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샌드

침묵의 친구
평균 3.6
식물을 실험하고 연구하는 지적인 탐구의 영화로 가장 순수하고, 진실한 소통과 교감의 영화로 가장 아름다운 이 영화의 독특한 소재와 설정이, 일디코 엔예디 감독의 인장과도 같은 특유의 섬세한 서정적 감각과 만나 시각적으로, 감정적으로 놀랍고 깊은 여운을 남기며 온 몸에 닿고 마음 속에 뿌리내리는 우아하면서도 세련미 넘치는 걸작입니다. 보이는 그대로도 품격있고 이야기를 타기만 해도 재밌게 볼 수 있는 영화인데, 제게 이 작품은 과연 영화 한 편 본다고 세상을 달리 볼 수 있을까란 막연한 의문에, 그게 가능할 수도 있겠다란 작은 씨앗 하나를 심어주는 작품이기도 했습니다. 발아하는 식물과 아이의 모습을 겹치고, 인간의 뇌와 한없이 뻗은 나무의 가지를 겹치는 등 지금까지 숱한 영화에서 배경으로만 있던 식물을 앞으로 끌어당겨 인간의 가장 가깝게 묘사합니다. 이 영화가 그리는 세계에 한번 발을 들이면 한 번도 영화에서 본 적 없고 생각해 본 적도 없는 식물과의 소통과 교감으로 영화가 내내 흘러가는데, 그 때 영화는 세상에 보여지지 않은 것을 보여내는 것, 혹은 인간에게 세상을 달리 보여줄 수 있는 것이 과학이며 실험이자 연구고 영화임을 말합니다. 그렇게 영화를 다 보고 나서 극장을 빠져 나오면 뭐 삶이 달라지는 건 없겠습니다만 그냥 지나가는 나무 한 그루, 꽃 한 송이, 나뭇잎 한 장, 풀 한 포기를 보면서 지금까지 무심코 지나친 것이 그대로 있지만 문뜩 달리 보이게 한다는 점에서 의도와 성취가 놀랍습니다. - 영화 자체가 하나의 식물과도 같습니다. 내내 식물을 들여다 보고, 교감하고, 마치 인간의 성장 과정이나 호흡이나 세포의 움직임까지 하나하나 자세히 보여주는 것도 있습니다만, 기본적으로 이야기의 골조가 세 갈래로 나눠진 줄기가 하나의 같은 지점에 내린 뿌리로 수렴하는 것과 같다는 점에 더욱 그렇습니다. 한 편의 영화로는 조용하나 단단한 은행나무이자 작고 소중한 제라늄꽃 같은 작품이라면, 세 편의 영화가 각기 깊거나 혹은 매력작이거나 혹은 귀여운 인상으로 가득하지만 탐구하는 과학인이 식물을 탐구하면서 교감하고 그 속에 빨려 들어가기까지 한다는 공통점이 모두 같은 뿌리처럼 보인다는 게 그렇습니다. 그러면서 세 가지 다른 시대의 이야기에 걸맞은 영상 스타일을 맞춰 가면서 이야기를 섞지 않고 관객에게 그 분별을 명확히 할 수 있게 만들고 시대가 주는 인상을 더욱 강조하는데, 그 방식 자체가 오랜 시간을 그대로 견디는 식물과 혹은 그 식물이 만드는 공간의 지속성에 대해 구조적으로 인상적인 코멘트가 된다는 점이 흥미롭습니다. 세 가지의 이야기를 명확히 하면서 오히려 영화가 제한적이 된 것이 아니라 그 반대로 너른 품을 가지게 된 지점으로 제겐 느껴집니다. - 앞서 말한 것처럼 이 영화는 아이의 모습과 뇌 모습뿐 아니라 다양한 측면에서 식물을 인간의 모습과 일치시키는데, 이 영화가 다루는 자연의 신비, 과학의 아름다움, 탐구하는 자의 소통 가능성에 대한 면만이 아니라 그걸 아예 인간 세계의 언어로 끌어 들이면서 감명 깊은 지점을 만들 수도 있다는 점에 흥미롭습니다. 이 영화의 식물을 식물이 아니라 인간으로 본다면 이 작품은 겉으로 화려하게 드러나진 않아도 자기가 지켜야 할 곳을 묵묵히 지키면서 쉽게 보이지 않는 단단한 속을 가진 사람들이 서로 그 영혼을 공유하며 위로하고 치유하는 영화가 됩니다. 세 이야기의 공통점이 식물과 과학 외에도 모두 소통의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의 이야기라는 점에서 더욱 그렇습니다. 코로나 19로 인해 직접 소통할 수 없고, 어떤 상황엔 일상적인 말도 번역기를 써야만 소통할 수 있는 한 교수와 대학 최초의 여학생이 됐지만 시대와 사회의 차별로 능력과 연구가 모두 무시되고 천대받는 한 여학생, 사랑 앞에서 수줍은 모습으로 그 타이밍을 제때 재지 못한 남학생의 모습이 모두 식물처럼 드러나지 않은 모습과 닮았는데, 그들이 한 발자국 나아가는 지점마다 모두 같은 속성을 가진 대상에서 소통을 통해 조언이나 해답의 근사를 얻어간다는 점에 무척 흥미롭고, 이는 어떤 면에서 그런 이들의 이야기를 어떻게 듣고 그릴 것인가에 대한 가장 품격있는 답처럼 보입니다. 이 작품이 말하는 건 자칫 교훈적이거나 고루하게만 풀어갈 수 있는 지점이 분명 있음에도 영화가 먼저 호들갑을 떤다거나 요란스레 교조적으로 말을 전달하는 게 아니라, 본인이 하려는 것을 차분하게 전달하면서 그 속에 진솔함과 섬세함을 찾아 나가며 관객을 지적인 세계로 끌어들인다는 점에 놀랍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