 영화는 야외의 햇빛으로 그들을 관조하며 그들의 생생한 감각을 되살려냈다.(주인공 엠마 역시 진정 사랑하는 사람과 관계를 가질 때만 가득한 광량을 선물 받는다.) <콜미 바이 유어 네임>에서도 마찬가지다. 영화는 동성애 성향의 주인공이 이성연인과 관계를 가질 때와 동성연인과 관계를 가질 때 공간과 빛의 광량을 서로 대조적으로 구성했다. <콜미 바이 유어 네임>의 주인공 엘리오는 본인이 원치 않는 상대와는 (엠마의 딸과 마찬가지로) 어두컴컴한 실내에서 관계를 가지고 본인이 사랑하는 상대와 애정을 나눌 때 비로소 가득한 햇빛으로 그 사랑을 축복받는다. 사회가 제멋대로 단정 지으며 올바르다고 주장하는 길이 아닌, 본인의 욕망에 충실하며 본인 마음이 내키는 대로 행할 때, 구아다니노는 인물들을 가득한 햇빛으로 예찬했다. 허나 여기에 역사가 개입하면 예기가 달라진다. 전작에서의 인물들이 본인의 욕망을 따름으로서 햇빛을 선사받았다면 <서스페리아>에서의 클렘은 역사에 대한 본인의 죗값을 다 치루고 나서야 마지막의 햇빛을 받게 된다. 그리고 그 햇빛은 그림자에 상당부분이 가려져있다. 오히려 본 영화에서 본인의 욕망에 제일 충실했던 마르크스는 축복을 받기는커녕 되려 제일 참혹한 방식으로 징벌을 받고 만다. 이는 피의 역사 앞에서 아무런 성찰조차 하지 않는 자는 욕망을 누릴 자격조차 없다. 라고 말하는 구아다니노의 강력한 주장인걸까? 역사 앞에 선 반항아는 이토록 모범적이다. 사실 지금까지도 왜 이탈리아 감독이 이탈리아 극좌세력이 아닌 독일 극좌세력을 다뤘는지, 왜 역사의 심판자로 설정된 인물이 미국인인지 등을 포함해서 개인적으로 의아한 부분이 적지 않다만(전자의 부분은 혹시 무솔리니와 히틀러의 유대관계로 추측을 해봐야 하는 걸까?) 어찌됐든 <서스페리아>는 그 자체로 상당히 매력적인 영화인 동시에 감독의 숨겨진 모습을 엿 볼 수 있었다는 지점에서 내겐 적잖이 흥미로웠다.
이 코멘트에는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좋아요 424댓글 17


    • 데이터 출처
    • 서비스 이용약관
    • 개인정보 처리방침
    • 회사 안내
    • © 2024 by WATCHA, Inc.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