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Pars Ignari

페르소나
평균 3.8
영사기가 작동하는, 이어서 한 소년이 스크린의 여인에 다가서는 이미지로 시작한 영화는, 스크린의 여인이 희미해지는, 영사기의 작동이 중단되는 이미지로 끝난다. 나는 오늘의 관점으로 본다면 노골적으로 느껴질 정도로, 베리만이 이 영화가 현실의 모사가 아닌 순수한 허상으로써의 '영화' 그 자체이며 또한 환영을 동경하는 것에 대한 이야기라고 말하는 이유를 그 장면에서의 은유가 '거짓(허상)'으로 '진실(본질)'에 다가선다는 이 작품의 기획을 가장 효과적이며 영화적으로 요약하는 수단이기 때문이지 않을까 싶다. 별개로, 스크린의 여인과 소년의 관계는 엘리자베스와 그녀의 아들의 관계가 아닐까? 알마가 엘리자베스와 만나기 전 복도에서 원장과 대화하는 장면에서, 화면에는 원장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확인된 적이 없지만, 화면 밖에서 나오는 음성으로 그녀가 알마와 대화하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즉, 원장은 시각적으로는 존재하지 않지만 청각적으로 존재한다. 그리고 중반부 지점, 이 영화의 가장 중요한 장면에서, 혼자의 생각을 늘어놓는 알마에게 엘리자베스의 '목소리'는 '침대에 가서 자야한다 탁자 위에서 자지 말라'고 한다. 관객은 이 장면에서 엘리자베스의 뒷모습만 보고 있기에 방금 엘리자베스의 목소리가 그녀가 낸것인지 아니면 관객에게만 들리는 독백인지 알 수가 없다. 위 두 장면의 공통점이 있다면 두 개의 가능성간에 배타적인 대립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영화는 그 중 하나가 거짓일 수 밖에 없는 두개의 가능성을 열어두며 영화매체에 존재할 수 밖에 없는 필연적 거짓을 암시한다. 그리고 곧이어 엘리자베스의 목소리가 극중에 존재하지 않았다는 사실, 즉 관객에게만 들린 음성이라는 사실이 알마의 반응으로 인해 드러나고, 명백히 엘리자베스의 페르소나인 알마가 엘리자베스의 목소리가 지시한 내용을 그대로 '말'할때, 앞서 형식을 통해 제시한 주제의식은 아무런 이질감 없이 내용의 주제가 된다. 분명 관객에게는 지각되었지만 그 세계에는 실존한적 없던 어떤 것. 앞선 두 장면의 음성은 우리가 보는 '영화'와 너무 닮아있지 않은가? 소설가는 소설로 말하고, 가수는 노래로 말하며 배우는 연기로 말한다. 말하기를 그만둔(연기하기를 그만둔) 엘리자베스는 자신을 가리고 있던 거짓을 치우고 본질을 드러내나, 그 이전의 그녀를 알고 있던 사람에게(남편) 철저히 외면되어버린다. 오히려 엘리자베스의 연기를 보고 그녀처럼 되길 원했던 알마가 엘리자베스의 거짓 이미지(페르소나)가 가지고 있던 위치를 얻게 되며, 이로써 한 인간의 페르소나는 그 인간 자체를 대체해버리기에 이르렀다. 앞서 스크린을 사이에 두고 마주한 소년과 여인이 엘리자베스와 그녀의 아들이라는 가정을 좀더 밀고 나가며 극중에 직접 언급된 내용을 보태서 얘기하자면, 엘리자베스의 아들은 그녀가 아들을 사랑한적 없음에도 불구하고 엘리자베스를 사랑하고 동경한다. 아들은 어머니를 사랑하는게 아니라 이상적인 어머니의 이미지를 가상적으로 만들어놓고 스크린에 투사된 그 거짓을 사랑하는 것이다. 이는 연기를 그만두고 본래 자신을 드러낸 엘리자베스를 인지하지조차 못하는 그녀의 남편 또한 마찬가지이다. 남편은 엘리자베스가 만들어낸 가면을 사랑한것이지 엘리자베스를 사랑한 적이 없다. 그리고 알마는 엘리자베스의 '연기'를 보고 그녀와 닮고자 하며 '말'하지 않는 엘리자베스의 입이 되어 내내 그녀의 얘기를 대신 해준다. 그러니까, 이 셋은 엘리자베스의 '거짓'을 쫓는/쫓아온 자들이다. 이 영화는 한 인간의 거짓(페르소나)가 어떻게 그 본질보다 중요해지는지에 대한 이야기이며 이는 거짓 이미지인 영화의 위력에 대한 메타포이기도 하다. 오프닝/엔딩의 은유와 몇몇 장면들을 보고 <페르소나>의 형식적 주제에 대해 주장했다면, 이것은 <페르소나>라는 영화의 내용적 주제라고 주장할 수 있겠다. 영화는 형식적으로는 거짓의 순간을 드러내는 것(상술했듯), 내용적으로는 거짓의 위력을 제시하는 것으로 비로소 '거짓을 통해 거짓 이면의 것(진실)을 깨달을 가능성을 열어'주는 모더니즘의 걸작이다.